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아이와 느린 아이 함께 키우기

by 울림






“바보야!”


고래가 꿈별이에게 소리쳤다. 꿈별이가 또 누나 장난감을 함부로 만진 모양이다. 순간 피가 거꾸로 솟아 얼굴에 열이 올랐다. 심장이 요동쳤다. 바보라는 말은 어디서 배웠지? 무슨 뜻인지 알고 쓰는 건가? 라는 생각에 미치기 전, 수치심이 먼저 울컥 올라왔다. 미래를 미리 본 것만 같았다. 꿈별이가 언젠가 누군가에게 ‘바보’ 소리를 듣지는 않을까, 내심 불안했기 때문이다. 거의 동시에 나와 남편이 그런 말은 나쁜 말이라고 고래에게 화를 냈다. 그도 나만큼 당황한 걸까. 아니면 그냥 바보라는 말이 객관적으로 나쁜 말이라서 나무라는 것뿐일까. 물어볼 용기는 없었다. 내가 꿈별이가 바보라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될까 봐 속으로 삼켰다. 고래에게 “속상한 건 알겠지만 그런 말은 쓰면 안된다”고, “어디서 배웠냐”고 단호하게 말했다. 엄한 태도가 무색하게 고래가 대꾸했다. “어린이집 친구들도 쓰지만, 엄마도 맨날 ‘아유 바보같이 엄마가 또 이랬네’라고 말하잖아.” 그랬구나, 내가 쓰던 말이구나.



꿈별이는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이다. 발달이 매우 느리고, 끝내 ‘정상 발달’은 하지 못할 것이다. 대부분의 다운증후군은 지적장애를 동반한다. 얼마 전 두 돌이 지난 꿈별이는 장애 판정을 받았다. 지적장애로 ‘매우 심함’ 등급을 받아서 복지 카드가 나왔다. 꿈별이를 낳기 전까지는 바보라는 말이 장애인 비하 표현인지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너무 가볍게 써서 욕이라고 느끼지도 않았다. ‘사랑밖에 모르는 바보’, ‘딸바보’ 등 긍정적인 표현에도 쓰이기에 원래 의미에 대해 고심해본 적이 없다. 어딜 가나 ‘동네 바보 형’ 하나쯤 있지 않냐고 농을 하기도 했다. 누가 뭘 모르거나 못하면 “바보 아냐?”라고 툭 내뱉었다. 그런데 배 속 꿈별이가 다운증후군을 가진 것 같다는 의사의 말을 들은 후부터 그 말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내 아이가 남들이 말하는 ‘바보’일 수도 있겠구나… 아파졌다.



의식하는 것과 달리 내 입버릇은 여전히 바보라는 말을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일곱 살 고래가 제대로 된 뜻도 모르면서 따라서 쓸 정도라면. 내가 실수했을 때 무심코 ‘바보’라고 자책하는 걸 고래가 다 듣고 있었다니 부끄러웠다. 그러나 고래 앞에서 타인에게 ‘바보’라고 비난한 적은 추호도 없기에 그런 쓰임은 기관에서 배워온 게 맞을 것이다. 일곱 살이 쓰기에 좋지 않은 말이라는 것은 의식 차원의 판단이다. 내 언어 습관이 아직도 잘못되었구나, 라는 반성도 그렇다. 그러나 내 몸이 뜨거워지고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건 무의식의 수치심이 건드려졌기 때문이다. 내 아이가 ‘바보’ 소리를 들을 거라는 비관적 상상이 꽤 오래 무의식 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 같다.



슬펐다. 꿈별이에게 장애가 없었다면 내가 지금처럼 당황했을까? 고래는 내 말버릇을 쫓아서 “아이씨!”도 곧잘 하고 나나 남편의 이름을 친구 부르듯 부르기도 한다. 그때마다 나는 화를 내는 대신 웃어 버린다. ‘아이씨’가 좋은 말은 아니지만 나도 못 고치는데 아이한테만 뭐라고 할 이유가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엄마 아빠의 이름을 친구처럼 부르는 건 귀엽다고 생각했다. 꿈별이에게 장애가 없었다면 나는 그런 말들에 대응하듯 웃어넘겼을지도 모른다. “동생한테 바보라고 하면 안 되지~” 부드럽게 알려주기만 했을 수도 있다. 그 생각을 하니 슬퍼졌다. 물론 바보는 장애 비하 표현이고 써서는 안 되는 말이지만, 그 말이 나에게 그냥 단어가 아니라 몸이 반응하는 엄청난 무언가가 되었다는 사실이 아팠다. 슬프고 부끄러웠다.



고래는 말이 빨랐다. 돌 즈음에 이미 엄마, 아빠, 맘마, 쭈쭈, 물, 냥냥(고양이) 등의 단어를 말했고 18개월 즈음에는 할 줄 아는 단어가 200개가 넘어서 세다가 포기했다. 매일 새로운 단어를 여러 개 입 밖으로 꺼내서, 그것도 아주 정확하게 구사해서 감탄만 하다가 하루가 다 갔다. 그리고 마침내 두 돌이 되자 못 하는 말이 없어졌고, 나와 말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고래는 배 속에서부터 우량아였다. 발육이 빨라서 늘 친구들보다 머리 하나만큼 키가 커서 또래보다 한두 살 많게 보인다. 생일도 연초인 데다 인지 발달도 빨랐다. 첫째라서 실감을 못했지만 어린이집 선생님은 한 살 위 아이들이 보이는 행동을 고래가 지금 하는 거라고 전하실 때가 많았다. 거짓말도 또래보다 먼저 시작했고, 친구들 지적질도 또래보다 빨랐다.



고래를 키울 때는 초보 엄마였고, 육아서를 열심히 읽고 강의도 부지런히 쫓아다녔지만, 늘 아이의 발달보다 반보 뒤처진 느낌이었다. 내가 먼저 준비된 상태에서 겪은 일보다 아이가 어떤 발달을 보여서 부랴부랴 이게 뭔지 찾아본 일이 더 많았다. 고래 친구들보다 생일도, 발달도 빠르다 보니 둘째맘들 외엔 조언을 구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당황스러운 한편, 고래가 빠른 게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생일 늦은 친구들이 어떤 발달을 보일 때마다 나는 몇 달 먼저 겪어봤다고 신나게 아는 척을 했다. 고래의 빠른 발달이 마치 내 노력의 성과이기라도 한 듯 의기양양했다.



꿈별이를 낳고야 뼈저리게 느꼈다. 꿈별이의 장애가 내 탓이 아니듯, 고래의 빠른 발달과 영리함도 내 덕이 아니라는 것을. 꿈별이가 또래보다 느리게 커가는 걸 아무리 재활치료를 받아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처럼 고래가 크는 속도도 내가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없는 일이다. 학교 가기 전까지 한글을 안 가르칠 생각이었지만 고래는 어린이집에서 이름표를 보고 자기 이름과 친구들 이름에 들어간 글자를 그림처럼 외워 버렸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장난감 상자나 달력을 앞에 놓고 스케치북을 펼쳐 똑같이 따라서 그린다. 이제는 자기 이름을 쓸 때 나름의 멋도 부린다. 내가 막는다고 막을 수 있는 게 아닌 것처럼, 반대로 가르친다고 따라온다는 보장도 없다는 걸 알았다.



꿈별이 상태에 대해 자세히 말해준 적이 없지만 눈치 빠른 고래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 “어린이집에 꿈별이 친구들은 걸어서 산에 가는데? 꿈별이는 느려서 못하는 거지?”라든가 “꿈별이는 대체 언제 말하는 거야? 꿈별이 친구는 말도 잘하는데? 일곱 살 되면 말할까?”라는 말을 해맑은 얼굴로 건넨다. 그러면서 또 꿈별이의 작은 성취를 축하하고 있으면 얄밉게 질투한다. 두 돌이 넘었는데 이제야 네발 기기 자세를 조금씩 연습하는 꿈별이를 보며 내가 폭풍 칭찬과 물개박수를 보내고 있으면 슬쩍 와서 “나보다 하나도 못 하는데 뭐가 잘한다는 거야.”라고 볼멘소리를 한다.



안 그래도 빠른 편인데 욕심까지 타고났는지 아무리 그림 잘 그린다, 달리기도 잘한다, 칭찬을 해줘도 “어린이집 OO 친구는 그림을 나보다 훨씬 더 잘 그려”라고, “나는 달리기를 세 번째로 잘 해”고 자신을 몰아세우는 고래를 보면 걱정이 앞선다. 아무도 경쟁을 요구하지 않는 어린이집 시절에 혼자 친구들과 비교하며 괴로워하면 나중에 학교 가서 본격 경쟁이 시작되었을 때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으려고 그러는 걸까. 모범생은 타고난 성향이라는 걸 고래를 보며 느낀다.



고래와 꿈별이의 간극이 참 크다. 다른 집 첫째, 둘째도 다 다르겠지만 빠른 아이와 조금 느린 아이도 아니고, 빠른 아이와 지적장애를 가진 아이니, 앞으로는 그 격차가 더 커질 게 뻔하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겁이 난다. 고래에게는 고래에게 필요한 공감을 해주고, 꿈별이에게는 꿈별이 눈높이로 옆에 있어 줘야겠지만, 너무 다른 기준으로 아이들을 대하진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꿈별이는 장애가 있으니까 내가 다 해줘야지, 돌봐줘야지.’ 그래서도 안되고, 고래에게 “너는 다 잘하니까 더 노력해야지.” 닦달해서도 안 될 터다.



꿈별이가 준 큰 배움은 생명은 있는 그대로 소중하다는 진리였다. 장기가 기형이라 수술을 해야 하든, 각종 합병증으로 수시로 병원을 가야 하든, 발달이 느리고, 영영 비장애인처럼 살 수 없든 어떻든, 그런 건 다 중요하지 않다. 꿈별이가 내 옆에 살아 숨 쉬는 게 가장 중요하다. 꿈별이가 나에게 온 이유는 그 진리를 고래 누나에게도 똑같이 적용하라고 알려주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예쁘고 영리한 고래가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길 바라고, 기대하고 강요하다가, 실망하고, 상처 주고, 비난하지 말라고, 비장애인인 고래 누나 역시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 자식 도리는 다하고 있으니 그저 사랑만 주라고 꿈별이가 나에게 알려줬다. 앞으로 고래가 꿈별이의 장애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는 날, 꿈별이로 인해 학교에서 안 좋은 소리를 듣게 되는 날, 그래서 꿈별이가 장애인인 게 싫다고 울게 되는 날, 엄마는 왜 꿈별이를 저렇게 낳았냐고 원망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그 어느 때에도 고래와 꿈별이가 있는 그대로 소중한 존재들이라는 그 사실 하나만 잊지 말고, 빠른 아이와 느린 아이를 함께 잘 키워야겠다고 다짐한다.



unnamed (2).jpg 고래와 꿈별. 울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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