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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코타운 Nov 02. 2022

규정과 매뉴얼

한계와 맹점

규정이란 뭘까? 


많은 사람들은 공직에 있는 자가 오버하지 못하게 제어하는 장치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또는 어떤 일을 하게 하는. 그렇지만 의도와는 달리 그 규정이라는 건 공직을 수행하는 자를 보호하는 것도 그 목적 중 하나이다. 역설적으로 규정이 많다는 건 보호막이 더 두꺼워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매뉴얼은 일을 할 때 지켜야 할 절차를 기술한 것이다. 이것 역시 절차대로 했다면 결과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걸 바탕에 깔고 있다. 반대로 절차를 벗어나면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 역시 일을 집행하는 담당자를 보호하는 장치 중 하나이다. 절차를 벗어나는 일을 하게 하는 게 가능은 한데, 절차를 무시할 수 있는 더 윗사람이 책임을 지는 경우이다.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규정과 매뉴얼을 따진다. 이게 옳은 것 같지만 여기에는 큰 맹점이 있다. 규정에 기술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까라는 고민이다. 그런데 일상적인 업무를 제외하고 대부분 비정상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규정에 담을 수가 없다. 우리가 일상에 마주치는 낯선 상황과 뉴스에서 보게 되는 대부분의 일이 그렇다. 


하지 않은 일을 나무랄 수는 있어도 처벌하기는 어렵다.


감사와 사법시스템은 이 규정과 매뉴얼이 제대로 작동하였는가를 사전에 예방적으로 또는 사후에 처벌의 목적으로 따지는 것이다. 그런데 규정과 매뉴얼에서 벗어나는 사건에 대해서는 난감해진다. 그래서 한 일에 대해서는 처벌할 수는 있지만 하지 않은 일을 처벌하기는 매우 어렵다. 리더십이 잘 작동하지 않으면 복지부동이 만연한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 중 하나는 뭔가를 해서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하지만 더 큰 문제는 대개 뭔가를 하지 않아서 발생한다.


그럼 규정과 매뉴얼이 많으면 되는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과연 그럴까? 자세히 한번 살펴보자. 예전에 기관을 신설하고 일을 시작할 때 업무에 관한 규정이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다른 기관의 규정집을 빌려와서 이런저런 규정을 기관의 특성에 맞게 바꾸면서 규정을 만들었다. 그때 하나의 고민이 있었다. 규정과 매뉴얼을 얼마나 세부적으로 만들까 하는 수준이었다. 


이것 역시 기관이나 업무의 특성에 따라 달라진다. 돈을 지원하는 업무는 절차를 자세하게 기술한다. 분쟁이 생길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업을 지원하는 업무는 가능하면 규정을 만들지 않는 게 낫다. 현장의 역동적인 상황을 반영하지 못해서 엇박자를 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규정이라는 걸 들이대면 조직은 급격하게 기계적으로 변한다. 물론 사법기관은 규정이 엄격해야 한다. 창의성이나 의욕이 과다하면 오히려 정의가 훼손되기 때문이다. 그외 자금을 지원하는 기관들 역시 좀 경직된 조직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초기에는 가능하면 규정을 최소한으로만 만들고 절차는 별도로 정해서 이행하는 방식으로 하고자 했다. 이렇게 하면 장단점이 명확한데 직원의 역량이 뛰어나면 좋은 성과를 내지만 그렇지 않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무 규정을 많이 만들면 조직은 경직되고, 규정이 적으면 창의성이 높아지지만 리더십과 개인 역량이 높을 때만 잘 작동한다. 이 둘 사이에 어떻게 조화를 이뤄나갈까 가 항상 고민이었다. 물론 직원들이 역량이 아주 높으면 이런 고민이 필요 없다. 그래서 일류 테크 기업들이 높은 연봉을 주고 인재를 채용하는 것이다. 


규정은 사회변화를 따라갈 수 없다.


그런데 일이라는 걸 하다 보면 기존에 없던 일이 계속 생기기 마련이다. 사회가 바뀌면서 일과 일의 대상, 개념과 정의가 계속 변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규정은 절대 사회의 변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 그러니 사각지대가 끊임없이 발생한다. 오래된 조직은 이미 개인이 감당해야 할 규정과 숙지해야 할 매뉴얼이 차고도 넘친다. 새로운 일을 하려면 새로운 규정을 만들고 매뉴얼부터 손봐야 한다면 그건 바람직하지 않은 사회이다. 


기관의 장이 바뀌면 조직원들은 규정과 창의성 사이에서 어떤 포지션을 정할지를 판단한다. 대개는 시그널이 있다. 그중 가장 안 좋은 것은 개개인의 재량의 영역에 있는 사항을 억지로 처벌할 때이다. 유연성과 소통이 급격하게 사라진다. 매뉴얼에 규정되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 것은 물론 해석을 팍팍하게 한다. 그리고 규정이 많다보면 다 지키면서 일을 속도감있게 하는 게 거의 불가능해진다. 대개 규정은 열정적으로 일하는 직원에게 가혹하게 작용하는 경향이 있다. 


조직의 상급자는 예외적인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매뉴얼에 없는 일을 하게 허락하고 책임을 지는 자리이다. 그렇게 할 수 있게 대부분의 규정은 또 예외가 있기 마련이다. 물론 이런 조치들이 역동적으로 일어나려면 좋은 조직문화가 뒷받침 되어야 가능하다.


물론 어떤 경우도 시스템에 과부하가 일어나면 무용지물이 된다. 

기억하자. 대개 큰 문제는 뭔가를 해서라기 보다는 하지 않아서 발생한다. 그리고 진짜 큰 문제는 시스템의 과부하가 걸려 할 수 없을 때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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