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얽혀 있지만 같지 아니하다.
<오징어 게임>을 보지는 않았다. 보려는 생각도 있었는데 너무 유명해져서 볼 이유가 없어져버렸다. 다행히 <지옥>은 미리 봤다. 굉장히 묵직한 사회적인 이슈를 긴장감과 재미를 놓치지 않으면서 드라마 속에 잘 녹여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무조건 뜰 것 같았는데.... 순식간에 너무 떴다.
아침에 페친이 공유한 글을 읽으면서 한참 상념에 빠져 들었다. 여러 사회적 이슈에 참전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건 술자리 토크로 남겨두는 게 최선이라는 걸 알기에 그냥 마음속에서만 수십 번을 섰다가 지웠다.
한 가지 그래도 거론하고 싶은 건, 풀리지 않던 실타래가 좀 풀리는 느낌이 들기도 해서, 우리는 무균실의 세상을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많은 주장은 그런 상태를 이상적인 상황으로 가정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옳은 이야기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또는 사회적 논란을 촉발할 때는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나 역시 몇 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현상에 대해서 고민을 하다가 페친이 공유한 "아주 옳은 관점의 글"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가 느껴졌다. 아주 잘 쓴 글이어서 오히려 문제가 드러나 보였다.
개인의 불행은 당사자에게는 전부이지만 사회적인 현상의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는 개인의 불행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할 수 없다는 것도 역시 사실이다. 개인의 입장에서는 있고 없고라는 정성의 문제가 되지만 사회적으로는 얼마나 있느냐, 얼마나 줄어들었느냐라는 정량의 문제이다.
정성의 문제와 정량의 문제는 상황에 맞게 잘 판단해서 적용하는 게 현명한 태도이기는 하다. 개인의 불행에 대해 사회적인 현상의 하나라고 위로하는 건 잔인한 것이고, 사회적인 이슈를 토론할 때 개인적인 불행을 들춰내면서 박멸을 외치는 건 또 논란만 일으킬 수밖에 없다. 최근 우리 사회는 이러한 방향을 정의(또는 공정)라고 생각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아마도 <지옥>이라는 드라마가 나올 수 있는 배경이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이 두 가지를 또 완벽하게 구분해서 사용하기는 어렵다. 서로 어느 정도 얽혀 있기도 하기 때문에 들춰내는 순간 논란으로 뛰어드는 게 된다. 그래서 그런 이슈에는 참전을 하지 않는 게 현명한(?) 태도이기도 하다.
우리는 불완전한 세상을 살고 있고, AI 혁명의 시대가 도래해도 세상은 계속 불완전할 것이다. 인공지능마저도 인간의 불완전성을 닮을까 싶어서 그게 걱정이기는 하다. 반면에 신이 관장하는 천국은 모든 게 완벽한 세상이라고 상상한다.
우리가 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그랬다. 자연은 불완전하고 통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려움을 초래하는 수많은 종들이 멸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더 불완전해진 다는 걸 알게 되자 이제는 방향이 바뀌긴 했다. 두려움과의 동거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건 인류 문명의 승전보이자 진보라는 평가를 받아 마땅할 것이다.
가끔은 우리 인간 세상에도 그 완전함을 구현하려는 세력을 종종 마주친다. 초연결사회가 되다 보니 더 자주 마주친다. 그런데 완전함을 꿈꾸는 우리의 사고가 어찌 보면 자연의 변종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이 또 <지옥>을 만드는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