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에 발목을 접질려서 깁스를 하고 누워있었다. 6주 후에 깁스를 풀고도 보호대를 하고 치료를 받느라 일상생활을 하지는 못했다. 주 5일 발달장애를 가진 둘째 치료를 다니는 전업 엄마가 드러누우면 어떻게 될까.
일단, 회사에 다니는 남편에게는 타격이 1도 없다. 다치던 날은 장마철이었는데 잠깐 비가 그쳐서 집에만 있던 첫째랑 산책을 나갔다가 비가 또 오려나, 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다 발밑 턱을 보지 못하고 접질려서 넘어졌다. 다행히 휴대전화를 갖고 있었고 마침 집에 와계시던 친정엄마한테 SOS를 청해서 부축을 받아 집에 들어왔다. 남편에게 다쳤다고 연락을 했다. 당시 회식 중이던 남편은 전화를 끊자마자 술을 더 마셨다고 한다. 앞으로 못 마실 것 같아서 그랬다나 어쨌다나.
다친 날 그랬던 것처럼 이후로도 남편은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하고 야근도 했다. 그 모든 공백은 우리 엄마가 메꾸기 시작했다. 알레르기가 있는 첫째 도시락을 싸서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고 짐을 챙겨 둘째를 안고 재활치료를 받으러 운전을 해서 다니는 일은 물론이고, 둘째 치료가 끝나면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다시 나를 정형외과에 데려가는 것까지 친정 엄마의 몫이었다. 아이들과 나, 그리고 퇴근한 남편의 저녁도 엄마가 챙기셨다. 남편은 퇴근해서 차려진 밥 먹고 아이들과 놀아주다가 씻기면 그만이었다. 깁스는 했지만 내가 바퀴 달린 의자를 끌고 집안을 돌아다니면서 아이들 돌봄을 도왔고 재우기도 했으니 남편은 오히려 평소보다 육아와 가사 부담이 덜해졌다.
할 일이 많은데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이지 못하는 건 매우 짜증 나는 일이었다. 통증은 시간이 갈수록 나아졌지만 한창 더울 때 창문조차 내 뜻대로 열지 못하고 꼭 엄마나 남편의 도움을 받아야 하니 답답했다. 그 짜증을 받는 상대도 우리 엄마였다. 사실 기혼자인 나의 법적 보호자는 배우자인데 내가 아파도 그의 회사 일에는 절대 차질이 있으면 안 되고, 우리 엄마의 노동에 기대어 온 가족이 생활을 하는 상황이 어이가 없고 화가 났다. 이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꾼과 그 가족은 아플 권리조차 없구나, 엄마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 감사하지만 나처럼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황인 사람들도 많을 텐데 다들 어떻게 살고 있는 거지? 누워 있으면서 어느 때보다 많은 질문과 상념이 떠올랐다.
30대 후반인 나에게도 매일 아이 치료실에 운전을 해서 다니는 건 고달픈 일인데 지병이 있는 엄마에게는 많이 무리가 가는 일이었다. 가끔 엄마가 아이를 안고 숨을 가쁘게 쉬며 힘들어하실 때는 아프면 제발 이야기를 하라고, 왜 힘들게 아이를 안고 있냐고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는 내가 다치는 바람에 우리 엄마를 힘들게 하는구나, 아프게 하는구나 죄책감에 시달렸다.
주말에는 엄마가 친정에 가서 밀린 살림과 아빠의 식사를 챙기시는 동안 남편은 아이들을 데리고 시가에 가거나 집에서 돌봤다. 둘째가 돌이 지났지만 소화기가 약한 아이라 죽을 만들어서 주고 있었는데 내가 다친 뒤 남편은 죽 전문점에서 무염 죽을 사서 먹였다. 첫째는 어느 때보다 많은 외식과 배달음식으로 끼니를 때웠다. 어느 때보다 많은 영상물을 봤음은 물론이다. 둘째를 낳고 첫째 때 해오던 육아 원칙을 많이 내려놨지만 아파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입장이 되니 더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했다.
가끔 동생이 첫째 등‧하원을 해주거나 주말에 육아와 가사를 도와주기도 하고 남편과 친정엄마도 아이들 돌봄과 살림을 해주고, 내 뒤치다꺼리도 해줬는데, 어른 여럿이 함께 하는데도 내가 혼자 아이들을 돌볼 때보다 포기하고 내려놓아야 하는 부분이 많다니 이상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동안 내가 정말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어른 몇이 달려들어도 나 혼자 하던 일을 다 할 수 없다는 것을.
다친 다리는 십 년째 반복해서 삐어서 인대가 너덜너덜한 상태라고 하는데 불안정하기 때문에 계속 다칠 수밖에 없다고 의사는 설명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다르다. 나는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어서, 충분히 휴식을 취한 적이 없기 때문에 자꾸만 다치는 것이다. 이렇게라도 쉬라고 내 몸이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에게 휴식과 돌봄이 너무 필요한데 그걸 머리는 도저히 깨닫지 못하고 있어서 발이 대신해준 것이다.
두 달이 지나고 조금씩 일상에 복귀했다. 둘째 치료도 다시 다니고 외식에 많이 의존하기는 하지만 아이들 밥도 직접 차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누워있는 두 달 동안 방치된 집안일이 보였다. 첫째 어린이집 식판은 뚜껑 패킹에 곰팡이가 껴서 회생 불가 상태였고(이 상태의 식판으로 애가 밥을 매일 먹었다니!!!!) 세탁기 먼지망은 차마 묘사하기 꺼려질 정도로 끔찍한 상태였다. 남편도 친정 엄마도 내가 살림을 깔끔하게 하지 않는다고 잔소리를 하곤 했는데, 사실 이런 안 보이는 자잘한 가사 일은 나 말고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전업 엄마의 일이 그렇다. 가사노동, 살림이라는 게 안 하면 티 나지만 하기 시작하면, 해도 해도 티가 안 난다. 보이지 않는 일이 많다 보니 나는 쉬지 않고 일했는데 아무도 모른다. 생색내기 좋아하는 나는 그래서 가사노동이 치가 떨리게 싫다. 하루 종일 엉덩이 한 번 못 붙이고 종종거리고 집안에서 아이들 챙기고 살림을 해도 남들이 보기엔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집에서 노는 여자가 되고 만다.
집밥의 정성도 눈에 안 보이긴 마찬가지다. 첫째는 식이 알레르기가 있어서 정말 정성스레 집밥을 해서 먹였다. 시판 이유식, 간식 먹인 적 없음은 물론이고 제빵을 배워서 빵도 직접 발효해서 구워줬고 시판 양념을 못 믿어서 직접 간장, 된장을 담가서 먹였다. 매일 새 밥을 지어 함께 아침을 먹고 도시락을 싸서 숲으로 다녔고 저녁에 다시 새 밥을 지어 차렸다. 남들은 왜 그렇게 유난 떠냐고 했지만 알레르기로 피부가 다 뒤집어져 아토피 초기였던 아이가 여섯 살이 되도록 흔한 수족구, 구내염 한번 앓지 않고 감기도 잘 걸리지 않고 피부가 단단해졌으며, 밥 잘 먹고 잘 싸고 잘 뛰어노는 건강한 아이로 자란 건 보이지 않는 내 노력의 결과라고 자부한다. 그런데 아이들 돌봄을 맡은 주말마다 외식으로, 배달 음식으로 때우는 남편에게는 돌봄이, 가사가 쉬울 수밖에 없다. 겨우 두 달 바깥 음식 먹었다고 아이들 건강에 바로 적신호가 켜지진 않겠지만 그렇게 5~6년을 살면 면역력이 약해질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하다. 아이들 건강을 관리해온 내 노동 역시 보이지 않기에 인정받지 못한다.
두 달 동안 누워있으면서 그동안 전업 엄마로 살면서 내가 해온 일들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정말 많은 일을 혼자 하고 있었고, 너무너무 애를 쓰면서 살아왔다. 편히 쉬지도 못한 건 물론이고 쉬어야겠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제는 발이 먼저 인대를 희생해 가며 알려주기 전에 내 몸을, 내 쉼을 잘 챙기고 돌봐야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안 보여서 아무도 모르는 전업 엄마로서 나의 노동을, 발달장애아 엄마로서의 노동을 나부터 충분히 인정해 줘야겠다. 그리고 내가 제일 잘 하는 것, 떠드는 것으로(!) 세상에 알려야겠다.
세상 사람들!! 전업 엄마가 이렇게 많은 일을 한답니다! 유아차 끌고 커피 한잔 한다고 손가락질하지 마세요!!
*에세이레터 <조각보> 20호(2020.12.7.)에 실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