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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rfaitement imparfaite Oct 05. 2020

삐진 할아버지와 베이비슈

할아버지가 단단히 삐졌다.


이전 글(내겐 할자친구가 있다!)에서 밝혔듯, 우리 할아버지는 내게 평일엔 1번, 주말엔 최소 2번씩 전화를 한다. 안 받으면 받을 때까지 한다...막상 받으면 별 내용도 없는 짧은 통화지만, 솔직히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특히 항상 퇴근하고 집에 와서 정신없이 집을 치우고 딱 밥을 먹으려고 분주하게 준비하다보면 꼭 그때 전화가 오는 통에, 지치고 배고파서 예민한 손녀는 가끔 조용히 전원버튼을 눌러 벨소리를 무음화 시키고 요리에 열중하는 쪽을 택한다. 그러면 어차피 조금 뒤에 밥을 먹고나면 다시 전화가 온다.


이번 긴 연휴 동안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추석 전날 외갓댁에 가서 뵙고 왔는데, 그날만 해도 아침부터 언제쯤 오냐, 어디쯤 오냐 해가며 몇번씩이나 전화를 걸어 닦달하길래 "알아서 1시까지 갈게요~~"하고 짜증을 낸 터였다.


그 이후로도 남은 연휴 동안 할아버지는 하루 최소 2번은 전화를 걸었는데, 공교롭게도 왜 항상 전화벨은 밥을 차려놓고 한 수저 뜨려고 할 때나 영화를 한창 재밌게 보고있을 때 울리는 것인가. 그래서 받으면 또 당신 심심해 죽겠다는 이야기 뿐이다. 나도 슬슬 짜증이 쌓이던 차였다.


그러다가 그저께 아침에 씻고 나왔는데 부재중 전화가 할아버지에게 3통이나 와있는 것이다. 그 순간 짜증이 폭발했다. 아니 안 받으면 그냥 그런가보다 할 일이지, 만약 내가 자고있었으면 깨울때까지 전화를 할 요량이었단 말인가!!이 시간에 내가 뭐 납치라도 당했을까봐?


열받은 상태로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늦잠 잤나보지??라고 하시길래 갑자기 또 욱 하는 마음에 "아니 안받으면 안 받는거지 왜 전화를 3번이나 하고 그러시는거에요?"하고 쏘아붙이고 말았던 것이다.


그나마 전화를 제일 꼬박꼬박 잘 받아주던 큰손녀딸의 예기치 못한 짜증에 할아버지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알았다. 쉬어라."하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 기운빠진 풀 죽은 대답을 듣는 순간 아차 싶었는데, 그 뒤로 할아버지는 이틀째 나에게 전화를 하지 않고있다. 나도 언제 전화하시나 두고보려고 아직까진 먼저 연락하진 않고 있지만, 만으로 이틀이 지나자 이젠 슬슬 걱정이 되는 것이다.


좀 오바이긴 하지만 내가 할아버지 전화를 그나마 열심히 받는 이유 중 하나는, 할아버지가 그 연세면 언제든 주무시다가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자주 뵙지도 못하는데 언제가 마지막 통화가 될지 모르는게 인생이란 생각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전화를 내가 귀찮아서 받지 않았더라면?' 이런 두려움에 항상 울리는 핸드폰을 노려보다가 아 귀찮아, 하면서도 통화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는 것이다.


또, 스마트폰도 없고 건강한 친구들도 없는 할아버지의 하루가 얼마나 길고 무료할지 생각해보면 안쓰럽기도 하다. 딱히 할 말은 없지만 그냥 누군가와 대화도 하고싶고, 손녀가 보고싶기도 해서 목소리라도 들으려고 일부러 퇴근 시간에 맞추어 전화하는 것이 애틋하기도 하고.


'하지만 이렇게 받을 때까지 계속 전화해대는 건, 심하긴 하잖아!!'하면서 지금 "난 한마디 할 법도 했다"며 자기합리화를 하는 중이다.

아까는 할아버지께 먼저 전화를 한번 해볼까 하다가 나도 딱히 할말이 없을 것 같아서 그냥 내일도 전화가 안 오면 슬 내가 먼저 해야겠다 생각하던 중이었다.


사실 나도 계속 신경이 쓰여서 마음이 불편한 것이다.


내가 어릴 때, 할아버지는 수원 외갓댁에서 용인에 있는 우리집에 놀러오셔서 초등학교에서 돌아오는 날 기다리고 계셨다. 내가 오면 꼭 내 손을 잡고 동네 빵집에 가서 간식거리를 사주셨는데, 꼭 베이비슈 아니면 동그랗게 생긴 미니찹쌀도넛이 우리의 선택이었다. 어린이가 먹을법하게 작고 귀여운 빵들이었기 때문일까.


비닐봉투에 담긴 베이비슈를 달랑달랑 들고 한개씩 먹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정말이지 달콤하고 따뜻했다. 할아버지는 내 동생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도 교문 앞에 마중나가 있다가 아이스크림 같은 걸 사주시곤 했다.


그러고보면 할아버지는 늘 우리를 보려고 기다리고 계셨다. 열심히 버스를 타고 큰딸(우리엄마) 집에 와서 시간을 죽이며 이제나저제나 학교 수업 끝나는 시간만 기다리고있다가 일찌감치 슬슬 걸어나와 손녀딸을 교문 앞에서 기다리셨을 할아버지의 하루 일과가 눈에 선하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손녀딸 손을 잡고 간식을 사러가는 그 시간이 할아버지에게도 하루 중 제일 신나고 보람찼을 것이다.

 


지금은 서울에 나와산지 오래되어 얼굴 보기도 힘든 큰손녀 퇴근 시간만 기다리고 있다가 적당한 귀가 시간에 맞추어(당신이 생각하시기에) 7시쯤 되면 어김없이 전화를 하시는 것이, 할아버지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참 한결같구나 싶다. 하루 종일 수다 떨 사람도 없이 그 시간만 되면 그래도 전화를 꼬박꼬박 받는 내게 전화 하시는게 또 낙이실텐데, 내가 그걸 깨버렸다니!!!ㅠㅠ


앞으로 나한테 전화하실때마다 눈치를 보는 건 아닐런지, 혹시라도 이렇게 며칠 동안 나는 전화가 오지않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가 아주 만약에 할아버지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다면, 평생 나를 기다려준 할아버지에게 내가 한 마지막 말이 고작 "아니 전화를 안받으면 안받는거지 왜 3번씩이나 전화를 하고 그래요"라면 난 진짜 죽어버리고 싶을 거다.


생각이 이렇게까지 이르자 할아버지에게 당장 전화를 걸어 아무렇지 않게 아무 말이라도 하고싶어졌지만, 이미 자정이 거의 다 되었다.


지금 코로나때문에 내가 격일 재택근무를 하고있다는 사실을 할아버지는 알지 못하시지만,(왜냐면 알면 격일로 스케줄을 확인해가며 2번씩 전화를 해댈게 분명하니까 숨겼다.ㅋㅋ) 내일 낮에는 전화를 해봐야겠다.


괜히 쑥스러운 말은 생략하고, 추석 기념으로 전자렌지나 하나 사드린다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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