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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림 May 06. 2020

나는 장애인의 엄마가 되기로 했다

[꿈별 맞이]


둘째 임신 24주, 나는 장애아를 낳기로 결정했다.




내 인생은 정밀 초음파 검사 전과 후로 나뉘었다


기다리던 둘째를 임신하고 입덧에 힘들어하던 여름의 어느날, 갑작스런 하혈 때문에 다니던 산부인과로 달려갔다. 피만이 아니라 양수까지 새고 있어서 당장 입원해야 한다는 의사에 말에 눈물이 쏟아졌다. 당시 입덧 때문에 밥 냄새를 맡을 수 없어서 다인실에 입원해 있는 게 고역이었다. 1인실로 옮기고 유산방지 약 링거를 달고 '절대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당부를 들으며 누워있었다. 밥을 못 먹는 입덧이라 병원밥도 거절하고 남편이나 친정식구들이 번갈아 가며 사오는 빵, 수제비 등의 밀가루 음식으로 겨우 허기만 때웠다. 엄마 껌딱지인 첫째는 엄마랑 같이 집에 가고 싶다고 병원이 떠나가라 대성통곡을 했다. 그 병원의 1인실은 조리원 병실이었던지라 옆방에서는 수시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둘째라 태동을 빨리 느끼기 시작했는데 뱃속의 아이가 옆방의 신생아처럼 잘 자라서 앙앙 울 수 있을 때 세상에 나오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임신 12주였다.



다행히 일주일도 되지 않아 상태가 나아져서 퇴원을 했다. 그래도 앞으로 두달간 꼼짝말고 누워있으라는 경고를 들었다. 마침 남편이 육아휴직 중이었기에 첫째 돌봄과 집안일 걱정 없이 누워서 쉴 수 있었다. 퇴원하면서 기형아 1차 검사를 했고, 중간에 한 번 더 병원을 방문해 2차 검사도 진행했다. 결과는 다운증후군 고위험군이었다. 1:6의 확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매우 높은 확률이었지만 양수가 샜던 전적이 있어 양막에 바늘을 꽂을 경우 태아를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며 담당의는 양수검사를 권하지 않았다. 만 35세가 지난 '노산' 산모이기에 수치가 높게 나올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양수검사를 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이를 낳을 미래에 대해 생각해봤다. 어떤 경우라도 사랑해주겠다고 다짐했지만, 정말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믿지는 않았다.



누워만 지낸 지 두 달이 넘어 다시 상태를 보러 병원에 갔다. 20주가 되어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아이와 내 몸 상태도 괜찮아졌으니 조금씩 일상생활을 해도 되겠다는 소식을 들었다. 뱃속 아이가 협조를 해주지 않아 정밀초음파는 2주 뒤에 보기로 하고 기쁜 마음으로 병원을 나섰다. 입덧도 다 끝나 입맛이 돌아왔고 첫째와 놀이터에 나가기도 하며 조심스레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 세 식구, 뱃속의 아이까지 네 식구는 모처럼 평화롭고 행복했다.



22주에 정밀초음파를 보러 갔는데 의료진들이 굳은 표정으로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십이지장 폐쇄 소견이 보이고 코 뼈도 낮아 보이며 심장에도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여러 징후를 종합해 볼 때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이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당장 의뢰서를 써줄 테니 3차 병원으로 가서 정밀 검사를 해보라고 말했다. 며칠 뒤 대학병원에서 전에 하지 않기로 결정했던 양수검사를 뒤늦게 하게 되었다. 안정기라고는 하나 여전히 양수검사의 부작용은 존재하기에 썩 내키지 않았지만, 남편이 강하게 원해서 배에 굵은 바늘을 꽂았다. 배가 뻐근하고 불쾌했다. 결과가 나오려면 몇 주를 기다려야 하지만 추가 비용을 내면 며칠 만에도 몇 가지 검사 결과는 들을 수 있다고 안내를 받았다. 더 빨리 결과를 듣기로 하고 추가 비용을 결제했다. 그 뒤로 며칠은 어떻게 지나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돌이켜 보면 정밀초음파 검사실에 들어가기 전과 후의 나의, 우리 가족의 인생은 너무나 달라졌다.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는 말을 들은 뒤, 다시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99.7%확률로 다운증후군 확진


양수검사 결과가 나왔다. 99.7%의 정확도로 다운증후군 확진 판정을 받았다. 0.3%의 확률로 아닐 수도 있지 않냐고 의사에게 물었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과학에 100%는 없기 때문에 99.7%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일 뿐, 사실상 다운증후군이 아닐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했다. 정밀초음파에서 십이지장 폐쇄와 심장 판막 구멍이 보이는 것 역시 다운증후군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임신 24주의 일이다.



피검사에서 고위험군이 나왔을 때와 양수검사와 정밀초음파 결과가 나왔을 때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산모의 혈액을 채취해서 진행하는 쿼드검사에서 고위험군이 나왔을 때는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내가 보기에도 첫째 때와 다른 초음파 모니터와 뻐근하게 아프도록 주사를 넣어 빼낸 양수검사의 결과는 이 일이 실제상황임을 확인시켜주었다. 나를 포함해 가족들은 무거운 슬픔에 짓눌렸다.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한 마디도 주고받을 수가 없었다.



남편과 가족들은 임신중지를 이야기했다. 태동을 느낀 지 두 달이 넘어 아기와 이미 교감을 하고 있던, 그래서 이미 얼굴도 모르는 뱃속의 아이와 사랑에 빠진 나에게 아이를 포기하라는 것은 불가능한 요구였다. 첫 임신이었다면 달랐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미 열 달동안 뱃속에 품었다가 아이를 만나는 게 어떠한 경험인지를 해보았기에 내 품에서 발길질을 하는 아이가 생명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아이를 낳으려는 게 내 이기심이라는 말을 들었다. 아이는 장애를 가진 채 이 세상에 나오고 싶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픈 몸을 가진 아이를 보내주지 않는 건 욕심이고 집착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아픈 아이를 이용해서 훌륭한 엄마라는 훈장을 달고 싶은 거냐는 비난도 들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 유산 위험을 잘 이겨낸 장한 임신부였던 나는 갑자기 이기적이고, 아이를 이용하는 욕심쟁이 엄마가 되어버렸다.



인터넷 검색창에 다운증후군을 검색했다. 시도때도 없이 글을 찾아 읽고 또 읽었다. 자연출산 카페에 다운증후군 아기 육아기를 올린 '선배맘'에게 쪽지를 보내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책도 찾아 보았다. 먼저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이를 키워본 엄마들은 힘들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도 했다. 비장애인인 건강한 첫째를 키우면서도 나는 힘들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고되고 어렵고 힘든 일이다. 누구에게나 그렇다. 고통만 있지 않다는 것 역시, 어느 부모에게나 마찬가지이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힘들다고 낳지 말걸 그랬다고 후회하는 엄마가 많을까? 있다 한들 그게 아이의 잘못인가? 육아를 힘들게 하는 건 그가 처한 상황이지 아이 자체의 문제가 아닐 경우가 더 많다.



건강한 비장애인 아기만 이 세상에 태어날 권리가 있는 것일까. 태어나다가 의료 사고로, 혹은 건강히 살다가도 사고로, 질병으로 인해 장애를 갖게 되는 경우도 많은데 그럼 더이상 살아갈 가치가 없는 목숨인가? 누구도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뱃속의 아이에게는, 비장애인일 것으로 추정이 되면 축복을 하고, 장애인으로 보이면 걸러내라고 강요하는 것일까. 그렇게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걸러내서 이륙하려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그곳에서 우리는 행복할까? 내가 이 아이를 99.7%의 확률 때문에 포기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엄마 배를 끌어안고 매일 뽀뽀를 해주며 벌써부터 동생을 사랑하는 첫째에게 뭐라고 말할 것인가. 이 아이를 포기하고 나면 나는 첫째의 눈을 당당히 볼 수 있을까?



사랑하는 첫째가 장애를 가지게 된다고 내 사랑을 철회하지 않듯, 나는 뱃속의 둘째에게도 똑같이 하기로 결정했다. 0.3%의 확률에 기대를 걸 수 없다면, 장애아의 엄마가 되어야만 한다면, 그래, 기꺼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사실 장애아의 엄마가 되기로 결정했다는 말은 좀 이상하다. 선택할 수만 있다면 장애가 없는 아이를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선택권이 없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염색체 하나가 더 있는 아기가 나에게 왔고, 첫째를 품었듯 그 아이를 품고, 첫째를 낳았듯 그 아이를 낳을 뿐이다. 나는 피하지 않기로 했을 뿐이다.



장애아의 엄마가 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의사는 아이의 십이지장이 막혀있어서 양수를 삼키지 못하고, 뱃속에서 배변 연습을 전혀 하지 못하고 세상에 나올 것이라고 했다. 나오자마자 젖을 먹을 수 없기에 바로 수술을 해야한다고 말했다. 태아가 양수를 삼키지 못하는 것을 모르는 내 몸은 계속 양수를 만들어 냈고, 양수과다증으로 임신 후기를 괴롭게 보냈다. 앉아 있으면 다리에 피가 안 통하고 서 있어도 다리가 저렸으며 누워서도 숨이 찼다. 의사는 양수감압술이라고 바늘로 양수를 빼내는 시술을 할 수 있다고 알려줬지만, 그또한 임시방편일 뿐 금세 다시 과다 상태로 돌아가며 아이에게도 위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감압술을 받지 않고 37주까지 버텼다.



37주 5일 밤 10시에 신생아집중치료실(NICU)에 자리가 났으니 내일 오전에 유도분만을 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출생과 동시에 NICU에 들어가 검사를 받고 십이지장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양수과다증으로 힘든 와중에도 자연진통을 기다렸기에 갑작스런 병원의 연락에 마음이 심란했지만 첫째를 만났을 때와 같은 자연주의 출산은 꿈도 못 꾸는 상황인 걸 진작 알고 있었다. 유도분만은 순조로웠다. 감사하게도 NICU로 옮기기 전 아이를 잠깐 가슴에 안겨주셨는데 너무도 예뻐 0.3%의 기적이 일어난 건 아닐까, 희망을 품기도 했다.



둘째가 태어난 후 염색체 검사를 했고 결과지에는 21번 자리에 세 개의 염색체가 선명히 보였다. 나는 정말로 장애아의 엄마가 되었다. 아이 키우기는 두 번째지만 장애를 가진 아기는 처음인 초보 장애아 엄마가 되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내 미래일 것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은 그 길이 내 앞에 펼쳐졌다. 바라던 미래는 아니지만, 초보 장애인 엄마의 삶을 살기로 했다. 기왕 택한 일, 나는 아주 열심히 해볼 참이다.



#꿈별맞이 #다운증후군 #다운천사 #기형아검사 #양수검사 #양수과다증 #십이지장폐쇄 #발달장애 #유도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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