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의 유혹

by 새벽달

올해가 특히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작년과 올해에 들어 자꾸 석연치 않은 사고가 생기고 회사에서도 이유없이 안풀리는 일이 많았다. 연애도 늘 그렇듯이 부질없었지만 나이가 들다보니 조바심이 난다.


물욕을 잘 느끼지도 않고 - 어쩌면 식욕, 성욕, 수면욕에 이은 4대 욕구는 물욕 아닐까? -

쓸 돈도 없는 상황에서는 쇼핑으로 스트레스 해소가 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버리는 데서 쾌감을 느낀다.


내가 믿는 어떤 미신 같은 것인데, 부정적 기운을 가진 옛날 물건들(구남친이 사줬다거나..)을 버리면 뭔가 조금이라도 잘 풀릴 것 같은 것이다. 고양이 집사로서 미니멀리스트는 되지 못할 지언정 기분이 안 좋을땐 '아 네놈이 우리 집에 있어서 그랬구나!' 하고 뭐든 버리는 편이다.

사실 제일 안좋은 기운을 풍기고 있는 것은 과거의 내 일기장들인데, 버리자니 기억이 소실되는 것 같고 갖고있자니 찜찜해서 집안 제일 구석에 봉인해둔다.


가만보면 인간이 살면서 왜 이렇게 많은 약을 쌓아두고 사는지, '잠옷'으로 쓴다는 티셔츠는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른다. 왜 낡은 화장실 슬리퍼를 베란다에 둬 놓고 집 안에서 놓던 슬리퍼도 베란다에 둬서 슬리퍼 부자가 되었을까요?


머릿속에 신경 쓸 것은 넘쳐나는데, 앞으로 절대 보지 않을 스페인어책 하나를 버리면 그간 옆눈으로 스칠때마다 마음 속에 느껴왔던 '아 저거 언제 스페인어 다시 해야되는데...'라는 망상이 없어질 수 있다.

진짜 다시 공부할 준비가 되었을때 다시 사면 될 지언정, 이미 10년이 넘은 책을 못버릴 이유가 없다.

더불어, 사물에도 분명 내 마음과 연동되는 유통기한이 있다. 선물 받았는데 비싼 거라 버리지도 못하던 다이슨 청소기가 갑자기 털털 거리고 고장난다든지. 내가 그 물건에 얽힌 기억(또는 추억 또는 미련)을 떨쳐내고 그냥 '사물'로만 생각할때 분명 어떤 우주적 에너지가 작용하는 것이 틀림없다.


멀쩡하고 필요한 물건을 굳이 버릴 필요는 없지만, 자리를 차지하던 뭔가를 버림으로써 난 그냥 내 과거의 짐을, 어떤 꿀꿀함을 집어 던지는 쾌감을 느낀다.

특히 우울함이 극심한 날, 정말 심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좀비 상태에 들어가지만, 그 상태에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마지막 수단으로 정리를(버림을) 한다. 내가 어떻게 되든, 가족이 내 집에 들어와서 이 많은 쓸데없는 짐과 옷들을 한참을 꾸역꾸역 정리하고 수상한(?) 것들을 발견하게 하는 건 참 못할 짓이기 때문이다.

버리면 버릴 수록 나도 가벼워지고, 유사시 그들에게도 짐이 덜어질 것이다.

물론 이런 사고회로가 후자의 경우 정상은 아니지만, 설령 내가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 해도 마찬가지 아닐까.


오늘의 버릴 것: 베란다 슬리퍼, 스페인어책, 구남친이 사다놨던 불닭볶음면, 축의금 보내는 걸 깜빡 잊어서 스트레스만 받고 보관하고 있던 청첩장(축의금 보낼 필요도 없는 것으로 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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