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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림 Jul 16. 2021

함께 키우는 천사

[다운 천사 꿈별 맞이]


종합병원, 치료실과 함께 하는 삶


엄마 품보다 인큐베이터에 먼저 익숙해진 꿈별이는 병원과 치료실에서 보낸 시간이 많다. 장기 입원을 한 환아만큼은 아니겠지만 평일에는 매일 오전 시간을 전부 종합병원이나 복지관 치료실에서 보내기에 적다고 할 수는 없는 시간이다. 오후에도 주 1회는 언어치료실에 가고, 수시로 병원에 검진을 다니기에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집에 있는 시간과 병원이나 치료실에 있는 시간이 거의 비슷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건강한 비장애인 고래를 키울 때는 걷기 전엔 집 밖에 잘 나가지 않았다. 걸은 후에는 도시에 살고 있지만 최대한 자연을 접하게 해주고 싶어 산으로 들로 아이를 데리고 놀러 다녔다. 감기나 배탈 정도로는 병원에도 잘 가지 않았다. 날 때부터 우량아였던 고래는 식이 알레르기가 있는 걸 제외하면 애초에 잘 아프질 않았다. 고래는 엄마 껌딱지였고, 나도 아이에게 매우 집착하며 24시간 꼭 붙어서 지냈다. 자극적인 바깥세상으로부터 고래를 지켜야 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고 경계심이 매우 강했다. 산후 도우미에게조차 아이를 안지 못하게 했다. 길에서 누가 고래를 보고 "어머 예뻐라" 하며 다가오면 아이를 안고 뒷걸음질을 칠 정도였다. 그 사람이 뭘 만졌는지 모를 손으로 내 아이를 만질까 걱정됐고, 아이에게 허튼소리를 할까 우려됐다. 실제로 시장에서 아이 볼을 쓰다듬은 사람에게 만지지 말라고 소리를 지른 적도 있다. 눈을 치켜뜨고 잔뜩 신경이 곤두선 채 바깥세상을 대하는 엄마를 보고 자란 고래는 낯을 심하게 가리고 작은 자극에도 크게 울며 불안해했다. 그때는 예민한 아이를 더 내 품에 꽁꽁 싸매는 게 아이를 위하는 길인 줄 알았다. 


꿈별이는 태어나자마자 수술을 받는 바람에 엄마 살보다 플라스틱이나 비닐 등 일회용품으로 가득한 신생아 집중치료실(NICU)의 환경에 먼저 익숙해졌다. 고래는 조리원 퇴소와 함께 천기저귀를 썼고 물티슈나 휴지조차 아이 피부에 대지 않았는데 꿈별이의 NICU 입원 후 제일 먼저 사다 나른 것은 일회용 기저귀와 갑티슈였다. 무형광, 무표백, 소변줄 없는 친환경 기저귀 같은 걸 따질 겨를도 없이 병원 편의점에서 파는 제품을 사서 그대로 NICU에 제출했다. 처음에는 딱딱한 인큐베이터 안에서 호스와 각종 검사 기기, 주삿바늘에 연결된 채 혼자 누워있는 꿈별이가 너무 안쓰럽고 슬펐다. 그런데 3주 동안 매일 면회를 다니다 보니 병원의 환경에 익숙해지면서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NICU 간호사들은 교대로 근무해서 만날 때마다 다른 선생님이었지만 아이의 상태를 친절하고도 자세히 설명해 주셨고, 아이를 대하는 손놀림도 조심스럽고 따뜻했다. 사무적으로 급하게 아이 기저귀를 갈거나 검사를 하거나 분유를 먹이는 분은 한 분도 안 계셨다. 바쁜 NICU 업무 중에도 담당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주며 쓰다듬어주고 귀엽다고 웃기도 하셨다. 꿈별이 인큐베이터 옆에는 무려 1년 동안 입원해 있었다는 아기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퇴원하던 날 근무하던 의료진들이 전부 NICU 입구까지 나와서 인사를 건네는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의료진들은 분명 직업인이고, 아이를 예뻐해 주기 위해 그곳에 계신 분들이 아니기에 과도한 친절이나 보살핌을 기대해선 안되겠지만 꿈별이 입원 중에 만난 의사와 간호사들께는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한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퇴원 후 외래 진료를 볼 때도 그랬다. 처음에는 진료 일정을 확인하고 금식 시간을 지키고, 미리 복용시켜야 할 약을 챙기고, 시간 맞춰 병원에 가는 것조차 힘겨웠다. 꿈별이는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이들 중에서도 이런저런 합병증이 많은 편이었는데 각기 다른 과 진료를 위해 수시로 피를 뽑고 엑스레이를 찍고, 진정제를 먹고 정밀 검사를 하는 등 정기적으로 만나야 하는 의료진의 수가 족히 수십 명은 됐다. 6개월쯤 지나자 종합병원 외래 진료가 큰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이 되었다. 조금 익숙해지자 이번에도 사람들이 보였다. 검사 전에 동의서를 받거나 절차를 안내할 때 똑같은 말을 수백수천 번 했을 전공의나 간호사가 차근차근 내가 이해할 때까지 설명해 주고, 아이에게 무리가 가지 않는 방법, 아이가 더 편한 방법을 고민해 줄 때 고마웠다. 지난 검사 때보다 결과가 좋게 나오면 의료진도 함께 기뻐했고, 수술 소견이 나올 때는 위로를 건네주기도 했다.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 생활>에나 나오는 이야기 같겠지만, 물론 가끔 불편한 일을 겪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의료진은 아이를 그저 숫자나 일로서 대하지 않았다. 


꿈별이를 키우느라 애를 쓰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꿈별이는 내 노력만으로 큰 게 아니었다. 얼굴과 이름을 다 기억하지도 못할 만큼 셀 수 없이 많은 의료진의 손길로 꿈별이는 살았다. 그분들의 의료 행위, 배려, 따뜻함, 보살핌, 마음 씀씀이가 아이를 키웠다. 재활 치료를 시작한 후에는 더 강하게 느끼게 됐다. 매주 아이 몸을 만지고 동작을 유도하고 눈을 맞추는 재활 치료사들은 배밀이를 시작하거나, 혼자 앉거나, 네발 기기를 성공하는 등 비장애 아이에게는 별일도 아닐 아주 작은 성취에 대해서도 함께 크게 기뻐했다. 하다못해 마스크를 잘 쓰고 치료를 받는 것, 신발을 울지 않고 신는 등의 사소한 변화까지 축하해 주셨다. 가끔은 나보다 더 아이를 자세히 관찰하고 살핀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병원 사정으로 배정이 변경될 때는 치료사 샘과 찐하게 악수를 하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병원이나 치료실을 다니지 않고 집에서 편안하게 지내면서 크면 물론 좋겠지만, 매일 병원과 복지관 재활 치료를 다니는 삶에 꼭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다. 꿈별이는 정이 든 치료사 선생님들을 정말 좋아한다. 만나면 방긋 웃고 다가가서 꼭 안긴다. 선생님 얼굴을 쓰다듬고 애교를 부리기도 한다. 바닥이나 의자에 앉아서 해도 되는 활동인데 치료사 선생님 무릎에 앉아서 하겠다고 고집을 피우기도 한다. 꿈별이는 그만큼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어쩌면 꿈별이와 마주친 의료진들이 정해진 업무보다 아주 조금 더 마음을 내서 눈 맞춤 한 번, 손길 한 번 더 주신 그 사랑으로 여태 아이가 무탈하게 자랐는지도 모르겠다. 그 조금 더의 마음을 보호자인 내가 먼저 바라고 요구해선 안되겠지만, 기꺼이 내주셨을 때는 그저 감사히 받을 수밖에. 이게 다 꿈별이의 복이다. 



15개월에 밀어 넣은 어린이집


꿈별이가 돌도 되기 전 남편이 다시 해외 근무를 하러 떠나는 바람에 아이 둘을 꼼짝없이 독박육아하게 되었다. 24시간 중 단 1시간, 아니 10분도 채 혼자 있을 수 없는 삶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매일 병원을 오가느라 체력이 달리는데 잠시도 쉴 틈이 없으니 그 스트레스가 고스란히 첫째 고래에게 갔다. "엄마" 부르기만 해도 화부터 났다. 정말 간절히 혼자 있고 싶었다. 


꿈별이와 같은 나이의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이 엄마들과의 단톡방에서 하소연을 하자 한 엄마가 '시간제 보육'이라는 제도에 대해 알려줬다. 지역마다 시간제 보육을 제공하는 어린이집이 있어서 미리 예약을 하면 한 시간에 천 원이라는 저렴한 비용으로 돌봄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제도였다. 이렇게 좋은 제도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다니! 그도 그럴 것이 고래 때는 어린이집을 보내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육아가 너무나 적성에 안 맞는데도 기관에 보내면 당장 아이가 학대받을 것만 같은 걱정에, 38개월이 되도록 가정 보육을 했다. 막상 어린이집에 보내 보니 대부분의 교사들은 좋은 분이셨고 고래도 잘 적응해서 즐겁게 다녔다. 이제는 어린이집이 나쁜 곳이 아니라는 걸 아는 둘째맘이었기에 당장 집 근처 시간제 보육실을 검색했다. 


차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시립 어린이집에 시간제 보육실이 있었다. 미리 예약을 하고 꿈별이를 데리고 가서 상담을 받았다. 서류를 작성하고 꿈별이와 같이 교실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선생님이 잠깐 산책하고 오시라고, 아이가 적응하는지 보자고 제안하셨다. 그 당시 꿈별이는 돌을 앞두고 있었지만 아직 힘없이 누워만 있을 때였다. 선생님은 다음번에는 한 시간 동안 있어도 되겠다고, 잘 지냈다고 하셨다. 처음에는 한 시간, 두 시간씩 맡기다가 나중에는 유축한 모유와 젖병을 싸 들고 가서 네 시간 동안 맡기기도 했다. 꿈별이는 먹기도 잘 먹고 형, 누나들 노는 걸 구경하다가 혼자 스르르 잘 잤다고 한다. 그 덕에 나는 둘째를 낳고 처음으로 혼자 밥도 먹고 커피도 마셨으며, 친구 어머님의 장례식에도 다녀올 수 있었다. 


시간제 보육은 정말 고마운 제도였지만 매주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넘어가는 자정에 돌봄 서비스를 예약하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시간은 다른 엄마들도 선호하는 시간이기에 늘 경쟁이 치열했다. 대학 수강신청, 조승우 뮤지컬 예매 전쟁이 저리 가라 싶을 만큼 30초도 되지 않아 원하는 시간이 전부 마감이 되곤 했다. 돌이 지나자 순하디 순했던 꿈별이가 낯을 가리기 시작했다. 전에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가만히 안기고 바운서에 누운 채 조용히 놀았지만 차츰 운다고 전화가 올 때가 많아졌고 보육이 끝나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먹었던 걸 다 토하기도 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예약할 때 스트레스 받고, 우는 아이를 굳이 떨궈놓나 싶어서 시간제 보육 이용을 그만뒀다. 


주변에서는 차라리 안정적으로 같은 공간에서 익숙한 사람들과 지낼 수 있게 어린이집에 보내는 게 어떠냐고 조언해 주셨다. 못 이기는 척 집 근처 가정 어린이집에 상담을 예약했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이를 꺼리는 기관도 있다고 들어서 잔뜩 긴장한 채로 아이를 안고 상담을 하러 갔다. 때마침 코로나19가 터지는 바람에 퇴소하는 아이들이 많아서 자리가 생겼다고 했다. 이 시국에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도 되는 건가 잠시 고민했지만, 피로와 우울에 지쳐서 다른 걸 고려할 겨를이 없었다. 휴원을 하면 어쩔 수 없지만 받아만 준다면 보내야지, 다짐을 했다. 


꿈별이 장애와 건강 상태에 대해 말하고, 남편이 해외에 있다는 점, 꿈별이는 곧 사시 수술을 앞두고 있으며, 매일 재활 치료실에 가는 등의 일정을 원장님께 설명드렸다. 더 손길이 많이 갈 수도 있고, 주의해 주셔야 할 부분도 있는데 괜찮으시겠냐고 물었다. 원장님은 가만히 듣고 계시더니 천천히 입을 뗐다. 


"어머니, 힘드셨겠어요." 


그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입소를 거부하면 장애 차별이라고 따져야 하나, 다른 곳을 알아봐야 하나, 나와 아이가 상처받지는 않을까,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대뜸 위로부터 건네니 무장해제되고 말았다. 원장님은 이어서 말씀하셨다. 


"이제 우리한테 맡기고 어머니도 좀 쉬세요. 아이 혼자 키우기 너무 힘들어요. 우리 같이 키워요."     


맞다. 아이를 엄마 혼자 키우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이제는 너무 식상해진 속담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많은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만은 명백한 사실이다. 양육자와 보육 기관이 함께 아이를 키우는 것도 새로울 게 없는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도 우리 같이 키우자는 원장님의 말은 큰 울림이고 감동이었다. 좋은 기관이 더 많다고는 하나 잊을만하면 한 번씩 기관에서 학대하는 소식이 들려오는 게 현실이기에,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를 대면서 장애가 있는 아이를 안 받으려고 애쓰는 기관이 있는 것도 사실이기에, 기꺼이 꿈별이를 받아 주고, 함께 키우자고 말해준 원장님이 정말 고마웠다. 


입소를 결정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19 사태가 더 심각해지면서 휴원 명령이 떨어졌고, 한동안 더 가정 보육을 하다가 15개월에 비로소 꿈별이는 어린이집 적응을 시작했다. 한창 낯을 가릴 때였지만 엄마랑 같이 들어가서 시간을 보내고 천천히 선생님들 얼굴을 익히고 공간에 익숙해지자 한 달도 채 되지 않아서 무사히 적응을 마쳤다. 아침에 고래를 등원시키고 꿈별이와 치료실에 가서 재활 치료를 받은 뒤 다시 운전해서 어린이집으로 데려가 등원시켰다. 그러면 점심시간을 포함해서 두어 시간 남짓 내 시간이 생겼다. 드디어 혼자 산책도 하고 라면도 끓여 먹고 책도 읽을 수 있게 됐다.  


재활 치료를 마치고 등원하러 가는 차 안에서 꿈별이는 고된 치료에 지쳐 곤히 잠을 잔다. 깨자마자 엄마한테서 떨어져 어린이집 선생님께 안기는 게 서러울 법도 한데 이제는 어린이집 현관에만 가까이 가도 좋아서 춤을 춘다. 웃는 얼굴로 선생님께 안기고 나에게 잘 가라고 손을 흔든다. 울지 않고 기관에 가는 아이의 뒷모습은 정말 고맙고 사랑스럽다. 어린이집을 다니면서 내내 재활 치료를 받았고 수술도 두 차례나 더 받고 사이사이 아플 때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선생님들은 엄마인 내 마음을 살피고, 아이를 함께 걱정하고, 꿈별이의 회복을 위해 함께 기도했으며, 천천히 크는 아이의 성장을 함께 지켜봐 주셨다. 


꿈별이를 만난 후 내 세상은 더없이 넓어졌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세상을 알게 됐고, 기대하지 않았던 고마운 인연들이 생겼다. 삭막할 것만 같은 대학병원, 건강한 비장애 아이를 선호할 거라 오해했던 어린이집에 나와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꿈별이를 바라보고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꿈별이가 이 많은 사람들과 나를 연결해 주었다. 덕분에 나는 조금 더 열린 마음을 갖게 됐다. 위험한 바깥세상으로부터 내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옹졸한 마음에서 벗어나, 세상에는 상식적이고 따뜻한 사람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믿게 됐다. 좋은 엄마가 되려고 애쓰던 깐깐한 초보 엄마 시절의 나보다, 혼자 있고 싶다고 당당히 외치며 아이를 덥석 다른 사람 품에 안기는 느슨한 지금의 내가 더 좋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꿈별이를 함께 키우는 사람들이 있어서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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