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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솜사탕 Oct 21. 2023

"그리움이 닿는 곳에", "눈을 맞춰", "같이 가요"

덕질이란 뭘까.


20년째 꾸준히 누군가를 덕질해오면서 나도 이 행위를 뭐라고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렵다.


누군가는 이 열정적인 감정을 걔네가 알아주긴 하냐며 비웃고, 누군가는 철없는 한 때의 취미라 여기고, 누군가는 '너희 부모님한테나 그렇게 해봐라'며 빠순이의 죄책감을 건드리기도 하는 이 행위. 나는 왜 이걸 계속 해올까? 본진들이 내 감정을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 없으며, 철없는 한 때의 취미가 아닌 인생의 꽤 많은 기억 조각을 남긴 굵직한 취향으로 자리잡아 버렸으며,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부모님껜 좀 더 효도를 하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덕질을 하는 내 주변 사람들(적게는 20대 후반에서, 많게는 30대 후반까지)은 '아직도 철이 덜 들었다'고 인정한다. 오타쿠들은 사실 생각보다 자기객관화를 무지 잘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철이 덜 들었으니 이젠 철이 들어야겠다, 라고 생각하기보단 오히려 자신의 인생 동력으로 삼아 내달리고 있다. 그리고 인정한다. 덕질, 누구한테 인정받자고 하는 것도 아니고, 뭘 얻자고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결국 다 나 좋자고 하는 덕질이다.




'그리운 건 그때 그 사람일까, 그때일까' 류의 감성 문구가 생각난다. 썩 좋아하는 말은 아니지만 이 말이 덕질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 같기는 하다. 누군가를 열렬하게 좋아하는 마음으로 가득 채우며 살아가던 시절의 기억은, 생각보다도 더 한 사람의 인생에서 소중한 챕터로 자리잡아 있다.


이 에세이를 밀리의 서재와 브런치 두 곳에 연재하면서, '글을 읽다보니 연예인을 좋아하던 그때 그 시절의 제가 떠올랐어요'라는 감사한 댓글을 받았다. 나 역시 그랬다. 이 글을 쓰면서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하나씩 풀어가는 동시에, 그 시절에 내가 어떤 마음으로 지냈고 어떤 사람들과 어떻게 부대꼈는지 생각났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친구가 되고, 시간을 함께 썼다. 덕질이 아니었다면 해보지 않았을 법한 도전을 해볼 수도 있었다. 물론 덕질을 하지 않았더라도 무언가를 하면서 새로운 기억을 쌓아올리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좋아하면서 달려갔던 기억과는 그 결이 사뭇 달랐을 거란 생각이 든다.


살면서 인생이 항상 즐겁기만 하진 않을 것이다. 항상 덕질을 하던 순간처럼 에너지 가득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럴 때, 나는 떠올리면서 다시 한번 재밌어 할 순간들이 정말 많다. 내 인생의 어떤 순간들은 정말로 덕질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추억할 것이 많다는 것, 기억에 남아있는 장면이 많다는 것은 확실히 축복아닐까. 나는 항상 종종 이야기하곤 한다. 무언가에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것보다, 무언가를 좋아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훨씬 낫다고.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경험은 그 자체로 사람을 움직이게 만든다. 하나라도 더 찾아보고, 하나라도 더 파헤치게 하고, 한 발짝이라도 더 가깝게 가게 만드는 에너지를 어디선가 끌어올린다.


덕질은 정확하게 이 모든 것에 부합하는 행위다. 이 멤버가, 이 그룹이, 이 노래가, 이 무대가 궁금해서 계속해서 파헤치면서 그러다 취향의 끝판왕을 만나버린다. 이 취향의 황홀함을 곱씹는 과정에서 덕후들은 대단하고, 멋있고, 기특하고, 감탄스럽고, 결국엔 벅차올라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몰려 다닌다.


그리고 내 경험상, 이런 덕질은 무미건조할 수 있는 일상에 굉장한 활력을 준다. 집-회사-집-회사를 반복하는 어쩔 수 없는 수많은 K-어른들의 무미건조한 일상에 온갖 맛이 나는 향신료를 정신 없이 뿌려주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갑자기 내 의지를 탁탁 꺾어버리는 이 거지같은 세상 속에서도 뭔가 '좋아하는 감정'만으로 다 이겨버릴 수 있을 것만 같은 에너지가 생겨난다.




덕질에 대한 이야기를 풀면서, 나 역시 나의 좋아하는 마음과 이 마음이 향하는 대상들을 몇 번이고 깊게 생각할 수 있어 무척 기뻤다. 이 마음을 함께할 친구들을 인생에서 적지 않게 만났다는 사실도 무척이나 감사하게 느껴졌다. 내 인생의 몇 가지 이야기를 '덕질'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풀어낼 수 있을 만큼 수많은 기억들이 쌓여 있다. 결국은 나 좋자고 하는 덕질, 진짜로 나는 좋은 순간들이 많았고 앞으로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이 경험치로, 인생의 거지같은 순간에서 너무 오래 좌절하지 말고 조금은 더 유쾌하게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도 생긴다.


내 주변에 많은 덕후들이 이 글을 재미있게 읽어주며 개인적인 소감을 남겨줬다. '우리는 그냥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나봐', 남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는 오랜 아이돌 빠순이 길을 걸어온 친구들이 이야기했다. 한 덕후 지인은 '프듀2 이후로 갓반인 지망생이었던 내가, 어쩌다 보이즈플래닛을 봐서...'라는 DM을 보냈다. 나도 정말이지 내 덕후 인생이 쉽게 끝날 것 같지가 않다. 급기야는 활자돌도 파고 있고, 그 그룹 안에서 최애까지 있다('데뷔 못하면 죽는 병 걸림'이라는, 처음에 제목을 접할 때는 웹소설 특유의 서술형 제목에 정신이 아득했으나, 지금은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제목을 달고 있는 금세기 최고의 아이돌물 웹소설....에 나오는 테스타다).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덕후 인생, 사실 나는 기대도 된다. 무언가를 흐뭇하게 추억할 것도 많고, 힘든 순간 떠올리며 정신승리할 것도 많고, 무엇보다 재미있고 풍성하게 살아갈 앞으로의 또다른 내 덕후 인생이 기대된다. 이 덕후 인생의 길에, 여전히 우리는 너의 편이라고 외쳐주는, 언제든 우리가 부르면 돌아올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나의 아이돌들이 있다는 게 든든하다.




덕질을 주제로 한 이 글의 제목을 어떻게 써야 할까 고민이 되었다. 그러다, '덕질의 위대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마지막 글에, 내가 생각하는 덕질의 지향점을 표현하려면 결국 원점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노래를 다 좋아하지만 어쨋든 내가 각 본진 그룹에서도 특히 좋아하는 곡의 가사를 감히 내 덕질 에세이 마지막 제목에 써먹고 싶었다.


내가 정말 열정적으로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했던 그 때의 너희들과 나, 그 "그리움이 닿는 곳에",

서로가 서로를 위해 존재한다고, 서로를 자랑스럽게 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서로 "눈을 맞춰",

나이 한살 한살 먹을수록 인생 난이도가 점차 올라가는, 때로는 거지같기도 한 이 세상을 "같이 가요"라고 말하는


나의 소중한 아이돌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너는 어디쯤에 있을까 어떻게 지낼까, 나의 그리움이 닿는 곳엔 있을까. 어쩌면 너도 어쩌면 나와 같은 바램들로 그리워할까." - 인피니트 '그리움이 닿는 곳에'
"모르죠 사랑이 영원한 거라면, 다시 난 너에게 갈수만 있다면. 그 순간이 기회를 줘 나에게 온 거야. 다시 눈을 맞춰 노래해." - god '눈을 맞춰'
"내 뜻대로 안 되는 하루하루가 안개처럼 흐릿하지만 수많은 길이 내 앞에 있어. 세상이 반대로 돌아가더라도 우린 절대 길을 잃지 않고 똑바로 걸어갈 거예요. 같이 가요" - 세븐틴 '같이 가요'




지금까지 tmi 난무한 이 요란한 글을 읽어주셔서, 공감해주셔서, 공감은 안 되지만 이런 세계도 있구나 이해해보려 노력해주셔서, 혹은 그냥 지나치더라도 이런 것 또한 누군가에게는 소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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