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질 결심

by 새벽달

한때 1~2년 정도는 시간이 날 때마다 그림을 그렸다.

가볍게 릴스 영상을 보고 수채화를 아주 조그맣게 그리다가, 조금 실력이 나아진 후에는 비싼 펄 물감도 사고, 오일파스텔이랑 아크릴로 넘어가며 슬슬 종이도 퀄리티를 따져가며 꽤 비싼 종이를 사보기도 하고, 캔버스에 그리기까지 이르렀다.


수채화는 물이 마르기 전에 그림을 그려야 해서 짧은 순간에 색깔들을 뿌려놓고 그게 번지면서 어우러져 하나의 장면이 되는 것이 매력적이다. 작게 그리다보면 별로 품도 안들다보니 그림이 쌓여만 가서 그땐 작은 그림들을 직접 코팅기까지 사서 코팅한 후 책갈피랍시고 주변에 선물하고 다녔다. 뭐 어차피 또 그릴 그림이고, 연습삼아 그린 것들인데 결과가 좋으니 버리긴 아깝고, 주거니 받거니 하면 서로 기분도 좋으니까.

직접 그린 그림을 받고 싫은 티를 내는 것도 이상하겠지만, 그래도 별 건 아니지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걸 주는 거니까 좀 더 의미 있었을 것이다.


점점 늘어가는 그림 실력(!)에 사이즈도 커지고, 물감도 비싸지고 부재료값에 약간 그림에 좀 들인 것이 많아지면서 그때부터는 그림을 그냥 막 나눠주는 것이 나도 약간 부담스러워졌다. 아크릴 물감은 특히나 그렇고, 디테일이 점점 늘어나면서 이전 처럼 막 뿌리고 다니기에는 부가가치가 좀 붙었달까.......그리고 주로 그림에 당시의 감정(주로 우울했지만)이나 나의 생각, 그리면서 듣던 음악까지 담기게 되면서 정서적 애착도 생겼다. 이런 그림이 사실 내 진짜야, 내 마음이 이래, 하는 비밀스러운 느낌.


그 뒤로 그림을 스캔해서 엽서처럼 프린트해서 선물하거나, 진짜 선물하고 싶은 사람에게만 캔버스 원본을 주곤 했다. 캔버스에 그린 것은 스캔도 못해서 주고나면 영영 끝이지만, 그만큼의 내 마음을 주는 것이 또 더 의미가 있기도 하고, 상대방도 그정도의 그림을 받으면 내가 들인 정성만큼이나 조금 더 소중히 생각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만큼 쉬이 주지도 않았는데, 개중엔 물론 정말 친했는데 사이가 멀어졌다거나, 주로 헤어졌거나 해서 영영 행방을 모르게 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사실, 엄마 집에 둔 것 빼고는 다 그렇게 되었다.


나조차도 보존 스프레이까지 뿌려서 행여나 햇빛에 색이 변할까 싸구려캔버스 틀이 뒤틀릴까 해서 상자에 차곡차곡 보관하고 있던 아끼는 그림들이었는데, 결국은 어디서 라면박스 치킨박스 사이에 끼워져 버려져 있다고 상상하면 물론 마음이 찢어진다.


한두번도 아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한번 누군가에게 선뜻 그림을 선물해 줄때는(고를 수 있는 특권까지 함께) 나의 어떤 소중한 것을 공유한다는 행복함과 유대감, 그리고 모순적이게도 이 그림의 수명은 그 인연의 끝까지일텐데, 생각하며 내가 아끼던만큼 씁쓸해지는 마음이 교차한다. 소중한 사람에게 더 소중한 그림을 줬는데, 알고보니 서로 그렇게 소중한 인연은 아니었다는 결말이 대부분인 경험치가 쌓이다보니 더욱 씁쓸하다. 그런데도 점점 더 아끼는 그림을 꺼내게 된다.


그림을 보고 날 떠올려줬으면 하는 마음도 크지만, 언제든 그림도 버리고 나도 잊혀질 결심을 단단히 해야 미련없이 내어줄 수 있다. 잊혀져도 그림은 남을지, 그림은 버려도 난 기억할지는 받은 사람의 몫이지만 대부분은 잊혀지게 마련이니까, 내 흔적이 어디서 버려져도 그건 네 손에 맡기겠다는 결심이기도 하다.


그림을 돌려준다는 사람도 없었고, 돌려달라고 한 적도 없었다.

그래도 소중했던(소중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여, 나의 굳은 결심을 조금이라도 떠올려준다면

그 그림이 양념치킨 소스나 덕지덕지 묻혀진 채 어느 동네 분리수거장에서 시퍼런 민낯을 드러내고 있게 하진 말기를, 쉽게 보여준 마음이 아닌 만큼 남들이 보지 않게 잘 덮어주기를..

작가의 이전글여우와 신 포도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