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울림 Apr 30. 2021

두 아이의 엄마가 된다는 것

[다운 천사 꿈별 맞이]


초보 둘째 맘의 허덕이는 일상


꿈별이가 신생아 중환자실(NICU)에 있을 때는 하루라도 빨리 퇴원하길 바랐지만 막상 퇴원을 하고 모유 수유도 자리가 잡히자 그제야 둘째 엄마로서의 일상이 시작됐다. 인큐베이터 안에서 의료 기기들에 연결된 채 혼자 자 버릇한 꿈별이는 재워주지 않아도 눕혀 놓으면 혼자 알아서 잠들었다. 38개월에야 통잠을 잔 고래와 너무 달라서 놀랐고, 좋았다가, 슬퍼졌다. 재워주지 않아도 자는 건 엄마에겐 분명 고마운 일인데 그 이유가 인큐베이터 상자 안에서 혼자 자는 데 익숙해졌기 때문이라는 게 마음이 아팠다. 그 덕에 수유 시간 외에는 갑자기 동생과 엄마 사랑을 나눠야 하는 첫째 고래에게 더 집중할 수 있었다.


네 살 터울이 있어서 고래는 제법 말이 통했고 상황 파악도 잘 하는 것 같았다. 동생을 미워하거나 질투하는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내가 꿈별이를 안고 수유하고 있으면 혼자 놀다가 한 번씩 방에 들어와서 물끄러미 수유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나가곤 했다. 그 표정은 뭐라 말로 옮기기 어려운, 복합적인 감정이 한데 섞여있는 표정이었다. 다섯 살 고래가 여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을 감정이었으리라. 그 감정이 무엇인지 말로 설명할 수가 없기에 고래는 싫다고, 밉다고, 표현도 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꿈별이 임신기간 대부분을 고위험군 임신부로 누워서 지냈기에 고래는 아빠랑 노는 데 더 익숙해져 있었다. 꿈별이가 태어난 후에도 주말이면 아빠랑 둘이 공원으로, 키즈카페로 나들이를 다니는 고래는 즐거워 보였다. 아직 꿈별이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남편은 고래에게 더욱 정성을 쏟았다. 그래서 고래의 상실감이 덜했는지도 모르겠다. 동생이 가져온 거라고 꾸며서 선물한 자전거도 좋아했다. 주말에는 이틀 내내 아빠랑 신나게 놀았고, 평일에는 수유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내가 고래에게 집중했기 때문에 초기 적응은 제법 성공적이었다.


사흘이 멀다 하고 종합병원에 꿈별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고래 하원 시간을 못 맞춰서 늦게까지 어린이집에 남아 있는 날이 늘어났다. 내내 응가를 지리는 꿈별이를 씻기느라 내 손목이 망가지면서 인내심도 조금씩 무너졌다. 저녁에 놀아달라는 고래에게 "엄마는 너랑 놀아주는 사람이 아니야!"라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안방에서 꿈별이 수유할 때 고래가 들어오면 나가서 혼자 놀고 있으라고, 기다리라고 소리를 질렀다. 고래는 아빠가 퇴근하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렸다. 아빠랑 둘이 놀러 나갈 수 있는 주말이 언제 돌아오는지 날짜를 셌다.


나와 사이가 틀어지고, 원치 않던 장애아의 아빠가 되어 힘들어하던 남편은 주말 이틀 내내 혼자 고래를 보는 것에도 지쳐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아이를 씻길 때면 언성을 높이고 윽박지를 때가 많아졌다. 그가 야근하는 날엔 나도 고래에게 화풀이를 하면서, 남편이 고래에게 소리를 지르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육아서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손꼽는, 아이 앞에서 남편의 훈육을 방해하고 끼어드는 행동을 반복해서 했다. 왜 애한테 소리를 지르냐고, 애니까 말을 안 들을 수도 있지 왜 감정을 주체 못하고 화내냐고 남편에게 화를 냈다. 그가 해외 근무를 하는 2년 동안 혼자 고래를 키웠기에 '그동안 내가 얼마나 애지중지 키웠는데 겨우 주말 이틀 봐놓고 애한테 소리를 질러!'하며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몇 달째 서로에게 칼날 같은 말을 주고받고, 장애아의 부모가 되는 일생일대의 사건을 겪으며 고도의 스트레스 상태였던 남편과 나는 다섯 살 고래를 감정의 쓰레기통 삼고 있었다. 머리로는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제어가 안 됐다. 혹시 이상행동을 하진 않을까 염려되어 고래 어린이집 선생님께 상담 때 혹시 달라진 게 없는지 물었는데, 동생이 생겼다는 걸 잊을 만큼 평소와 다름없이 잘 생활하고 있다고 하셨다. 그게 더 짠했다. 다섯 살 아이가 얼마나 혼란스럽고, 두렵고, 속상하고, 억울하고, 슬펐을까. 그걸 어디서도 편히 내색조차 못하고 있다니. 차라리 울고불고 동생 밉다고 때리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 의지로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님을 알아차리고 병원 진료가 뜸해졌을 때 주변에 수소문해서 상담 선생님을 소개받았다. 이제 막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몸도 성치 않아 어딜 나가거나 누구를 만나기도 쉽지 않았고, 남편과는 꼭 필요한 용건이 아니면 전혀 대화를 나누지 않고 있었기에 마음을 터놓을 사람이 절실했다. 장애아를 낳아서 사랑으로 키울 거라고 큰소리쳤는데, 막상 병원을 다니는 것도, 다시 신생아 육아를 하는 것도, 다섯 살 첫째를 전처럼 보살피지 못하는 것도, 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 채로 늘어져서 잠만 자는 꿈별이를 보는 것도, 다 너무 힘에 겨웠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호기롭게 하겠다고 설쳤던 건가, 자책이 몰려왔다. 깜냥도 안 되는 게 왜 애를 둘씩이나 낳아서 아무 잘못 없는 애들을 힘들게 하는 걸까. 자격이 없는 사람이 무턱대고 애를 둘이나 낳았구나, 스스로를 비난했다.


비장애인 아이를 키우는 육아 동지들과의 일상 대화가 다 고깝게 들렸다. 너네는 매일 종합병원에 다니는 것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힘드니, 애가 장애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어렵니,라는 마음의 소리가 불쑥불쑥 올라와서 사소한 수다조차 힘겨워졌다. 그래도 한때 죽마고우보다 더 소중하고, 가족보다 더 가깝게 마음을 나누었던 친구들인데 내가 지금 불행을 겪고 있다는 이유로 상처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모든 관계를 다 끊었다. 단톡방에서 나오고 모든 만남을 차단했다. 의료진 외에, 가족들 외에, 내가 만나는 사람은 오로지 상담사 한 명뿐이었다.


임신 후기에 남편과 사이가 안 좋아지면서 부부 상담을 몇 번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남편이나 나나 상담사에게 오히려 상처를 받고 돌아왔다. 그래서 겁이 나기도 했지만 이러다간 정말 내가 미쳐버릴 것 같고, 고래에게 나쁜 짓을 할 것만 같아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상담을 시작했다. 다행히 이번 선생님은 이전에 만났던 분들과는 전혀 달랐다. 나를 비난하지도 않고, 섣불리 조언하지도 않고, 온전히 내 말을 경청하고 진심으로 공감해 주셨다. 누워만 있는 꿈별이를 데리고 가서 상담실 한편에 눕혀놓거나 아기띠로 안은 채로 상담을 했다. 일주일에 한 시간, 내 얘기만 실컷 하는 것만으로 숨통이 조금 트였다. 그 덕에 고래에게 가끔 짜증을 낼지언정 못할 짓을 하지는 않았다.




매 순간이 새로운 초보 장애아 엄마의 좌절


두 아이의 엄마가 되는 것 자체가 이미 고난도 임무다. 아니, 애초에 신생아 육아가 이미 빡세다. 백일까지는 거의 잠을 자지 못하기 때문에 체력도 달리고 호르몬도 널뛰어서 수시로 눈물이 나는 게 정상이다. 그 와중에 첫째의 마음까지 살피고, 살림도 해야 하기 때문에 둘째 맘의 초기 몇 달은 극한 직업이라는 게 육아계의 정설이다. 그런데 나는 거기에 꿈별이의 장애와 합병증까지 합쳐졌고, 남편과의 불화도 한몫을 하니 맨 정신으로 버티기 힘든 게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런 상황보다 나를 더 힘들게 한 건 둘째인데 육아가 전혀 수월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나는 고래를 정말 정성들여서 키웠고 육아 공부도 열심히 했다. 고3 때보다도 열심히 했다. 내가 육아서 읽고 육아 강의 듣는 걸 보면서 가족들은 학교 다닐 때 그렇게 했으면 서울대 갔겠다고 농담을 하곤 했다. 퇴사까지 했기에 정말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고, 육아를 회사 일처럼 잘하고 싶었다. 만 4년 넘게 그렇게 열심히 육아를 했으니 둘째 육아는 쉬워야 이치에 맞다. 꿈별이가 비장애인이었다면 첫째와 기질이나 성별이 다른 정도로 조금 시행착오를 겪을 뿐 금세 적응했을 거다.


그러나 꿈별이는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태어났고 임신, 출산, 신생아 육아 무엇 하나 첫째와 같은 게 없었다. 다운증후군 아이를 어떻게 양육할지 처음부터 다 다시 공부해야 했다. 다운복지관에 가서 상담을 받고 책자를 받아와서 읽었다. 매일 수유를 하면서 스마트폰으로 다운증후군 건강 관련 정보를 읽고 또 읽었다. 꿈별이는 많은 합병증을 갖고 있었기에 알아야 하는 정보의 양도 어마어마했다. 병원에 갈 때마다 새로운 검사를 하고 앞으로 치료를 어떻게 할지 의료진의 설명을 들으며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도 많았다. 세상에 없던 아이를 잉태하고 낳아서 사람으로 키워내는 것 자체가 엄청난 책임감을 요하는 일인데, 종합병원 9개과에서 진료를 받으면서 수시로 보호자로서 판단을 내리는 건 무게감이 몇 배에 달했다. 내가 부족한 정보로 잘못된 결정을 내려서 아이에게 해를 끼치면 어떡하지, 매일 불안했다. 병원을 오가고, 검사를 받게 하고, 이후에 아이를 달래고 다시 일상에 적응시키는 과정이 물리적으로 힘들기도 했지만, 그 모든 과정을 책임져야 하는 정신적인 피로가 더 극심했다.


모유 수유는 성공했지만 배앓이하고 지리는 건 대체 언제쯤 끝날지, 언제까지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누워만 있을지, 장기 이상은 왜 이렇게 많은지, 처음 겪는 어려운 문제들이 산재해 있었다. 인큐베이터에서 한쪽으로만 누워있어서 꿈별이의 머리 모양이 비대칭으로 삐뚤었다. 수기치료를 잘하는 한의원이 있다기에 편도 두 시간 거리의 병원에 매주 다녔다. 조리도 제대로 못했기에 장거리 운전이 힘들었지만 그것마저 안 하면 아이 머리가 계속 이상한 모양으로 굳어질까 봐 무서웠다. 엄마가 해주면 좋다고 하는 것들은 그게 뭐든 다 했다. 건강한 아이가 어쩌다 감기에만 걸려도 죄책감을 가지는 게 엄마인데, 다 읊기도 힘들 만큼 많은 합병증을 가진 꿈별이를 키우려니 자책하지 않는 순간이 더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제야 고래 키우는 게 손에 익었는데, 완전히 다른 존재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키워야 하다니, 따라가기 벅찼다. 매일 울었고 매일 이를 악 물었다. 하도 세게 이를 물어서 턱이 얼얼해질 때까지 악물고 하루하루 버텼다.

















이전 11화 NICU 퇴원과 모유 수유 적응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