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20년 전 오늘
나는 고3이었고 수능을 봤다.
수능을 두 달 앞두고
맹장수술을 했다.
병원에서 뮤직뱅크를 신나게 봤고
친구들이 빌려다 준 만화책을 신나게 읽었다.
돌도 씹어먹을 나이라
삼일만에 퇴원을 했지만
담임에게 뻥치고 학교를 일주일 넘게 빠졌다.
다들 수능 앞두고 중요한 시기에
몸 챙기느라 공부를 못해서 어떡하냐고 걱정했지만
숨 막히는 그 시기에
잠시나마 환자라는 새 정체성이
수험생이라는 정체성을 가려주어서
숨통이 트였다.
몸이 회복되었을 때는
수능이 정말 한 달 남짓 남았기에
더이상 한 눈 팔 수 없었다.
그래서 막판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한 달 남았을 때는
지금이 수능 백일 전이면
완벽하게 공부할 수 있는데, 라고 생각했고
2주 남았을 때는
지금 수능 한 달 전이라면
진짜 열심히 할 수 있는데, 라고 생각했고
일주일 전에는
제발 일주일만 더 있었으면
오답노트라도 다 훑어볼 텐데, 라고 생각했고
드디어 수능 전날이 오고야 말았다.
같은 고사장에 배정받은 친구들과
예비 소집을 갔다가
천호역 뒷골목 닭갈비 집에 가서 밥을 먹었다.
딱히 버리면 안 되는 옷도 아니었지만
습관적으로 음식점 앞치마를 서로서로 건네 목에 걸쳤다.
다들 말이 없었다.
사이다를 시켜서 닭갈비랑 같이 먹었다.
미역냉국이 나왔는데
아무도 먹지 않았다.
미끄러진다는 미신이 있는데
그런 걸 믿어서라기보다
왠지 수능 전날 그걸 먹으면
시험을 망쳤을 때 미역국 탓을 할 것 같아서였다.
내가 수능을 본 곳은 베이비복스 멤버 간미연이 나온 학교였는데
H.O.T 팬이었던 친구가 매우 기분 나빠 했다.
시험장 때문에 수능을 망칠 것 같다고 불평했다.
설상가상 시험날 아침 듣기 평가를 위해
방송이 잘 나오는지 테스트를 하는 동안
베이비복스 노래가 흘러 나왔다.
가방 싸서 집에 가겠다는 친구를 겨우 말렸다.
수능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밥을 먹고
가방을 점검한 뒤
엄마아빠를 앉으시라고 한 뒤 큰 절을 했다.
12년 동안 공부시켜주셔서 고맙습니다,
마무리 잘 하고 오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메가스터디를 만든 손주은 샘,
당시에 학원에 줄 서서 등록하던
스타강사 손사탐이 시킨 의식이었다.
손샘은 수능이 무섭고 두려운 날이 아니라고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 고래를 새긴 조상들 같은 마음으로
열망해야 하는 날이라고,
꿈을 향해 첫 발을 내딛는 날이라고,
12년 간의 공부를 마무리 하는
영광스러운 날이라고
수강생들에게 세뇌했다.
나는 이과생이었지만 손샘 강의를 굳이 찾아가서 들었다.
역사를 좋아해서 사학과를 가고 싶었는데
고1때 사학과 가고 싶다고 했더니
선생님들이 취직 못한다고 뜯어 말렸다.
IMF시기라 교대나 공대를 가야된다는 말을 들으며
고딩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수학을 제일 못하고
과학은 포기 상태였는데도
그런가보다~ 하고 이과에 갔다.
3년 내내 수학학원을 다녔는데
손샘의 사탐 수업을 듣는 시간은
지긋지긋한 수학 생각을 안 해도 되는
힐링타임이었다.
이과생이라 사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재밌어서 열심히 다녔다.
손샘 팬이기도 했지만
그가 말한대로 수능을 생각하면
걱정, 두려움이 조금 덜해지는 것 같아서
그의 세뇌에 기꺼이 응했다.
그리하여 수능날 아침 엄마아빠를 모셔놓고
큰절까지 했던 거였다.
무서운 시험이 아니라
승리하는 날이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아주 유난스럽게 일가족이 다함께 전철을 타고
고사장까지 갔다.
문앞에서 동아리 후배들의 요란스런 응원을 받았다.
나도 고1,2 때 했던 짓거리다.
새벽같이 나와서 짝선배에게 줄
따뜻한 캔커피와 귤, 힘내라는 편지 등을 준비하고
고사장으로 들어가는 수험생들을 향해
목이 터져라 열띤 응원을 하는 ㅎㅎㅎ
우리 시대엔 그랬다.
짝후배의 선물을 받아들고
엄마, 아빠, 동생에게 인사를 하고
고사장 안으로 들어갔다.
미리 생각해둔대로 책상 위에
물, 샤프, 수성펜, 컴퓨터 사인펜, 수험표를
가지런히 배치했다.
아침 자습시간, 쉬는 시간, 점심 시간에 뭘 볼지도
미리 다 정해서 챙겨갔지만
제일 많이 한 건 심호흡이었다.
괜찮아, 잘 할 수 있어.
다행히 내가 수능을 본 날은 그리 춥지 않았다.
추위에 약한데 덜 떨려서 다행이었다.
그 바람에 사탐 풀고 자버렸지만 ㅎㅎㅎㅎㅎㅎ
다시 깨서 과탐을 풀었는데
3년 동안 모의고사에서 한번도 틀린 적 없던 생물2를
우수수 틀리는 ㅎㅎㅎㅎㅎㅎ
이과생인데 과탐에서 점수 다 깎이는 대재앙이ㅋㅋㅋㅋ
아무튼,
1교시가 끝나고 화장실에서
언어 망쳐서 집에 가겠다는 친구를 또 겨우 달래서
고사장으로 들여보내고
한시간 한시간 과목이 하나 끝날 때마다
다시 심호흡을 했다.
잘하고 있어, 조금만 힘내자.
귤도 까먹고 초콜릿도 먹고
습습후후 숨을 많이 쉬었다.
마지막 제2외국어 시간에는
감독샘도 수험생들도 긴장이 풀려서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들었다.
시험을 다 마친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가방을 싸고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에게 뛰어가 안겼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피자를 먹으러 갔다.
모든 과목을 다 맨정신으로 풀었고
밀려쓰지 않았고
이름 다 쓰고 수험번호 다 썼다.
망쳤다는 느낌은 없었다.
집에 와서 EBS 방송을 기다려
수험표 뒤에 체크해온대로 채점을 시작했다.
언어는 원래 곧잘 했고
수학 1번 문제는 학원에서 알려준 요령대로
시험지 받고 손 머리에 올리고 있을 때
눈으로 암산했는데
암산을 틀려서
루트2의 5제곱을 틀렸다.
수학 1번은 거저 먹으라고 주는 문제였는데
그걸 틀린 거다.
옆에서 지켜보던 고1 동생이
그걸 틀리냐!!! 으이그!!!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망쳤다고 판단한듯 ㅎㅎㅎㅎ
과탐 채점하는데 비가 내려서
대학 못 가는 거 아냐? 긴장 탔지만
결과적으로 가채점 결과
모의고사에서도 한번도 받아보지 못한
높은 점수가 나왔다.
당시 내 목표는 연대 생과대였는데
채점을 마친 뒤 엄마아빠를 얼싸안고
연대 갈 수 있겠다고 이야기하다 눈물이 났다.
채점을 마친 뒤
절친과 만나서
노래방에 가서 자정이 넘도록 놀았다.
다음날 알았다.
물수능이었다는 것을.
나만 오른 게 아니었다는 것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도 도전해보겠다고 논술학원도 등록했지만
결국 특차로 다른 학교 가면서
연대 꿈은 빠빠이~~ ㅋㅋ
나는 평생 심호흡을 가장 많이 한 날이
애 낳기 전에는 수능날이었던 것 같은데
오늘 수능을 치른 수험생들은
마스크를 쓰고 봤을 걸 생각하니 안타깝다.
다 끝나고 수험생 할인 받으며
신나게 놀지도 못할 걸 생각하니
그또한 안타깝다.
코로나 때문에 수험 기간 내내
몇 배로 마음 졸이고 긴장하고
리듬이 무너지고 멘탈 잡기 힘들었을 걸 생각하니
또 안타깝다.
다들 토닥토닥.
고생 많았어요.
수능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거..
그렇지만 한동안은 아무 생각 없이
푹 쉬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