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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림 Jul 31. 2021

장애아 가족으로 살아가기

[다운 천사 꿈별 맞이]

꿈별이 아빠 되기


꿈별이라는 태명은 남편이 정했다. 고래도 남편의 아이디어였다. 남편의 한국 복귀와 함께 독박 육아가 끝나고 둘째를 계획하던 몇 달 동안 그는 누구보다 둘째가 찾아오길 기다렸다. 마침내 꿈별이가 찾아왔을 때 그는 뛸 듯이 기뻐했고, 바라던 둘째 임신을 하고도 "나는 육아가 안 맞는데 둘이나 낳겠다는 게 잘하는 짓일까" 걱정하는 나에게, 고래는 혼자 키우느라 힘들었던 거라고, 이젠 자기가 있으니 걱정 말라고 다독였다. 내가 유산 위험으로 하혈을 하고 입원했을 때 정성스레 간호했고 두 달 동안 누워만 지내는 동안 고래 돌봄을 도맡았다. 고래와 놀이터로, 공원으로, 어린이박물관으로 다니며 신나게 놀았다. 나와 둘이 지낼 때 겁 많고 예민하던 고래는 아빠와 숨이 턱에 찰 때까지 뛰어다니고 과격한 놀이를 하더니 점점 대범해졌다. 좋은 아빠와 남편의 표본 같은 사람이었다.


꿈별이가 다운증후군이라는 걸 안 순간부터 그는 달라졌다. 꿈별이 태명을 부르며 내 배를 쓰다듬는 일도 없어졌고, 나를 사랑하니까 아이를 보내주자는 이해할 수 없는 말만 되풀이하는 사람이 됐다. 꿈별이를 낳겠다는 날 공격하기 위해 고래 육아를 비난할 만큼 잔인해졌다. 육아는 내 역린이었다. 혼자 아이를 잘 키워보겠다고 이를 악 물고 애를 썼는데 그 노력이 비난받자 나는 이성을 잃었다. 스무 살에 친구로 만나서 스물둘부터 연애를 했고 서른에 결혼을 했는데 서른 후반에 갑자기 내가 알던 그가 사라졌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눈만 마주치면 서로에게 으르렁대던 임신 후기에 나는 안전하게 말할 공간이 필요했고 부부상담을 제안했다. 그는 마지못해 응했지만 가기 싫다면서도 상담 시간을 꼬박꼬박 지켰다. 꼭 필요한 말 외에는 전혀 나누지 않게 된 후에도 함께 고래 어린이집 생일잔치에 가서 가족사진을 찍고, 육아 동지들과 연말마다 함께 하는 행사에 참여해서 고래의 마음을 풀어줬다. 만삭에 고래 설 한복을 만들어주겠다고 밤새 재봉틀을 돌릴 때도, 양수과다증으로 힘들어하던 와중에 고래 케이크를 구워줄 때도 "수고했네"라는 말은 잊지 않았다. 그래서 기다릴 수 있었다. 언젠가는 다시 내 옆자리로 돌아와서 고래에게 그랬던 것처럼 꿈별이에게도 좋은 아빠가 되어 주기를.


꿈별이가 태어나던 날에도 그는 내가 요구하는 것만 겨우 들어줄 정도로 차가웠지만 도망가지 않고, 외면하지 않고 진통하는 내 옆을 지켰다. 내가 회복실에 누워있는 동안 꿈별이 신생아 집중치료실(NICU) 입원과 수술을 위한 동의 등 필요한 수속을 맡아서 했고, 의사에게 들은 말을 성실하게 나에게 전해줬다. 꿈별이가 NICU 퇴원하던 날 딱 하루 휴가를 냈을 뿐, 이후의 병원 순례는 전부 조리 중인 내가 혼자 했다. 나와 사이가 나빠지고, 이민이 좌절되자 예정보다 일찍 회사에 복직을 해 버리는 바람에, 하루 걸러 하루 병원을 다니던 생후 3개월 동안 아무 도움을 받지 못했다. 그는 퇴원한 꿈별이에게 살갑지 않았다. 내가 밥을 먹거나 화장실에 가느라 부탁할 때를 제외하곤 그가 먼저 아이를 안아주거나 돌봐준 적이 없다. 고래 아가 때부터 지금까지도 얼마나 물고 빨고 아이를 사랑하는지 보아왔기에 꿈별이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꿈별이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이였다. 모든 아이들이 그러하듯 꿈별이도 그랬다. 남편은 내가 볼 때는 꿈별이를 쳐다도 보지 않는 척했지만, 몰래 아이를 안고 뽀뽀를 하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슬그머니 아이를 다시 내려놓았다. 다운증후군 아이를 키울 자신이 없다고 보내 주자고 말했지만, 막상 태어나서 꼬물대는 아름다운 생명을 어찌 외면할 수 있을까. 내 눈치를 살피지 않고 꿈별이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퇴근한 그에게 아이를 맡기고 고래랑 일부러 다른 방에서 놀기도 했다. 우리는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지만 말을 섞었다 하면 싸웠는데 어느 날 그가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꿈별이가 너무 귀엽다고, 그렇지만 나에 대해서는 마음이 풀리지 않는다고. 뭐 때문에 싸웠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그 말만은 또렷이 기억에 남는다. 꿈별이가 귀여우면 그걸로 됐다,라고 생각했다.


꿈별이가 9개월 때 남편이 또다시 해외 발령을 받았다. 출국 전에 휴가를 내고 꿈별이 소아심장과 검사에 처음으로 같이 갔다. 아이를 데리고 접수, 수납, 약국, 검사실, 진료실, 또 수납 카운터를 돌고, 쓰디쓴 진정제를 먹이고 달래서 재우고, 마음 졸이며 검사 결과를 기다렸다가 지친 아이를 태우고 집에 오는 과정을 여태 혼자 했는데, 남편이 같이 가자 너무 수월해서 검사를 하러 온 게 아니라 가족 나들이를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제 곧 못 보게 된다는 생각 때문인지 꿈별이를 안고 가만히 눈을 맞추고 있기도 하고 한참을 데리고 놀기도 했다. 나에게 수고하라는 말을 남기고 아이들을 안아준 뒤 그가 출국했다.


타지에서 외롭게 일을 하면서 가족이 그리워진 걸까, 4개월 후 휴가를 나온 그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어떻게 지냈는지 먼저 나에게 물어오고 아이들에게도 거침없이 사랑 표현을 했다. 그는 이렇게 대화조차 나누지 않는 상태로 지내기에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제 잘 지내보자고도 했다. 양수 검사 결과가 나온 지 1년 하고도 3개월이 더 지나서 드디어 그가 마음을 잡았다. 기쁨과 고마움과 슬픔과 원망이 뒤섞인 눈물이 흘렀다. 꿈별이 첫돌 아침 일찍, 네 식구가 집에서 간단하게 돌상을 치렀다. 그날 오전 남편은 중동 현장으로 복귀했다. 이번에는 공항에서 아이들뿐 아니라 나까지 따뜻하게 안아주고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장애아 가족으로 함께 살아가기


꿈별이 출생 앞뒤의 2 여는 우리 가족의 삶의 그래프가 요동치는 시간이었다. 둘째가 찾아온 환희, 장애를 알게 됐을 때의 절망,  후로 1 넘게 지속된 지난한 싸움, 냉랭해진 엄마-아빠 사이에서 시달린 고래의 불안, 여러 합병증으로 인해   없이 몰려드는 슬픔, 그리고 마침내 다시 하나  가족의 행복까지.


꿈별이의 장애 앞에서 여지껏 살면서 힘들어했던 크고 작은 문제들이 전부 가볍게 느껴졌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고 감당하기 버거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와 남편은 여태 내보인 적 없는 밑바닥까지 싸그리 드러내며 서로를 할퀴기 바빴다. 그는 나쁜 사람일까?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나쁜 사람일까? 둘 다 천하의 나쁜 인간이라 그렇게 싸워댔던 건 아니었다. 두렵고 불안하고 슬픈 두 영혼이 큰 일을 어찌 다뤄야 할지 몰라서 버둥댔을 뿐이다.


그가 많이 미웠고 깊게 상처를 받기도 했지만 모순적이게도 신뢰가 쌓이는 시간이기도 했다. 물리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거나 가족을 저버리는 행동은 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괴로운 와중에도 매일 성실하게 출퇴근을 하고, 주말마다 고래를 전담해서 돌보고, 퇴근 후 당연하게 설거지를 하고 아이를 씻기는 그를 보며, 최악의 순간에도 그가 지키려고 애쓰는 가치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앞으로 살면서 더 힘든 일이 닥칠 수도 있겠지만 그때도 그는 이렇게 묵묵히 견디겠지, 라는 믿음이 생겼다. 나 역시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버텼기에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아이들과 남편을 내팽개치지 않고, 나를 포기하지 않고 살아낼 거라는 자신도 생겼다. 그도 애쓰는 나를 보며 비슷하게 느끼지 않았을까.


꿈별이를 치료하는 의료진 중 한 명이 이런 말을 했다.


“지금 힘드시겠지만 사실 아기 때가 제일 좋을 때예요. 더 크고 학교 가고 그러면 주변에서도 더 이상 아이를 귀엽게 보지 않을 테고 훨씬 복잡한 문제들이 닥칠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몸과 마음을 많이 단단하게 해 놓으세요.”


집 근처에 지자체가 약속했던 특수학교를 계획대로 세우게 해달라고 장애아 부모들이 무릎을 꿇는 나라에서, 장애아를 키우는 가족으로 살아가려면 힘들고 억울하고 슬프고 괴로운 일이 많을 것이다. 가끔 두려워지는 게 사실이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걱정을 당겨서 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여도, 불쑥불쑥 불안함이 올라온다. 지금 꿈별이에게 반갑게 인사해 주는 이웃들이 아이가 커서 조금 다르게 걷고, 조금 다르게 말하고, 조금 다른 행동을 할 때도 한결같은 눈빛으로 봐줄까? 지금은 어린이집에서 사랑받으면서 다니지만, 학교에 갔을 때 차별받지는 않을까? 다른 학부모들이 자기 아이들의 학습권을 해친다고 전학을 요구하진 않을까? 조금 다른 아이와 외출했을 때 사람들이 던지는 시선을 내가 의연하게 무시할 수 있을까? 혹시라도 꿈별이 장애 때문에 고래가 놀림을 받게 되면 우리가 견딜 수 있을까?


다시 잘 지내기로 했지만, 함께 하하호호 웃으며 여가 시간을 보내지만, 남편과 나는 아직 이런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 나눠본 적이 없다. 전처럼 사이가 껄끄러워질까 주저하게 되는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입 밖으로 미래에 대한 걱정을 털어놓았을 때 기정사실화 될까 무서운 게 더 크다. 그래서 나는 오늘만 살기로 했다. 어쩔 수 없이 문득 불안함이 치솟을 때도 있겠지만, 의식적으로 지금 세 살인 꿈별이에게만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치료나 가정 학습을 열심히 안 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미래에 학습을 못 따라갈까 봐 미리 걱정하고 싶지 않다. 서려고 용쓰며 하늘 높이 치켜든 꿈별이의 엉덩이, 여전히 쪽쪽 빠는 꿈별이의 손가락, 위태롭게 흔들리며 소파를 잡고 옆으로 걸어서 리모컨을 향하는 꿈별이의 작은 발, 폭염에 목 뒤를 덮은 땀띠, 며칠 째 응가를 못해 볼록 나온 꿈별이의 배. 이런 것들에만 집중한다. 그러면 매일 웃을 수 있다. 매일 지치고 짜증 나고 슬프고 괴롭지만, 그래도 꼭 웃을 일이 생긴다.


꿈별이를 만나 장애아를 양육하는 가정이 된 우리는 그렇게 웃고 울며 하루를 산다. 이렇게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와 잘 살아왔네!” 할 날이 있지 않을까. 확실한 건 꿈별이를 만나기 전보다 지금이 훨씬 좋다는 사실이다. 나는 조금 더 겸손해졌고, 남편은 조금 더 솔직해졌고, 고래는 세상이 자기만을 위해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배웠다. 꿈별이가 열어준 세상을 살며 우린 매일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이 와도 괜찮을 거란 희망도 품게 됐다. 꿈별이는 이 세상에서 반드시 할 일이 있어서 온 아이다. 우리 가족에게 지금까지 꿈별이가 준 선물을 생각하면 그건 세상에도 도움이 되는 일일 게 분명하다. 그 일이 뭐든 나는 최선을 다해 돕겠다.


꿈별아! 나에게, 우리 가족에게 와 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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