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 매거진에 하나하나 글을 쓸 때마다 더 울적해지고 외로워진다.
나로서도 어린 시절의 상처를 굳이 파내 글로 쓰다보면 하나하나 그때의 상황과 엄마의 욕설과 고함이 생생히 되살아난다. 한편으로는, 굳이 부모 욕하는 것이 아무리 익명으로 쓰는 글이라도 결국 내 얼굴에 침 뱉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나의 가장 근본적인 불안과 우울함을 어떻게든 치유해보려고 쓰기 시작했다.
내가 기억하지 않으면 내 어린 시절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 되니까.
분명 좋은 순간이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그 순간에도 눈치를 보고 의기소침하고 조마조마하게 살았으니까.
늘 이렇게 써봐야겠다, 쓰면서 나도 흘려보내야겠다, 생각만 해오다가 드디어 실천에 옮기게 된 계기는 얼마 전에 일어난 일이다.
내가 30대에 접어들고나서는 나와 엄마는 어느새 조금은 같은 여자로서, 그리고 성인으로서 유대감이 생기고 어떤 때에는 깊은 이야기도 하고, 가족 걱정도 하고, 보통은 내가 기분을 풀어주는 역할을 하고, 그렇게 몇 년을 지내왔다.
그런데 가끔 내가 '옛날에 나 어릴 때 엄마 이런 적 있었잖아..' 하면 엄마는 자꾸 허풍을 치며 내가 기억하는 시간을 축소하거나 그런 일은 기억이 안 난다고, 그런 적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큰삼촌에게 물어봐라, 진실 공방을 해야겠다, 하면서 그냥 웃어 넘기기를 2~3년간 해왔다. 그런데 최근 몇달 전 퇴사를 고민하던 내가 엄마에게 옛날에 이랬는데, 저랬는데 하다가 몇가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엄마는 정말로,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엄마가 나 한번 때리기 시작하면 몇시간씩 욕하고 때렸잖아' 해도
'내가 미친 사람도 아니고 무슨 너를 왜 몇시간씩 때리니?' 하는 것이다.
엄마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순간 내 머릿속도 충격과 분노로 하얘졌다.
'진짜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고? 엄마 그때 유아용 씽크빅 의자로 내 친구 앞에서 날 그렇게 때렸는데 그것도 기억이 안 난다고? 아니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 나랑 장난하는 거야? 아니 난, 솔직히 내가 지금 이렇게 우울하고 이렇게 된 것도 그 때부터 시작됐다고 생각해. 근데 기억이 안 난다고? 엄마가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되지!!!'
'어머 난 정말..정말 모르겠다. 엄마 지금 너무 충격받았어. 나는...어머...끊을게...'
????????
그야말로 이제 눈에 뵈는 게 없는 나는 동생들에게 지원사격을 요청했다. 동생들은 가족 단톡방에서 '난 어렸을 때지만 엄마가 언니 때리던 건 다 기억이 난다', '엄만 기억 안 난다고 할 게 아니라 언니한테 사과해야돼', '내가 가족 상담 받아보자고 했잖아' 등등 나름대로 소신 발언을 했고,
그 와중에 아빠는 나름 옆에서 엄마 편을 드는 것인지 '사랑으로 키운 것으로 안다. 무슨 소리니', '일기장이 있다' 이런 도움 안되는 뻘소리를 보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죽는 게 보고 싶지? 하면서 가족 단톡을 나가버렸다.
엄마는 뒤늦게, '기억이 안 나서 미안해, 항상 자랑스러운 딸이었는데, 너무 속상하고 미안해. 엄마가 요새 몸도 안 좋고..똑똑한 네가 이해 좀 해줘' 라고 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걸 보고 얼마나 눈물이 났는지. 술도 안 마신 날 나는 혼자 베개에 입을 막고 소리를 지르고 울었다. 언제부터 항상 자랑스러운 딸이었을까. 그나마 그렇게 맞고 자라면서 세 자매 중 가장 잘 풀린 건 나였다. 그래서 엄마가 불쌍했다. 그리고 허탈했다. 엄마가 기억하지 않으면 누가 기억을 하나. 마음 속 어떤 부분이 물에 검은 잉크를 떨어뜨린 것처럼 답답한 회색으로 번져갔다. 나이 터울 많은 내 동생들이 기억하는 것은 정말 일부에 불과한데, 이건 나만의 기억이었고, 나만 고통받고, 나만 삭이고 있었던가.
가해자가 기억하지 못하는 십여년의 시간이 그럼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 혼자 기억하고 미워해오다가 누그러진 것이라면 그동안 나는 엄마 삶에선 얼마나 불효녀였는가.
난 이렇게 애정결핍인데. 그래서 그간 얼마나 잘못된 만남과 연애들이 있었는데. 난 남들 눈빛 시선 말투 모든 것에 곤충마냥 예민해서 마음에 생채기가 나고도 모른 척 해오는데. 조마조마하느니 그냥 맞을 때 마음이 오히려 편해서 난 내 몸에 상처를 내는 버릇이 생겼는데. 남들이 결국 남는 건 가족밖에 없더라고 말할 때 나는 항상 마음 둘 곳 하나 없어서 그게 너무나도 슬펐는데. 내가 너무 힘들다고, 돈도 없고 난 공부가 하고 싶은데 시간만 낭비하고 있다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너무 피곤하다고, 내 단짝친구가 목을 매고 죽어서 나도 죽고싶다고, 여기서 내가 주말 내내 벽만 보고 있다고, 나도 천만번은 말하고 싶은 것들을 나 혼자 잘 지내는 척 하면서 천만번을 혼자 울었는데.
항상 자랑스러운 딸이었다고. 엄만 나를 사랑한다고.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엄마도 선택적 기억상실 같은건지, 온갖 증상을 검색해보면서 울고 또 울었다. 이건 불공평했다. 나는 엄마를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용서하려고 사랑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런데 이제와서. 벌써 망가질대로 망가진 나에게. 항상 자랑스러웠다고.
그래서 기록하기 시작했다. 나마저 잊어버리고나면 나의 유년시절은 그 무엇하나 남은 것 없이 그저 진공 상태가 될 것이고 어느 날 나는 어디서부터 문제였는지 고민하다가 결국 답을 찾지 못하고 어딘가에 머리를 쳐박아버릴 것만 같아서.
똥같은 글이라도 써내야 나의 부정당한 어린 시절이, 잊혀진 시간이 의미 있을 것 같아서.
쓸 수록 너무 힘들다. 엄마에게 항상 자랑스러운 딸이 사실은 아니었어서 슬프다. 난 어디에도 완벽히 소속되 본 적이 없고 한 번도 온전히 사랑하고 사랑받아 본 적도 없고, 가족은 나에게 그간 어떤 위로도 되지 않았고, 가난하고 외롭던 시절에 불법과 합법 사이에서 겨우 외줄타기를 할 때 내 손을 잡아주는 건 가족이 아니었는데.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삶과, 엄마가 기억하는 나의 삶과, 내가 기억하는 나의 삶과 엄마가 기억하는 엄마의 삶 그 중의 교집합이 그저 가끔 자랑스운 딸이었다면 엄마는 그렇게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의 기억은 내 몫일 것이고, 그걸 안고 살아나가야 하는 것도 나의 몫일 것이다.
어쩌면 엄마는 그냥 행복한 기억만 갖고 사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