지베렐린, 식물계의 마법 신호등
혹시 지베렐린(Gibberellin)이라는 물질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아마도 대부분의 분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건강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으니 관심 밖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이 지베렐린은 식물에게도 인류에게도 아주 중요합니다.
여러분들도 많이 먹는 칠레 포도(톰슨씨없는포도), 스페인과 미국에서는 크리스마스 오렌지로 불리는 클레멘타인 오렌지 - 제주에서도 최근에 재배되기 시작했다고 하죠 -가 이 지베렐린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일부 포도와 배 역시 관련됩니다. 이제 좀 관심이 생기나요?
원래 과일이란 씨앗이 생겨야 씨방, 즉 과육이 커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먹는 오렌지와 많은 포도는 씨앗이 없습니다. 먹기는 편한데, 식물이 저절로 그렇게 될 수는 없겠죠. 지베렐린에 그 비밀이 있습니다. 아주 묽은 농도로 지베렐린을 과일에 부려주면 먹음직스럽게 커집니다. 캐나다산 체리가 큰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씨앗이 없는 과일이 어떻게 가능해, 라는 질문은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쓰고요, 오늘은 이 지베렐린에 대해 좀 더 알아보죠.
지베렐린은 1926년에 일본 농업시험장에서 일하던 연구자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습니다. 그것도 벼를 재배하던 중에 말입니다. 농업 연구자인 구로사와 에이이치 씨는 벼의 키가 웃자라 바람에 쉽게 쓰러지거나 말라죽는 현상을 관찰합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공통적으로 곰팡이가 감염되어 있는 게 보였습니다. 나중에 이 곰팡이는 Gibberella fujikuroi로 밝혀졌습니다. 구로사와 씨는 곰팡이 추출물을 벼에 뿌려보니 마치 벼 키다리병에 걸린 것과 같은 증상을 발견합니다. 곰팡이가 만들어 내는 물질에 의해 벼의 키가 이상하게 커진다는 걸 발견한거죠.
1938년 동경제국대 야부타 데이지로 교수가 곰팡이 추출물을 정제해서 벼를 웃자라게 하는 물질을 지베렐린이라 명명합니다. 과학자라 그런지 상상력은 좀 떨어 집니다. 균주의 이름에서 바로 가져왔으니 말이죠. 요즘 같으면 바이오벤처 열풍을 몰고 올 대발견이었다고 할만합니다.
지베렐린은 위의 그림에서처럼 네 개의 고리 구조로 된 디테르펜계 화합물입니다. 약간의 유도체들이 있어서 GA1, GA2, GA3 이렇게 불리기도 합니다.
지베렐린은 식물의 신장, 개화, 종자발아, 열매생장, 착과작용 등을 촉진한다.
지베렐린은 식물의 성장을 촉진하는 역할을 합니다. 세포에서 지베렐린을 만들어내면 미친 듯이 세포가 커지게 만들죠. 식물이 커지기 위해서는 세포수가 늘어나거나, 개별 세포의 크기가 커져야 합니다. 지베렐린은 이중 세포의 크기를 키우는 신호물질 역할을 합니다.
대나무는 줄기 사이의 간격을 벌리면서 하늘로 치쏟게 만들고, 잠자던 씨앗은 싹을 트게 만듭니다. 어린 삼나무에서 꽃이 피게 만들기도 하고, 씨앗을 맺지 못한 과일이 자라게하는 마법을 부립니다.
그럼 지베렐린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식물은 자라지 않습니다. 난쟁이 식물, 즉 왜성식물이 됩니다. 키 작은 나무들은 이런 방법으로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세포에서 지베렐린이 생성되는 생합성 경로(pathway)를 방해해서 말이죠.
식물의 성장을 주관하는 마법의 물질이 90여 년 전 일본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성장촉진제로 불리며 많은 과수원에서 사용됩니다. 이 단순한 물질이 전 세계적으로는 여전히 6천억 원 정도의 시장을 만들고 있기도 합니다. 물론 그 시장 규모보단 훨씬 더 중요한 물질이죠. 자연을 성장시키는 신호등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물질을 우리는 식물호르몬이라고 통칭합니다.
물론 여기에만 사용되는 것도 아닙니다. 씨 없는 포도를 만들 때도, 이른 추석에 큼지막한 햇 배를 차례상에 올릴 수 있는 것도, 감자의 싹을 틔울 때도, 수경재배 인삼의 싹을 틔울 때도 -이걸 휴면타파라고 함- 이 지베렐린이 사용됩니다. 때로는 다른 식물호르몬과 함께 말이죠.
끝으로 이 물질은 위험한가,라고 또 궁금해하실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식물이면 일반적으로 생합성을 하는 물질이고, 일부 미생물도 만듭니다. 동물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