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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코타운 May 15. 2016

세상을 굴리는 두개의 바퀴

상식과 과학에 대한 상념

상식

“상식(常識)은 사회의 구성원이 공유하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가치관, 지식, 판단력을 말한다. 대의어는 비상식(非常識)이다. 사회에 따라서 상식이 다르기 때문에, 어느 사회의 상식이 다른 사회의 비상식이 되는 경우도 있다.” - 위키백과 -


우리가 이 복잡한 세상을 큰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대다수 사람들의 행동이 상식이라는 공통분모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식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고 진실과 거리가 멀 때도 있고, 또한 전혀 과학적이지 않을 때도 있다. 그리고 어느 사회에서는 상식이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비상식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상식 없이 세상을 살 수도 없지만 상식만으로 세상을 사는 것은 위험하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세상의 법과 제도도 상식이라는 토대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완전무결할 수는 없다. 상식 자체가 수많은 오류를 내포할 수밖에 없고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상식을 모두 알 필요는 없지만 상식을 잘 모르면 어중이떠중이 취급을 받기도 한다. 일상생활에서야 대부분의 상식을 공유하지만 전문분야로 가면 그 분야만의 상식이 통용된다. 외부인은 상식의 벽을 느낀다. 상식 밖의 사람 취급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이 상식의 장벽이 전문직, 혹은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자리 잡는 기반이 된다. 상식을 팔아서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상식을 뒤집는 사기와 협잡이 발생한다.


또 하나 알아야 할 것은 상식도 급이 있다는 사실이다. 기본 상식이 가장 우선이고 전문분야로 갈수록 세분화될수록 우선순위는 떨어진다. 때때로 전문분야의 상식이 강한 사람들이 보편적인 기본 상식이 부족한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이런 경우를 우리는 오만과 독선이라고 부른다. 이런 오만과 독선은 전문성이 높을수록, 돈이 많고 지위가 높아 불상식이 상식이되는 장왜곡 환경 속에 있는 사람일수록 크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그럴 경우 우리는 오히려 상식 없는 사람이라 칭한다. 상식이 너무 높아도(?) 상식 없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좋은 사회란 상식이 지켜지는 사회, 상식의 위계가 바로 서는 사회일 것이다. 반면 나쁜 사회는 모두의 상식이 자기 나름의 상식으로 바뀌는 상식 장왜곡 사회, 상식의 위계가 무너지는 사회일 것이다. 상식이란 옳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위계는 매우 중요하다. 기본 상식을 항상 전문 상식보다 우선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좋은 사람이라는 평을 받는다.


상식은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것은 과학적 지식이 새롭게 만들어지면 이전의 지식은 새로운 지식으로 대체되고 상식도 이에 따라 바뀌어 간다. 사실 인류 문명의 진보는 과학 지식의 진보와 궤를 같이 했다. 과학적 지식과 논리가 확산될수록 엉터리 상식을 몰아내고 세상은 더 밝아졌다. 혼란스럽다고 느낄 때가 있는가? 그러면 과학에게 길을 물으면 된다.


과학

“과학 (科學, Science)은 사물의 구조, 성질, 법칙 등을 관찰 가능한 방법으로 얻어진 체계적ㆍ이론적인 지식의 체계를 말한다. 더 좁은 의미에서 과학이란 인류가 경험주의와 방법론적 자연주의에 근거하여 실험을 통해 얻어낸 자연계에 대한 지식들로 이루어져 있다.: - 위키백과-


상식이 전혀 상식적이지도 과학적이지 않을 수 있다고 설명했듯이 과학 역시 항상 진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상식과 마찬가지로 과학도 오류를 내포한다. 그러므로 과학적 지식이나 이론이 틀렸다고 비난하는 것은 화풀이 이상 되기 어렵다. 원래가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적 방법(科學的 方法)은 현상을 연구하고, 새로운 지식을 구축하거나, 이전의 지식들을 모아 통합할 때 사용되는 기법으로, 경험과 측정에 근거한 증거를 사용하여 현상의 원리를 밝히는 과정이다.


과학은 오류를 내포할 수 있지만 과학적 방법은 그렇지 않다. 과학이란 과학적 방법으로 만들어진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적 방법으로 만들어진 지식이 아니면 그것은 과학이 아니다. 사실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과학적 방법론을 따랐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하다.


과학기술이란 어느 시점에서는 항상 한계가 존재하므로 그 기술의 한계를 넘어서는 지식을 증명할 수는 없다. 현시점에서는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이론도 다음 세대에서는 오류로 판명날 수 있고, 또 현시점에서 무시되던 이론이 다른 시대에는 사실로 증명될 수도 있다. 현시점에서의 과학적인 결론이란 것도 진실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자라는 사람들은 지식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과학적인 방법론이 제대로 적용되었냐를 따지는 사람들이다. 만약 과학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이런 방법론을 무시한다면 그는 과학자라 할 수 없다. 과학을 이야기할 때는 과학적 추론이 옳으냐 그르냐 보다는 그 추론이 나오게 된 과정이 과학적이냐 아니냐를 더 강하게 문제 제기하게 된다. 그러므로 과학자는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상식과 과학이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상식은 지역이나 국가, 계층 간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지만 과학이란 어느 곳에서나 동일한 지식으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상식이 일정 지역에서만 통용되는 방언이라면 과학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통용되는 공용어이다. 그러므로 세계를 상대로 이야기할 때는 상식에 기반하기보다는 과학, 즉 과학적 방법론에 기반하는 것이 안전하다.


과학과 상식이 뒤죽박죽 된 사회

사회적 논란이 생길 때마다 전문가라 불리는 사람들이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다. 대개 그들은 과학적 방법론을 금과옥조로 따르는 과학을 전공한 사람들이다. 현상의 문제를 설명하는 데는 과학적 방법론만이 모두에게 대체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가 더 이성적으로 되어간다는 징후를 찾아보기는 참 어렵다. 과학과 과학적 방법론을 혼동하고, 과학적 논리성에 배치되는 상식들이 억지스럽게 버젓이 활개를 치는 경우가 많다.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방법론으로 만들어진 결과를 과학이라고 신봉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사회는 더 시끄러워진다. 과학적 방법론으로 만들어낸 결과가 아니라, 결과를 부연하기 위해 과학적 방법론의 무늬만 가져다 쓰는 사이비 과학자들이 많아질수록 이성은 빛을 잃고 신념만 강물처럼 흐른다.


한 사회의 건전성을 평가하는 척도 중의 하나는 논쟁적인 사안에 대해 과학자들이 과학적 방법론으로 추론한 결과를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느냐일 것이다. 정보가 제한적일 때는 그것이 사실의 일부만 포함할 수도 있고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과학적 방법론을 따랐다면 그 당시의 최선의 과학적 결론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 반론이 나오고 새로운 사실들이 이로 인해 밝혀지고, 그러면서 과학적 결론은 점점 더 완성된 모습으로 바뀌어 간다. 이 소란스러운 과정을 거쳐가면서 과학자들은 어떤 합의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아마 이 최종 결론이 진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쨌든 과학은 그로 인해 발전하고 더 체계화될 것이고, 관련된 사례가 늘어날수록 훨씬 더 진실에 가까워질 것이다. 과학은 그렇게 발전해왔다. 과학적 방법론으로 제기하는 의문들을 가로막는 것은 우리의 사회적 기반을 튼튼히 다지는데 걸림돌로 작용한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실수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무능이 만연하게 된다.


요즈음 언론을 보고 있자면 과학의 그림자도 발견하기 어렵다. 상식이든 과학이든 동일한 기준의 적용이라는 원칙이 있다. 이게 무너지면 이것은 과학도 아니고 상식도 아니다. 그것은 상식과 과학의 탈을 쓴 폭력이다. 그 중간에 과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있다는데 대해서도 안타깝게 생각한다. 가끔은 차분하게 과학, 과학적 방법론을 한 번쯤 되돌아본다면 세상은 훨씬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변해갈 것이다.


과학이 세상을 밝게 비추는 그날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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