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을 하고 싶었는데, 마침 적당해보이는 회사에 자리가 있었다.
기존 해왔던 일들과 사실상 연장선상에 있었고, 내 경력이 인정될 수도 있었다.
어찌보면 만만한 자리였다.
취업준비를 하면서 서류에 통과한 적이 거의 없었는데, 이번엔 경력이 자기소개를 대신 해주었다.
이게 타이밍이고 운명이구나, 역시 사람이 굶어죽으라는 법이 없지, 항상 무너진 하늘에도 솟아날 구멍이 있지!! 라고 생각하고 그 다음 커리어까지 이미 머릿속은 망상으로 부풀었다.
이건 나를 위한 자리라고만 생각했다. 거만하게도.
1차 시험날,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뭔가 불안하고 잘못될 것 같은 느낌, 실수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배가 아파왔다. 지난 이틀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술을 퍼마셔서 그렇겠지, 하지만 심장은 여지없이 어두운 곳으로 쾅쾅 뛰어나가고 있었다. 불안한 기분에 나갈 준비도 일찌감치 끝내고 여유롭게 음악도 들으면서 집을 나섰는데, 왜인지 자꾸 지하철은 갈아타는 곳마다 오지를 않고, 급기야 약간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빠른 걸음으로 도착했는데 정문에서 눈앞이 까마득해졌다.
내가 도착지점을 정문으로 설정한 것이 문제였다. 실소가 나왔다.
언덕을 올라 여유로운 앞사람들을 따라걷다가 머리통을 쥐어박을 뻔하고, 출입조치는 또 왜이리 시간이 걸리는지. 막 출입증을 받아 엘레베이터를 탔는데 딱 출석 시간이었다. 시험은 10분 뒤였다.
출입조치를 도와달라고 요청하느라 전화했던 인사과에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출석시간이 지나서 시험은 못 보게 되었다고. 그야말로 문 앞에서 열차를 놓쳤던 것 처럼 문 앞에서 시험을 쳐볼 기회마저 잃었다.
최대한 불쌍한 척을 해보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안내문에는 2번 출입구로 들어오라고 했는데, 2번 출입구로 들어가니 1번 출입구로 가라고 해서 건물을 빙 돌아오느라고, 출입조치 줄에서 제가 굽신굽신 양해까지 구해가며 출입증을 받았는데요, 아니 이럴거면 왜 안내를..... 이라고 구구절절 하소연하고 싶었지만 제 시간에 시간맞춰 출석한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 할말이 없었다. 내 부덕함으로 제3자에게 진상짓은 하지 말자.
일단 뛰어다니느라, 조급해서, 그리고 조금은 숙취로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채로 다시 돌아가는 지하철을 탔는데 정말 내가 한심하고, 밉고, 멍청이같고, 바보같았다.
집에 와서 너무 속이 쓰리니까 일단 밥을 먹고 웃기는 유튜브를 보고 청소를 하다보니, 그래 어차피 다운그레이드였어, 어차피 갔어도 시다바리만 했을 거야, 남들도 거기 가봤자 어차피~라고 했잖아, 그래 어쩌면 이게 사필귀정인거야, 굳이 이거 하지 말라는 나의 무의식 속 외침이었던 거야 하늘의 뜻인거야, 라고 자기합리화가 되기 시작했다.
자기애가 없는 사람이 자기합리화가 빠른만큼 자기객관화가 잘되는 것은 삶의 저주가 분명하다.
자기합리화는 이렇게 잘 할 수 있지만, 자기객관화는 내가 잘 하는 영역이 아니라 팩트인 영역이기 때문에 늘 비겁한 자기합리화는 객관적인 못남에 비해 더 초라해지고 찌질해지는 것이다.
자기합리화에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면서도 여우가 신포도 못 따먹는 타령하고 있네, 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면서 더욱 슬퍼지는 것이다. 실패라는 팩트와 자기위로, 자기합리화와 자기객관화는 서로서로 타협이 불가능한 의식의 영역이어서 결국은 이 싸움을 종결하기 위해 술이나 한잔 하고 잠을 청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독, 내 인생 자체가 신 포도를 못따먹은 여우의 하소연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은 것이다.
어차피 사랑받지 못할 사람들, 사랑하면 안될 사람들만 좋아해놓고 기어이 상처받고나서야 그래, 어차피 안될 거였어, 어차피 이래서 안됐어.
성에 차지도 않는 일들을 해오면서 그래 뭐 어쩔 수 없었어, 이게 최선이었어.
내가 끝까지 더 손 뻗어보지 않고서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내 것이 아닌가보지.
나는 현실에 안분자족 하는 사람이 되려고 했나, 더 치열하게 살고 싶었나, 자꾸 내 팔자를 내가 꼬았나, 스스로에 대한 불신으로 내 삶도 인연도 다운그레이드해왔나.
이루지 못한 것들을 신포도라고 말하면서 더 치열하지 못했던, 더 자신감 있지 못했던, 게으른 스스로를 위로해왔나. 날 미워하는 사람은 어차피 미워한다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어차피 그럴 사람이라고, 이루지 못한 것은 어차피 도움이 되지 못할 거였다고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달래며 모든 포도알이 나에겐 신 포도였나. 썩어 떨어진 포도만 주워먹으며 이게 나의 전부라고 생각해왔나.
신 포도송이가 어쩌면 알알이 달콤한 인생이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하며 또 그냥 오늘도 게으른 서울의 밤이 깊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