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장면 하나.
아이돌 덕후들 사이에서 소소하게 감동이라고 돌아다닌 영상이 하나 있다. 세븐틴의 리더 에스쿱스가 팬싸인회에서 한 팬에게 한 말이다.
"아이돌 좋아하는 게 쉽지가 않지? 우리가 더 잘할게."
이 아이는 실제로 매 콘서트 엔딩멘트마다 '부정적인 시선(아마도 아이돌 덕질에 대한 세간의 잡스러운 편견이 담긴 시선을 의미하는 말일 거다) 바꿀 수 있도록 우리가 더 노력하겠다'는 류의 말을 한다.
또다른 장면 하나.
평소처럼 회사에 앉아 죽도록 하기 싫은 일을 해야 미루고 미루다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지점까지 와버린 나와, 큰 결심을 품고 유학을 갔지만 역시나 하기싫은 과제를 미루고 미루다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지점까지 와버린 내 친구가 서로 카톡을 나눈다. 서로 하기 싫은 일을 어찌저찌 해내자는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명이 이런 말을 내뱉는다.
"오후엔 진짜 이거 다 하고, 개운한 마음으로 놀자. 세븐틴에게 자랑스러운 누나가 되어야지."
놀랍게도 그 말을 하면서 둘 다 하기 싫은 일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난 다시 속으로 되뇌인다. 그래, 이까짓걸로 더이상 징징거릴 순 없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세상, 너희에게 부끄러운 누나가 될 수는 없어.
아이돌과 팬의 관계는 무엇일까? 내가 뭐라고, 이걸 하나로 정의내리긴 어렵다. 하지만 누군가 이 질문을 나에게 한다면, 나는 이 두 장면을 묘사할 것 같다.
하기 싫은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아이돌과 아이돌 덕질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다.
아이돌은 때로 주체적이지 못한, 자본에 의해 기획되고 조작되어진 무언가로 여겨진다. 그 기획의 타깃은 대체로 어리거나 젊은 여성들이다. '철없는 어린 여자애들이 좋아하도록 자본으로 기획된 상품', 아이돌에 대한 편견은 아마도 여기서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나는 이 문장 하나하나에는 한국사회의 지긋지긋한 고정관념과 가스라이팅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때로 누군가에게 '아이돌 덕질'이라는 개념 자체가 하나의 그럴 수도 있는 취향과 취미가 아닌, '계도의 대상'처럼 다뤄지는 이유가 여기 어딘가에서 비롯될 것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사실 굉장히 화가 나는데, 이 화를 담아서 하나하나 뜯어 보겠다.
철없는 어린 여자애들: 안타깝게도 이 사회는 대체로 젊은 여성들이 좋아하는 것들은 다 피상적이거나, 사치스럽거나, 실속없는 허영에 가까운 것들로 쉽게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어린' '여자'들의 취향을 후려치기하는 이 분위기에 대해서는 더 설명하기도 귀찮다.
자본으로 기획된: 돈으로 다 만들어진 것이란 뜻인데, 죄송한데 그게 뭐가 나쁜지 모르겠다. 대체로 아이돌, 또는 케이팝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제대로 '기획된' 음악과 비주얼과 컨셉을 감상하는 것을 대놓고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거기에 자본이 들어간다면? 제대로 들어간 자본의 맛, 짜릿해요.
상품: 대중문화의 모든 것은 결국 상품이다. 어떤 고매한 순수예술에 대한 취향이 아니라면 가치가 낮다거나, 혹은 아예 무가치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과는 할 말이 없다.
아이돌 말고, 그 아이돌을 좋아하는 '팬덤'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도 있다. 극성스럽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그 극성스러움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면(피해를 주는 순간 그건 팬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마음을 좀 극성스럽게 표현한다고 뭐가 어떻단 말이지? 나 스스로가 매사에 무덤덤하게 사는 것보다, 극성스럽고 유난스럽게 사는 게 좀 더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너무 좋아하는 마음을 참지 못해 열정적으로 사는 걸, 누군가는 '극성스럽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게다가 무엇보다, 모든 아이돌 팬들이 극성스럽지 않다. 사실 상당수의 아이돌 팬들은 이런 편견이 본인에게 적용되는 것이 싫거나, 그냥 그 자체가 지긋지긋하고 진절머리나서 일반인인척 '일코'를 하고 살아가고 있다. 적당하게 좋아하는 상태를 즐기는 팬과 덕후도 많다. 사람마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감정의 정도와 그 정도를 표현하는 방법은 제각각인데, 유독 '강하게 표현하는 사람들'이 눈에 잘 띄일 뿐이다.
이 모든 건 그냥 내 생각일뿐이고, 실제로 이 사회의 적지 않은 사람들은 아이돌과 아이돌 덕질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 글은 내 생각을 쓰는 공간이다. 나는 이런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시야가 좁은데 심지어 무례하기까지 한 사람으로 느껴지고, 그 편견의 이유 하나하나가 잡스럽게 보인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남들은 어떻게 사는지 비교하고 전전긍긍하며 매사에 시큰둥하기보다,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며 하루하루를 더 재미있게 사는 나같은 덕후가 더 행복하지 않을까? 사실 난 이런 편견어린 사람들이 '좋아하는 마음'의 힘을 모르는 것 같아 약간 불쌍하기도 하다.
실제로 나는 일코를 하지 않는다. 20년 넘게 덕질을 해오며 굳이 따지면 '극성'의 편에 좀 더 가까웠을 것이며,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열렬하게 좋아한다는 사실을 늘 드러냈다.
일코하지 않는 데에는 당연히 나라는 사람의 특수성이 반영되어 있긴 하다. 최근에 생활기록부를 보는 게 유행이라고 하길래 나도 생기부를 열어봤는데, 학창시절 내내 쾌활하고 적극적인 학생이란 표현이 따라다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애초에 본인이 좋아하거나 재밌다고 느끼는 것에 대해서는 앞뒤 안가리고 풀로 즐겨야 만족하는 성격으로 꽤나 오랜 세월을 살아온 것이 정부24 어플에 기록되어 있었다. 겁이 없는 편이고, '나'를 표현하는 데 거리낌도 없는 편 같고(이런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이를 잘 증명한다고 본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내 알바냐~ 내가 재밌으면/좋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다. 이렇게 살아온 내가 덕질이라고 적극적이지 않을리가 없다. 내가 이토록 적극적으로 하는데 이를 숨기기란 쉽지 않다. 애초에 나란 인간이 그렇게 치밀하진 못하다. 무엇보다, 왜 그래야 하는데?
'일코할 이유가 없다는 것'. 나는 주변인들에게 종종 말하곤 한다. '난 일코 안해'. 나는 일코할 이유를 느끼지 못한다. 10대를 지나 20대를 거쳐 30대 여성 덕후로 살아가는 나로서는, 여기에는 약간 나름의 덕질 철학까지 덧붙여지게 된다.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게 뭐가 부끄러운 일이냐!
물론 내 주변의 친애하는 많은 덕후들은 일코를 하기도, 안 하기도 한다. 일코를 하는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면 대충 세 가지로 나뉜다. 애초에 나 자신에 대해 그렇게 드러내는 걸 좋아하지 않거나, 주변의 깔보는 시선이 싫거나(특히 사회인이 되었으므로 더더욱), 그런건 다 상관없는데 혹시 내가 좋아하는 이 아이돌이 먼훗날 사회면에 등장하게 되어 나 스스로가 쪽팔리게 될까봐.
마지막 이유는 수긍이 간다. 이건 뭐 그 누구도 어떻게 미리 알 수 없는 문제이니 그냥 각각의 느낌대로 가는거다. 난 아직 이 당사자(?)가 되어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영원히 그럴 일이 없길 바란다. 첫 번째 이유도 수긍이 간다. 이건 그냥 본인 성향이므로 '그렇구만' 말고는 할 말이 없다. 그냥 나랑 다른 성향일 뿐이다.
내가 못 넘어가겠는 건 두번째다. 두 번째 이유로 일코를 하고 있다는 내 덕후 지인들을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게 아니다. 그들의 마음을 이해한다. 그들이 '좋아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지게 만드는 이 사회 어딘가의 분위기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이돌을 좋아하는 게 뭐가 어때서? 오타쿠같으면 뭐가 어떤데? 나 철없이 뇌빼놓고 '오빠' 거리는 정신없는 애 아닌데?(나에게 '합법적 오빠'인 아이들이 거의 없다는 건 논외로 하자) 나 인생 되게 괜찮게 잘 살고 있고, 크고 작은 성취도 많았고, 무엇보다 인생 재밌게 살고 있는데, 그저 내 취향이 아이돌 보는 것일 뿐인데? 도대체 왜 이 잡스러운 편견 때문에 이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거지?
그래서 나는 일코를 하지 않으면서, 내 인생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하게 됐다. 그동안 인생을 열심히 살지 않아서가 아니다(나 되게 열심히 살았고, 괜찮게 살고 있다). 저 등신같은 편견이 지긋지긋해서, 그리고 저 편견을 의식하는 우리 애들에게 당당한 팬이 되고 싶어서다. 혹자가 무시하는 아이돌 빠순이, 사실 인생에서 굉장히 괜찮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혹시 나중에 어떤 일로 내가 우리 애들을 마주하게 된다면, 인생 꽤나 멋있게 살고 있는 사람이 너희의 팬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내가 자랑스러워 하는 대상에게, 나 역시 자랑스러운 팬이 되고 싶었다. '인생 열심히 살자'는 결심이, 이렇게 생기기도 한다.
재미있게도 이 편견은 세븐틴에게도 역으로 어떤 원동력을 준 듯 하다. 에스쿱스가 '아이돌 좋아하는 거 힘들지? 우리가 더 노력할게'라고 말한 뒤안에는, '그런 편견이 편견에 불과하다는 걸 우리가 증명할게'라는 말이 숨어 있다. 그래서 이 아이들은 정말 열심히 연습하고, 작업하고, 자기관리하고, 고민하고, 소통하고,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어떤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것이 누군가의 비웃음거리가 되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취향으로 존중받을 수 있도록 하고 싶다는 의지를 계속해서 표현해주고, 결국엔 실현해준다. 세븐틴 말고도 수많은 아이돌들이 팬에게 하는 말, "여러분을 자랑스럽게 할게요"의 행간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이 의미를 이해하는 아이돌과 팬은 '서로를 자랑스럽게 하기 위해' 열심과 정성을 다한다.
"너희를 위해 더 잘할게. 너희를 자랑스럽게 하기 위해 더 열심히 살게."
이 말은 팬이 하는 말일까, 아이돌이 하는 말일까? 확실한 건 나는 이 말을 들어도 봤고, 직접 해본 적도 있다는 것이다. 서로를 기어코 자랑스럽게 만들겠다는 이 희한한 관계 속에서, 양쪽 그 어디에 있든 우리는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간다.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인생을 앞으로 제대로 굴러가게 하는 원동력은 아마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에서, 그 사랑의 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오늘도 아이돌 덕후를 빠순이라고 비웃는 사람들이 있거나 말거나, 그 시선을 가볍게 무시하고 나는 일코 따위 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것도 제대로, 꽤나 괜찮게 살아간다. 좋아하는 마음을 발판 삼아, 매일을 더 재미있게 살겠다는 결심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다보니 다시금 벅차오르는 순간들이 생겨난다. 덕후의 행복한 쳇바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