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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림 Jul 15. 2021

치유의 쓰기

[다운 천사 꿈별 맞이]


복받치는 불행


신생아 집중치료실(NICU) 퇴원을 며칠 앞둔 어느 새벽, 갑자기 눈이 번쩍 떠졌다. 바로 컴퓨터를 켜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이면 어떠냐고, 기다리던 둘째인데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아이를 포기할 수는 없다고 큰소리치며 아이를 낳았지만, 낳자마자 수술장에 들여보내고 NICU에 아이를 둔 채 홀로 퇴원해서 한겨울에 병원 면회를 다니는 건 생각보다 훨씬 서럽고 고된 일이었다. 툭 치면 눈물이 떨어질 만큼, 내 안에 슬픔이 가득 차서 넘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이를 낳은 후에 장애를 알게 되는 경우, 가족이 함께 그 충격과 슬픔을 소화할 수 있겠지만, 배 속에 있을 때 장애를 알았고, 저마다 의견이 달랐던 우리 가족은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줄 수 없었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한 불행이 차곡차곡 차올라 있었던 것 같다. 갑자기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초보 장애아 엄마의 설움을 글로 토해냈다. 퇴고도 하지 않고 인연이 있던 격월간 교육잡지 <민들레> 편집장님께 메일을 보냈다.


거칠고 부족한 글이지만, 장애를 가진 아이를 만난 엄마가 "모르는 세계로 들어선 현재진행형"의 글이라서 의미가 있다고 편집장님은 1년 동안 '부모 일기'를 연재할 수 있게 기회를 주셨다. 보통 장애아를 돌보는 양육자는 바쁘고 지쳐서 집중 육아기를 한참 지난 후에 회고하는 형식으로 쓴 글이 많다고 한다. 그런데 내 글은 미숙하고, 편협한 지점이 있을지언정 바로 지금 겪고 있는 일이기에 생생하게 느껴진 것 같다. 격월로 잡지가 나오기에 두 달에 한 번 글을 쓰면 되지만, 수시로 종합병원 진료를 다니는 아이를 돌보면서 글을 쓸 짬을 내기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마감을 앞두고 눈을 비비며 잠을 줄여서 겨우겨우 써서 보내는 날이 많았다. 여러 합병증을 가지고 있고, 백일 전에 고열이 오르기도 하는 등 이벤트가 끊이지 않아서 글감이 부족할 걱정이 없었다는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은유 작가는 <다가오는 말들>에서 "자꾸 몸에 들러붙는 생각, 솟아나는 얘기, 복받치는 불행이 아니라면 무엇을 쓸까."(145쪽)라고 말했다. 글쓰기에 큰 관심이 없던 내게 꿈별이는 자꾸 몸에 들러붙는 생각과 솟아나는 이야기, 복받치는 불행을 주었다. 그래서 쓸 수밖에 없었다. 장애가 곧 불행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비장애인으로 사십 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주변에 장애인이 한 명도 없어서 그 삶이 어떤지 가늠조차 하지 못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장애인의 엄마가 되는 건 축복보다는 불행에 가깝다. 아이를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겪는 급격한 변화와 충격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취직 시험에 떨어지고, 우울증을 겪고, 회사에서 부당한 일을 당하는 정도가 꿈별이를 낳기 전까지 겪었던 나쁜 일의 목록들이다. 그 정도로 나는 불행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우울하다고 말할지언정 불행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뭘 할 때 행복한지 잘 알고 있기에 어떤 순간에도 스스로를 다시 행복하게 만들 방법을 안다고 자부하며 살았다. 꿈별이의 장애를 알고, 남편과 사이가 나빠지고, 각오한 것보다 아이를 낳고 나서 닥친 현실이 훨씬 더 버거워지자 결국 내 입에서 "불행하다"라는 말이 나왔다.    


꿈별이를 낳기 전까지 나는 대학병원 어린이병동에 그렇게 많은 환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았다. 희귀질환의 종류가 그렇게나 많은 줄도 모르고 살았으며,  아이가 진료를 보는 과가 8~9개나   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다. 신생아를 데리고 종합병원에 검사를 하러, 진료를 보러 다니는 고됨을 직접 겪기 전에는  길이 없었다. 아직  이야기이지만 '일반'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에 아이를 보낼  없으리라는 것도 예기치 못했던 불행  하나였다. 준비하던 이민은 좌절됐고, 관심 가지던 대안학교는 통합교육을 하지 않는다고 학교 홈페이지 대문에 버젓이 써놓았으며,  가까이에는 장애전담은커녕 장애통합 어린이집도 없었다. 아이가 없던 삶에서 있는 삶으로의 변화도 급격하지만, 비장애아를 키우던 내게 장애아 엄마로서의 삶의 전환은  드라마틱했다.


여행이 좋은 이유가 내가 있던 곳을 벗어나 다른 시각을 장착하게 된다는 것인데 나는 꿈별이로 인해 살던 곳에서부터 완전히 다른 지점으로 영구적으로 이동하게 됐다. 그래서 새롭게 알게 되는 게 많고, 무심코 지나치던 걸 다시 보게 되고, 그래서 이야기가 계속 솟아나게 됐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로 가득 찬 세상에서, 나 역시 자각하지 못한 채 차별주의자로 살아왔음을 알게 되기도 했다. 알고 나니 사람들이 별생각 없이 건네는 말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마음에 오래 담아 두기도 했다. 그래서 도무지 떨쳐지지 않는 몸에 들러붙는 생각들이 많아졌다. 그 모든 게 나를 쓰게 했다.


타고난 글쟁이도 있을 거다. 글을 좋아해서, 좋은 작품을 많이 읽고 자신의 문장을 벼려서 좋은 작가가 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타고난 글쟁이도 아니고, 글이 좋아서, 글을 잘 쓰려고 노력해서 글을 쓰는 사람이 된 것도 아니다. 쓰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만큼 말들이 솟아오르고 넘쳐흘러서, 투박한 문장으로나마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사람을 만날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는 장애아 엄마가 혼자 글을 쓰며 처음 겪는 불행을 토해내지도 않았다면, 제정신으로 살아있기 힘든 시절이었다.



치유의 쓰기


글쓰기는 내게 유일한 소통 창구였다. 아이가 어릴 때 외출을 삼가는 게 좋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꿈별이 병원 갔다가 고래 하원 시간 맞춰서 집에 오기도 빠듯했기에 누굴 만날 시간 자체가 없었다. 그래도 초반에는 집으로 육아 동지들을 초대하기도 했지만, 점점 그럴 마음조차 내기가 힘들어졌다. 대인기피증처럼 모든 만남을 다 피했다. 모든 단톡방에서 나왔고, 오로지 상담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눌 뿐이었다. 일주일에 한 시간 온전히 내 이야기만 하는 건 숨통이 트이는 시간이었지만, 상담을 하지 않을 때는 내내 답답했다. 그 막막함을 풀어준 게 글쓰기였다.


처음에는 <민들레> 부모 일기 원고를 쓰기에도 급급했지만, 정제된 글이 아닌 그때그때 떠오르는 말을 쏟아내기 위해 블로그에도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처음 이유식을 먹은 날, 뒤집기를 마침내 성공한 날, 유독 슬펐던 날, 유독 예뻤던 날, 느리게 크는 꿈별이 육아기를 썼다. 바닥을 친 날 쓴 글을 조금 편해진 날 읽으며 '그래, 이런 날도 있었지' 하며 위안이 되었고, 기뻤던 날 쓴 글을 우울할 때 읽으며 '좋은 날도 있었네. 다시 그런 날이 올 거야'하며 희망을 갖기도 했다. 쓰는 행위 자체가 주는 해소의 기쁨도 있었지만, 독자들이 남겨주는 공감과 댓글에 위로를 받기도 했다. 또 나보다 조금 늦게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이를 낳은 사람들이 질문을 해올 때면, 선배맘들이 나에게 해준 것처럼 알고 있는 정보와 함께 응원의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글을 통해 세상과 연결되었다. 사람에게 상처받기가 두려워서 숨었지만, 그렇다고 고립되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글을 통한 연결은 나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하고도 안전한 방법이었다.  


몸으로 겪은 일을 글로 쓰면 그 슬픔과 힘듦이 내 몸에서 조금 멀어지는 느낌이 든다. 있었던 일, 느꼈던 감정과 거리를 두면서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내 몸에 들러붙어 있을 때는 숨 막히고 너무 괴롭던 일이 글을 쓰면 조금 떨어졌다. 그 틈새에서 나는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살기 위해 썼다고 말한다. 앉지도 못하는 아이를 치료 기구에 억지로 묶어서 세웠을 때, 치료 시간 내내 목이 다 쉬도록 악 지르며 우는 아이의 손을 잡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콧물, 침을 닦아 주면서 입술을 깨물고, 오늘 하루도 고생 많았다고 카시트에 앉히고 집으로 돌아오며 폭포수처럼 눈물을 쏟던 날들. 심장 검사를 위해, 청력 검사를 위해, 쓰디쓴 수면제를 억지로 먹이고 몸부림치는 아이를 안고 달랬다가 검사실에 눕히고 나오는 참담함. 진료 때마다 늘어가는 병명과 증상들. 그 고통을 글로 쓰면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나한테서 떨어져서 글자가 되고 문장이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하나하나 떨쳐내는 힘으로 하루를 살았다.


대단한 글이 아닐지 몰라도 나에게는 글쓰기가 곧 치유였다. 그래서 계속할 수 있었다. 많은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글을 쓸 시간을 내기도 어렵고,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글이 아닐지라도 괜찮았다. 나 하나 살리는 글이니까, 이 글의 가치는 이미 충분하다. 언젠가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글을 쓸 수 있겠지만, 그때는 다른 사람까지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마찬가지다. 써야 살 수 있어서 써왔고 지금도 쓴다. 글쓰기가 나를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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