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겨도 이긴 게 아닌, 결국 패배로 이어지는 승리
“이러한 승리를 한 번 더 거둔다면, 우리는 완전히 끝장날 것이다.”
피로스의 승리(Pyrrhic Victory), 요즘 한국 상황을 설명하는 외신에 자주 등장합니다. 서구 사람들은 이런 스토리를 적재적소에 잘 사용하죠. 그래서 한수 접을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 좀 더 깊게 살펴봤습니다. 어설프게 알면 어설프잖아요.
케임브리지 사전에는 "승자가 이기는 데 많은 것을 잃었기 때문에 이길 가치가 없는 승리"로 정의합니다. 아무도 축하할 수 없는 승리로 결국은 패배로 이어지는 승리입니다. 외신에서 왜 이 용어를 골랐을지 소름이 돋기 시작하죠.
기원전 280년, 북서부 그리스 에피루스의 왕인 피로스(기원전 319-272년)는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도시 타렌툼의 요청으로 로마와의 전쟁에 참전합니다. 당시 지중해의 신흥 강국으로 부상하던 로마의 위협에 맞서, 그는 2만 5천 명의 군사와 20마리의 전투용 코끼리를 이끌고 이탈리아 해안에 상륙합니다.
피로스는 헤라클레아와 아스쿨룸에서 벌어진 두 차례의 대규모 전투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둡니다. 특히 전투용 코끼리를 활용한 전술은 로마군을 크게 당황시켜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이기기는 했지만 피로스군 역시 처참한 희생을 당합니다. 아스쿨룸 전투에서만 3,500명의 정예병력을 잃었는데, 피로스군에는 치명적인 타격이었습니다. 이 전투 후에 “이러한 승리를 한 번 더 거둔다면, 우리는 완전히 끝장날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믿거나 말거나이지만요.
이후 피로스는 시칠리아로 원정을 떠났지만 실패했고, 결국 기원전 275년 이탈리아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최후는 더욱 비극적이었는데, 기원전 272년 아르고스에서의 시가전 중 한 노파가 던진 기와에 맞아 죽었습니다. 위대한 장군의 죽음치고는 너무나 초라했죠.
하지만 피로스가 남긴 교훈은 그가 남긴 승리보다 오히려 더 큰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회자되고 있으니 말이죠. 우리나라에서까지 이렇게 전 국민이 다 알게 될 것 같지 않습니까! 이 용어를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게 현대에서도 빈번하게 인용되기 때문입니다.
경영에서는 과도한 비용을 들인 기업 인수, 정치에서는 과다한 정치적 자본을 소모한 정책 추진, 스포츠에서는 주전 선수들의 부상을 감수하고 얻은 승리 등 미묘한 상황을 설명할 때마다 등장합니다. 누가 이길지는 모르겠지만, 하이브와 뉴진스의 다툼을 보면서도 이 피로스의 승리가 떠오릅니다. 피로스의 승리는 진정한 승리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성공을 위해 치러야 할 적절한 대가가 어느 선까지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