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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림 Apr 23. 2021

NICU 퇴원과 모유 수유 적응기

[다운 천사 꿈별 맞이]


퇴원을 앞두고 한 피검사에서 인과 칼슘의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와서 꿈별이는 모유를 끊고 특수 분유를 먹어야 했다. 퇴원하면 드디어 모유를 직접 수유할 생각에 설레고 있었는데 뭐 하나 쉽게 가는 일이 없구나 속상했다. 인이 조금 들어있는 저인 분유에 칼슘제를 넣어서 먹이라는 처방을 받았다. 신생아 심폐소생술 교육도 받고 특수 분유도 사놓고 카시트를 마련하고 남편이 휴가를 받아서 꿈별이를 퇴원시키러 갔다. 


법이 바뀌어서 장애등급제가 없어졌고 다운증후군은 상세 병명 코드에 따라 산정특례 지원이 달라졌다. 퇴원할 때 병명 코드를 제대로 받는 게 중요해서 진단서를 받아들고 퇴원 설명해 주는 전공의와 한바탕 씨름을 했다. 의사도 바뀐 규정을 자세히 몰라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알아보고 땀을 흘리면서 돌아와서 정확한 코드명을 알려줬다. 삼염색체, 모자이크, 전좌형 등 유형이 다른데 꿈별이는 그중 제일 흔한 삼염색체 다운증후군이었다. 산정특례 지원을 더 오래 받을 수 있는 유형이라 코드를 꼼꼼히 확인했다. 우리 부부는 제법 나이가 있는 편이고 남편이 직장 생활을 오래 해서 희귀난치병 지원 기준보다 소득이 더 높았다. 그래서 산정특례 지원이 아니면 받을 수 있는 지원이 전무했기에 더 예민하게 따졌다. 태아보험도 없이 장애아를 낳아 수시로 병원에 다녀야 하니 병원비가 제일 큰 걱정거리였다. 


겨우 퇴원 수속을 마치고 생후 3주 만에 꿈별이를 데리고 집에 왔다. 특수 분유를 먹여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가 분유 포트를 빌려주러 집에 들러서 꿈별이와 인사했다. 쓰던 유축기에 유두가 찢어져서 아프다고 하자 다른 기종의 유축기를 빌려주러 온 친구도 있었다. 친구는 신생아를 안는 건 오랜만이라 감격스럽다며 꿈별이를 품에 안고 눈물을 글썽였다. 꿈별이 임신 후기는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지만 날 지탱해 주는 친구들이 있어서 버틸 수 있었다. 많은 분들의 기도와 격려 덕에 무사히 그 시기를 지나왔다. 뭐가 필요하다고 하면 바로 달려와 주고 손잡아 주는 친구들이 있어서 남편과는 여전히 사이가 냉랭했지만 마냥 외롭지는 않았다.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고래는 동생을 처음 보고 긴장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다가와 머리와 볼에 뽀뽀를 해줬다. 꿈별이는 신생아 집중치료실(NICU) 인큐베이터 안에서 늘 혼자 자 버릇해서인지 재워주지 않아도 눕혀 놓으면 혼자 잠이 들었다. 고래는 예민하고 잘 안 자던 아이라서 혼자 누워 자는 꿈별이가 놀랍고 신기했다. 엄마를 쉬게 해주는 게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큰 수술을 겪고 온갖 약물에 취해서 하염없이 잠만 자는 건가 서글프기도 했다. 


꿈별이가 퇴원하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막상 퇴원하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십이지장 폐쇄로 태어나 소화기가 약한 아이라서 꼭 모유 수유를 하고 싶었기에 특수 분유를 먹이는 와중에도 젖양을 늘리기 위해 세 시간마다 유축을 했다. 신생아에게 한두 시간마다 분유를 타서 먹이면서, 아직 먹을 때 숨을 잘 못 쉬는 아이 안색을 살피고 쉬어 가면서 먹이면서, 동시에 세 시간 간격을 지켜 유축까지 하려니 24시간 내내 쉴 수가 없었다. 입주 도우미가 아니라 출퇴근하시는 산후 도우미의 도움을 받고 있었기에 밤에는 남편을 깨워서 분유를 먹이게 하고 나는 유축을 했다. 키우는 고양이 두 마리가 평소에 맡아보지 못한 분유 냄새에 흥분해서 찬장에 있는 분유를 떨어뜨려 엎어 버리는 바람에 고생을 하기도 했다. 오래 먹일 생각이 아니라서 여분을 사놓지 않았고, 특수 조제분유라서 가까운 마트나 약국에서 팔지 않아서 남편이 꿈별이를 출산한 대학병원까지 가서 겨우 사 왔다. 한겨울에 면회 다니느라 산후조리도 제대로 못했는데 분유는 분유대로 먹이고 유축은 유축대로 하려니 몸이 남아나질 않았다. 그 기간이 더 길어졌다면 모유 수유를 포기했을 것 같다.


퇴원 일주일 후 다시 병원을 찾아 피검사를 했다. 고래는 완전 모유 수유로 키웠기에 분유를 챙겨 외출하는 게 처음이라 또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서 휴대용 젖병과 보온병을 주문했다. 둘째 엄마인데 서툴고 미숙한 게 속상했다. 둘째는 좀 수월하고 여유롭게 키우고 싶었는데 장애아의 엄마는 처음이라 모든 면에서 초보 엄마나 다름없었다. 분유 타 먹일 짐과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사이 유축할 짐까지 바리바리 싸 들고 신생아를 데리고 종합병원에 가서 진료를 보는 건 산모에게 너무 힘든 일이었다. 다행히 일주일 동안 특수 분유를 먹였더니 미네랄 수치가 정상 범위에 들어와서 이제 특수 분유를 끊고 모유 수유를 해도 된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 후로 '병원 러시'가 이어졌다. 고위험군 임신부일 때가, 갓 아기 낳은 산모가 NICU 면회 다닐 때가 제일 힘든 줄 알았는데 진짜 고생은 이제부터였다. 신생아를 데리고 사흘이 멀다 하고 종합병원을 찾아 온갖 검사를 받았다. 신생아과, 유전학과, 소아외과, 소아심장과, 비뇨기과, 재활의학과, 이비인후과, 정형외과, 안과 등 검사와 진료 일정으로 달력이 늘 빼곡했다. 첫째는 늦게까지 어린이집에 남겨질 때가 많았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이 많이 막혀서 제 때 도착을 못 하는 바람에 첫째가 어린이집 하원 차량을 타고 집 앞에 왔다가 다시 원으로 돌아가서 기다리기도 했다. 다운증후군이 가질 수 있는 합병증을 꿈별이가 다 가진 것 같았다. 산전 검사에서도 문제가 발생되지 않고 아무 합병증도 나타나지 않아서 무사히 출산을 하고 한참 키우다 영유아 검진 때 뒤늦게 다운증후군임을 알게 된 친구들도 있던데, 다운증후군이라 염색체 이상이 있지만 다른 문제 없이 건강한 친구들도 있던데, 꿈별이는 아니었다. 


억울하고 속상했다. 첫째 고래에게 식이 알레르기가 나타났을 때만 해도 나는 젊을 때 술을 너무 많이 먹고 불규칙하게 생활해서 그런가 보다며 자책을 했다. 미안함에 더 정성스레 집밥을 차리고 나쁘다는 것은 전부 피하고 좋다는 건 전부 해주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고래를 키우면서 건강한 집밥으로 같이 먹었고 몇 년 동안 육아하느라 술은커녕 아주 규칙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했는데 왜 둘째인 꿈별이의 건강이 안 좋은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나보다 더 생활습관 안 좋은 엄마들도 건강한 아이를 낳던데, 왜 바르게 열심히 살아온 내가 합병증을 많이 가진 장애아를 낳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염색체 이상은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다른 건강 상태라도 좋았으면 이렇게까지 절망적이지 않을 텐데, 병원을 갈 때마다 나쁜 검사 결과를 들으니 몸과 마음이 온통 피폐해졌다. 


그럴수록 당장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모유 수유밖에 없었다. 꼭 모유 수유에 성공해야 해, 이렇게까지 아픈 곳이 많은 아이에게 그거라도 해줘야 해,라며 더더욱 스스로를 몰아세웠다. 태어나자마자 엄마 품에 안겨 젖을 빨지 못하고 한동안 아예 굶어야 했던 꿈별이는 젖병으로 먹는 것도 힘들어했었다. 겨우 젖병에 적응했는데 다시 엄마가 안고 직접 모유 수유(이하 '직수')를 하니 강하게 거부했다. 몸에 힘이 없어서 목도 못 가누는 아이가 어떻게든 엄마 젖을 안 물려고 안간힘을 썼다. 입을 다물지 않은 채 소리 내 울기만 한다든지, 하염없이 젖병 젖꼭지를 찾아 입을 돌린다든지, 가능한 모든 방법을 써서 거부했다. 아이가 먹어 주지 않으니 유선염이 와서 또 고생을 했다. 첫째 때도 백일까지 매일 울면서 수유를 하다가 겨우 젖양이 서로 맞춰져서 쭉 직수를 했던 경험이 있기에 아무리 아프고 힘들어도 백일까지는 해보겠다고 결심했다. 


몸에 힘이 없어 축 처지고 잘 빨지도 삼키지도 못하는 다운증후군 아이에게 직수를 하려니 팔과 손에 힘을 잔뜩 준 채 안고 씨름해야 했다. 안 그래도 조리도 제대로 못했고 유축하느라 손목이 망가진 상태에서 매일같이 운전해서 아이랑 병원에 다니느라 몸이 만신창이였다. 퇴원한 날 이후로는 남편이 더 휴가를 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기에 아이를 카시트에 앉히고 운전을 하고 주차를 한 뒤 유아차에 옮겨서 진료를 받고 다시 또 차에 태워서 집으로 오고... 이런 과정을 혼자 다 해야 했다. 그러는 와중에 한두 시간마다 수유를 했다. 익숙해질 때까지 수시로 젖을 물렸다. 정말 독하게 했다. 산후 도우미 이모님이 이런 산모 처음 본다고 하실 정도였다. 그래도 잔소리를 하는 대신 힘내라고, 고생이 많다고 격려해 주는 분이라 다행이었다. 의사마저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이들은 빠는 힘이 약하고 혀가 두터워서 직수가 힘들다고, 할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럴수록 더 오기가 생겼다. 


특수 분유를 끊고 한 달쯤 지나서 드디어 꿈별이는 안정적으로 모유를 먹기 시작했다. 수술 때문인지 소화기가 유독 약해서인지 꿈별이는 음식물을 먹기 시작한 후부터 내내 변을 지렸다. 처음에는 야심 차게 천기저귀를 준비했지만 애벌빨래를 해야 하는 똥 기저귀가 산처럼 싸이는 걸 보고 포기했다. 고래 때는 조리원 퇴원 직후부터 천기저귀로 키우면서도 하나도 안 힘들다고 잘난 척을 했는데, 아이에 따라, 상황에 따라, 천기저귀를 쓰기 힘든 상황도 있음을 배웠다. 첫째를 완모했으면 둘째부터는 수유가 쉽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오래 고생할 줄은 몰랐다. '완모 부심'이 있었는데 그것도 부끄러워졌다. 꿈별이는 다행히 3주 만에 집으로 돌아왔지만 더 오래 NICU에 입원해 있었거나, 더 오래 특수 분유를 먹어야 했다면 완모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육아란 나만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님을, 꿈별이를 만나며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첫째를 키우면서 가끔 아이를 둘 이상 키운 엄마들의 말에 상처를 받곤 했다. 초보 엄마의 두려움과 고민을 웃어넘기며 다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답하는 둘째맘들을 보면 부러우면서도 얄미웠다. 둘째를 임신했을 때 이제 나도 좀 수월하게 육아하면서 주변에 첫아이를 낳은 엄마들에게 아는 척을 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첫째를 키울 때의 육아 지식과 경험이 전혀 통용되지 않는 아이가 태어났다. 무엇 하나 수월한 게 없었고, 무엇 하나 자신 있는 게 없었다. 


그래서 나는 겸손해졌다. 자연주의 출산도 자연주의 육아도, 나와 아이가 건강했기에 할 수 있었던 감사한 상황일 뿐, 내 노력 덕분이 아니었다. 그저 아이가 살아주기를, 무사히 퇴원해서 집에 같이 오기만을 바라고 기도하는 엄마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모유 수유도, 천기저귀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와 엄마가 건강해야 시도라도 해볼 수 있는 것들이다. 아무리 이 세상이 경쟁 사회라고 해도 육아만큼은 누가 더 잘하고 못하고가 없는 문제라는 걸 깨달았다. 나와 다른 방식의 육아를 평가하고 함부로 판단했던 지난날이 부끄러워졌다. 


꿈별이는 태어나자마자 내게 많은 걸 가르쳐주고 있었다. 상상도 못했던 고통과 고단함이 장애아를 맞이하고 키우는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 있지만, 그렇기에 상상조차 못했던 세계를 보게 되었다. 무사히 만삭까지 엄마 배 속에 있다가 태어나서 숨 쉰다는 게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엄마 젖이든 분유든 잘 먹어주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무탈하게 집에서 지지고 볶고 신생아 육아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지 알게 되었다. 비록 무수히 많은 합병증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세상에 나와서 숨을 쉬고 눈을 뜨고 젖을 먹고 온기를 품고 내 옆에 살아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한다는 걸 꿈별이를 만나서 배웠다. 아니, 그래야 해서가 아니라 저절로 감사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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