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2001
어느날 집엔 시골에서 올라오신 친할아버지, 할머니와 큰아빠,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당숙들 몇이 와있었다.
한창 아빠가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한다고 엄마와 미친듯이 싸우던 시기였다.
엄마는 수시로 집을 나갔고, 정말 지독하게도 한번 나가면 절대 우리집으로는 전화도 안 걸었기 때문에 대체 어디에 있는지도 짐작이 안 갔다.
엄마가 나가면 난 갓 4-5살이 된 동생이 시도때도 없이 우는 것을 달래다가, 또 같이 울다가 하는 나날이었다.
그날 밤에 내 방에서 문을 잠그고 자던 나는 어른들의 시끄러운 고함 소리에 잠이 깼다. 엄마가 큰소리를 냈고, 큰아빠는 '어디서 이런 여자랑 결혼을 했냐'며 아빠의 뺨을 때렸다. 속에서 또 불덩어리같은 것이 목으로 넘어오는 기분이었지만, 나는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몇 차례 큰소리가 난 뒤 엄마가 엉엉 울며 집을 나갔다. 엄마는 셋째를 임신 중이었고, 거의 만삭이었다. 내가 방을 뛰쳐나가자 엄마는 이미 현관문에 서있었고,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제가 다 참아도, 우리 아버지 욕은 못 참아요!"하고 소리를 질렀다. 난 그때서야 울음을 터뜨리며 엄마 엄마, 가지마(또 가지마) 하고 붙잡았지만 엄마는 그대로 문을 쾅 닫고 나가버리고, 집에는 정적이 깔리고, 나만 또 세상이 떠나가라 울면서 지금 나가면 엄마가 사고를 당하는 것 아니냐, 납치를 당하는 것 아니냐, 하며 세상에서 가장 슬픈 아이가 되었다.
그간의 경험으로 이번에는 엄마가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 더 길 것을 알았고, 감히 우리 사랑하는 외할아버지를 욕했다니, 엄마를 울리다니, 엄마가 또 집에 나가게 하다니, 그 자리에 있는 모든 남자들을 당시 심정으로는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다. 지금이었다면 눈이 뒤집혀서 집안을 개판으로 만들었겠지만, 그때의 나는 어떻게 화를 내야할지도 몰랐다.
큰아빠와 당숙들은 자기 일을 끝냈다는 듯이 집으로 향했고, 나는 할머니가 달래서 겨우 잠에 들었다. 그때 나의 분노는, 아마 엄마의 그것보다 더 컸을 수도 있다. 어린이의 몸에 갇혀 표현이 안된 분노는 울음으로밖에 나올 수 없었고, 그 이후 나는 엄마가 걱정돼서, 분해서, 동생이 울어서, 태연히 있는 아빠와 할아버지가 징글징글해서, 매일 통곡을 했다. 하루는 울다가 할아버지에게 "할아버지때문에 엄마가 나갔잖아요!"하고 소리를 지른 적도 있는데, 그게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분노의 최대치였다. 어른에게 큰소리를 치면 안된다는 주입식 교육을 말 그대로 몸소 맞으며 익혀왔으니까, 욕설도 몰랐으니까.
나중에 알고보니 엄마아빠가 하도 싸우자 우리 외할아버지가 둘을 밖으로 불러 이럴거면 차라리 이혼을 하라고 따끔하게 말씀하셨고, 그 말을 들은 친할아버지가 그 자리에서 "어른이 돼서 어떻게 이혼을 하라마라 하느냐"고 그 형제들 사이에서 엄마에게 대노한 것이다.
감히 외할아버지를 건드리다니, 지금 생각해도 피가 거꾸로 솟는다. 그 보잘것없는 다 쓰러져가는 시골 집구석에서 사는 친할아버지는 멀쩡히 수원에서 어엿하게 더 잘 살고 있는 우리 외가를 '족보도 없는 집안'이라며 무시해왔고, 한량같은 큰아빠와 당숙들은 어떻게든 우리 집안에 빨대를 꽂아먹을까만 생각하는 사기꾼들이었다.
아무튼 중간 일을 생략하고,
다음 명절이 되었다. 지금 분위기였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겠지만, 엄마는 왜인지 그 지겨운 푸세식 화장실을 쓰는 시댁에 다시 찾아갔다. 엄마는 내내 말이 없었고, 화가 난 건지 슬픈 건지 포기를 한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나도 한때 할아버지에게 소리를 질렀던 죄인으로서 엄마의 심기를 살피느라 연실 주눅이 들었다.
왜 흥미로운 일은 다 내가 자고있을 때 벌어졌는가. 또 자고 있는데, 어른들 소리가 들려 슬쩍 문 밖을 내다보았다. 충격적이게도, 엄마 아빠가 할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고 있었다. 이게 무슨 눈을 의심하게 되는 광경인지. 나의 머릿속은 그야말로 대혼란이 되었다. 잘못한 것은 아빠와 친할아버지인데, 엄마에게 모두가 무릎을 꿇어도 모자를 판에 엄마가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빈다고? 엄마는 그냥 참고 참다가 소리 한번 지르고 집을 나가버렸을 뿐이다. 일을 그렇게 만든 건 할아버지와 벌레같은 아빠네 사촌들이다. 친할아버지는 뭐가 잘났다고 용서를 할 수 없다며 뻔뻔하게 굴고 있었다.
못 볼 장면을 본 것 같아서 다시 자리에 누운 나는 심장이 벌렁거리고 혼란스러워 잠을 통 이루지 못했다. 엄마는 그날 밤 차에서 잤다고 했고, 나는 차에서 자는 게 재밌지 않았냐고 물어봤다. 다음날 우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일련의 이 사건들은 엄마에게 얼만큼의 분노와 수치였을지 짐작이 안가지만, 나에게도 역시 그랬다. 정확히 무슨 일들인지 모르는 나에게도 이것들은 생전 처음 겪는 분노와 증오, 역겨움이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 때 감정이 떠올라 다시 돌아가서 그 사람들에게 욕을 퍼붓고 상다리를 엎어버리고 싶다.
그 이후로 난 친할아버지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일가를 엄마보다 더 저주했다. 엄마가 그나마 맘맞는 고모네 등과 함께 만날 때에도 난 항상 경멸에 차있었다. 엄마를 지켜주지 않은 아빠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아빠는 그때부터 내 마음속에서 죽어버린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 엄마를 지켜줬을 텐데, 엄마는 날 내버려두고 갔지만 그때는 이해할 수 있었다. 난 내가 엄마를 위해 싸우지 못해서 내가 미웠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양가적인 감정에 다시 휩쓸려있다.
연휴가 너무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