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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림 Jul 23. 2021

자기 속도 대로 크는 아이

[다운 천사 꿈별 맞이]


느리게 크는 아이가 아니라고?



발달장애 전문가의 SNS를 팔로우 중인데 하루는 이런 글이 올라왔다.


"발달장애를 가진 아이들은 느리게 크는 아이가 아닙니다. 시간이 아무리 걸려도 '정상 발달'은 할 수 없으므로 느리다는 말은 정확한 설명이 될 수 없습니다."


꿈별이가 느리게 크는 아이라고 항상 생각했던 터라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곧 슬퍼졌다.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끝내 '정상 발달'을 할 수 없다는,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외면하던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4개월에 뒤집고, 13개월에 배밀이를 하고, 18개월에 혼자 앉았으며, 27개월에 네발 기기를 시작했고, 29개월이 넘은 지금까지도 꿈별이는 혼자 서지 못한다. 세 살이지만 엄마, 아빠, 맘마, 뽀~(뽀로로) 외에는 할 수 있는 단어도 거의 없다. 뒤집고, 기고, 앉는 동작은 느리더라도 할 수 있었다. 앞으로 큰 문제가 없는 이상 기다려 주면 서고 걷기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지적장애 '매우 심함' 등급을 받은 꿈별이는 진학을 해도 어느 순간 또래들의 학업 성취도를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 비장애 아이들이 10살에 할 수 있는 걸 꿈별이가 15, 20살이 된다고 할 수 있게 되는 게 아니다. 발달장애를 가진 아이의 발달은 속도도 다르지만, 도착지도 비장애 아이들과 다르다. 느리기만 한 아이가 아니구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커갈 거라는 사실에 새삼 마음이 아팠다.


둘째의 성별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운동을 잘하고 친구가 많은 훈남 아들을 꿈꿨다. 나와 남편의 유전자 조합이니 아이돌처럼 멋진 외모가 나올 리는 없지만, 나름의 매력이 있고 웃는 모습이 멋진 아들이길 바랐다. 농구를 잘 하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연애할 때도 구체적으로 이상형을 그려 본 적이 없지만 미래의 아들에 대해서는 '이런 남자아이이면 좋겠다'고 다양한 상상을 했다. 내 어릴 때 모습을 꼭 닮은 꿈별이를 볼 때마다 너무나 사랑스럽지만, 길 가다 훈훈하게 생긴 비장애 10대 남자아이를 보면 마음이 아파진다. 꿈별이가 저런 모습으로 크지 못할 것 같아서다.


꿈별이를 낳기 전까지는 내가 이토록 외모를 따지고, 학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내 외모 가꾸기에 관심이 없는 건 물론이고, 잘 꾸미는 남성을 매력적이라고 여긴 적도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공부를 못한 적도 없지만 그렇다고 출중하게 잘한 적도 없기에, 아이가 명문대에 가는 게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아이에게 자연에서 뛰어놀며 영어를 익힐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주고 싶다는 생각에 이민을 가고 싶었고, 이민이 좌절된 후에는 대안학교를 고려했을 정도로 입시 위주의 교육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꿈별이가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있다고 하자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게 외모와 학업이었다. 비장애인의 외모가 아닐 거라는, 말투가 다를 거라는 게 걱정됐다. 공부를 잘 하기는커녕 글을 익히고 자기표현을 하는 게 어려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깨시민'이라고 자부하며 살았는데, 나는 그저 외모지상주의에 편승하는 생각을 가진, 학벌을 따지는 사람이었다. 인식하지 못했던 나의 본 모습을 꿈별이 덕에 알게 됐다. 부끄러웠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이들 중에서도 꿈별이는 유독 느린 편이다. 의사와 치료사들도 한결같이 꿈별이가 유독 근력이 약하고 대근육 발달이 느리다고 말한다. 꿈별이보다 훨씬 늦게 태어난 아이들도 아장아장  걷는데 꿈별이는 매일 힘겹게 서고 걷기 위한 재활치료를 받아도 아직 서지 못한다. 처음에는 재활치료를 극성스럽게 받지 않아도 아이가   거라고 믿었다.  믿음은  깨졌다. 그래서 나는 이제 아이 발달에 대해 믿는다는 말을 쓰지 않는다. 반대 급부로  못할 거라고 여기게 됐다는  최근 깨달았지만, 여전히 발달을   거라고 믿는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지체장애를 가지고 있다면, 언어장애를 가지고 있다면, 아이는 부모의 믿음을 저버리는 걸까? 그럴  쓰는 '믿음'이라는 단어는 그저 양육자의 소망일 뿐이다. 아이는  소망 대로 자라는  아니다. 아이는 자기 능력 대로 자랄 뿐이다. 양육자는 아이 능력보다 많은  요구해서도,  낮게 폄하해서도  된다. 아이를  관찰하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 변함없이 사랑을 주는 , 그게 내가   있는 유일한 일이다.



있는 그대로 완벽한 아이


자기만의 속도로, 자기만의 방향을 향해 크는 꿈별이를 지켜보는 엄마인 나는 때때로 불안하다. 내 노력이 부족해서 아이에게 필요한 자극을 충분히 주지 못할까 봐 불안하고, 내가 안일해서 아이가 받아야 할 치료를 놓치지는 않을까 걱정된다. 낮병동에 입원해서 집중적으로 재활치료를 받는 아이들도 있지만 보험도 없고 비장애인인 첫째도 돌봐야 하기에 꿈별이는 매일 오전 재활치료를 받는 게 전부다. 기준에 따라 누군가는 나에게 너무 적게 시킨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아이 힘들게 너무 많이 시킨다고 말한다. 첫째 고래를 키울 때는 많은 책을 읽고 육아 강연을 듣고 공부하면서 나름의 주관이 생겨서 주변에서 하는 말들에 휘둘리지 않았지만, 지금은 매 순간 흔들린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이를 어떻게 키우는 게 맞는지 확신이 없기에 매일 휘둘리고 매일 불안하다.


자신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 걸 아는지 모르는지, 꿈별이는 그저 자기 할 일을 한다. 기분이 좋으면 크게 소리를 지르며 웃고, 기분이 나쁘면 징징대다 울어 버린다. 궁금한 게 있으면 쏜살같이 기어가서 입에 넣어 보고, 사정없이 낚아채 던져 보기도 한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방긋 웃지만 낯선 사람에게는 고개를 돌린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엄마지만 기저귀를 갈 때는 전속력으로 도망간다. 수술을 받고, 힘든 검사를 받아도 처지는 건 잠시뿐. 주사를 맞고, 쓰디쓴 약을 먹어도 꿈별이는 또 금세 웃어 버린다. 꿈별이는 있는 그대로 완벽하다. 장애 여부와 관계없이, 건강 상태와 상관없이, 발달 단계와 무관하게, 꿈별이는 꿈별이 그 자체로 완벽하다. 내가 이 아이에게 뭘 더 바란다는 게 욕심이고 사치다.


수술 후 오랜만에 찾은 치료실에서 꿈별이가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발을 디디며 걷기 훈련을 받았다. 앞에 서서 손뼉을 치며 응원하다가, 온 마음과 힘을 다해서 한 걸음씩 내딛는 꿈별이의 모습에 울컥,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다른 아이보다 느리면 어때, 영영 다른 아이처럼 하지 못하면 어때. 꿈별이는 자기 길을 갈 뿐이다. 비교하지 말라는 판에 박힌 말로도 떨치지 못했던 마음이 꿈별이의 위태로운 걸음을 보는 순간 녹아내렸다. 꿈별이는 자기가 또래보다 얼마나 느린지 신경 쓰지 않는다. 얼마나 예쁘게 걷는지, 상위 몇 퍼센트의 속도로 걷는지 괘념치 않는다. 꿈별이는 그저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걸음을 걸을 뿐이다. 마흔의 엄마는 매일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자책하며 괴로워하는데, 10개월 발달을 보이는 세 살 꿈별이는 세상 진리를 다 아는 영혼인 양 자신에게만 충실하다. 그래서 아이는 큰 스승이라고 하나 보다.



꿈별이는 내게 매일 배움을 준다. 매일 행복을 준다.    

꿈별이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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