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 시간과 정신의 방, 메세타 평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향하는 여러 갈래의 순례길 중 가장 많은 사람이 선택하는 프랑스길에는 ‘시간과 정신의 방’이라고 불리는 구간이 있다. <드래곤볼>에서 기원했다는 이 기이한 공간은 짧은 시간 동안 압축적으로 많은 수련을 할 수 있는 장소라고 알려져 있다. 이 방에서 보낸 1년은 고작 바깥 세계의 하루에 불과하다는데, 그처럼 순례길에도 시간이 아주 더디게 흐르는 구간이 있다. 바로 끝없는 밀밭이 계속되는 고원지대인 메세타 평원이다. 스페인 국토의 3/4을 차지하는 이 거대한 구간 중 순례자들이 걷는 거리는 약 180km. 보통 부르고스(Burgos)에서 레온(Leon)까지를 메세타 평원 구간이라고 칭한다.
메세타 평원에 대한 포털사이트의 AI 설명은 이렇다. 하늘과 맞닿은 듯한 평원과 탁 트인 시야, 바람에 일렁이는 밀밭이 인상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맞는 말이다. 나는 메세타 평원 구간 이전에 드넓게 펼쳐진 황금빛 밀밭을 마주한 날, 처음으로 ‘걷길 잘 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메세타 평원엔 이 멋진 풍경이 끝없이 펼쳐질진대, 왜 수련을 방불케 하는, 견뎌야 하는 길로 알려진 걸까.
AI의 설명을 또 한 번 빌리면 그 이유는 이렇다. 여름에는 그늘 없이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고, 나무가 거의 없어 쉬어갈 곳이 부족하다. 그래서 메세타 평원 구간을 건너뛰는 순례자도 많다고 들었다. 체력적으로 힘이 드는데 지루하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도 부르고스 이전까지 길 위에서, 마을에서 만나 인사와 안부를 주고받던 순례자들 몇을 메세타 평원 구간 진입 이후 다시는 만나지 못하기도 했다. 이 구간을 절반 정도 지날 즈음이 프랑스길 전체 779km의 딱 중간 지점이기도 한데, 이 구간에서 만난 순례자들 중엔 대중교통을 이용해 마을 한두 개 정도를 건너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사실 나는 메세타 평원 구간에 들어선 지 이틀째 정도까지도 내가 그 악명 높은 구간을 걷는지 알지 못했다. 첫 이틀 정도는 내가 감탄했던 비현실적일 만큼 드넓은 황금빛 밀밭을 감상할 수 있었고, 마을과 마을 사이 거리가 좀 있을뿐 이미 지나온 길과 특별히 다르다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어질 메세타 평원 구간이 아주 지루하다더라는 순례자들의 염려를 들은 후에야 나는 내가 메세타 평원 구간에 들어섰음을, 그리고 지난 이틀이 평탄했으니 왠지 나는 앞으로도 별 불평 없이 걸을 수 있을 거라는 ’근자감‘까지 갖게 됐다. 게다가 ’평원‘이라니, 산과 언덕을 타며 호흡이 달리는 것보단 평지를 걷는 게 훨씬 수월할 텐데, 난 햇볕 받는 것도 좋아하니까 오히려 나한텐 개꿀일 수도 있잖아!
그런 생각을 한지 또 이틀이나 지났으려나. 나는 내게 메세타 평원이 개꿀이 될 수 없다는 걸 철저히 깨달았다. 일단, 평원이라지만 평지만 걷는 게 아니다. 언덕이 많다. 순례길에서 오르막과 내리막은 피할 수 없이 계속되니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둘째, 쉴 만한 공간이 없다. 물론 흙길에 철퍼덕 앉아 쉬려면 그럴 수 있지만 정말로 그늘 아래 벤치 하나가 간절해진다. 셋째, 그러면 카페에서 쉬었다 가면 되잖아? 최소 5km마다 카페가 있다며!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여긴 달랐다. 사람들이 하나 같이 입을 모아 힘들다고 말하는 덴 이유가 있다. 이게 바로 오랫동안 형성한 빅데이터 아니겠는가.
매일 아침, 나는 공복으로 길을 나섰다. 스페인의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식사를 하다 보니 오후 8시는 되어야 밥을 먹을 수 있었고, 10시엔 알베르게가 닫히고 전체 소등에 들어가는 게 일반적이다 보니 저녁을 먹은 후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까지도 소화가 다 안 됐다는 느낌이 들곤 해서 공복으로 3~5km를 걸은 후 아침을 먹는 게 내겐 딱 좋았다. 그러나 메세타 평원 구간에선 본의 아닌 공복유산소 운동을 빡센 강도로 감행해야 했다. 거의 3시간 가까이 걸어야 겨우 커피 한 잔, 빵 한 조각을 먹을 수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부르고스에서 레온까지는 약 180km. 나는 이 길을 8일에 걸쳐 나누어 걸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순례자 필수 어플인 까미노 닌자(camino ninja)를 열어 내가 그날그날 시작한 마을에서 얼마나 걸어야 첫 번째 카페가 나오는지 확인했다. 내가 체감한 고강도 공복유산소는 현실이었을까?
메세타의 시작, 부르고스에서 출발하면 11.1km를 걸어야 다음 마을이 나온다. 대략 3시간 동안 아무것도 없는 시골길을 걸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다음날 여정은 어땠을까? 나는 다음날 부르고스에서 20km 떨어진 호르니요스 델 까미노(Hornillos del Camino)에서 출발했는데, 첫 번째로 나오는 마을인 산볼(San bol)엔 카페가 없다. 두 번째 마을인 카스테야노스 데 카스트로(Castellanos de Castro)에 다다라야 뭔가를 먹고 마실 수 있는데, 역시 9km를 걸어가야 한다. 카스트로헤리츠(Castrojeriz)에서 프로미스타(Fromista)로 약 25km를 걸어가는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10km를 걸어가서야 첫 번째 마을이 나타났고, 그곳엔 알베르게만 한 채 있었다. 어느 날은 20km 가까이 걸어야 첫 번째 마을이 나왔다. 메세타 구간을 거의 절반쯤 걸으면 나오는 마을인 까리온 데 로스콘데스(Carrión de los Condes)에서 출발하면 17km를 걸어야 다음 마을이 있었다. 그늘도 쉴 곳도 마땅히 없는 시골길을 하염없이 걸었는데, 다행히 10km쯤 되는 지점에 푸드트럭이 있었다. 말 그대로 간이식당 정도에 불과해 화장실은 없었지만, 메세타 구간에선 불평할 수 없다. 시설이 조악해도 순례자들은 ‘살았다’는 표정으로 홀린 듯 푸드트럭으로 향한다.
이처럼 메세타 평원을 걷는 일이 워낙 지치다 보니 이 구간은 대표적인 점프 구간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순례길 779km 중 일부를 점프해야 한다면 어딜 지나치겠는지 묻는 질문에 메세타 구간을 꼽는 사람들이 많다. 메세타 구간이 지루하기도 하고, 생장(Saint jean pied de port)부터 시작한 순례자에겐 전체 여정 중 절반 가까이 온 이쯤이 육체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지치는 때이기에 휴식을 선물하는 차원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에스테야(Estella)에서 로그로뇨(Logroño)까지의 구간을 점프하기도 했고, 정 안 되겠으면 건너뛰잔 생각에 걷다 보니 메세타 구간의 마지막 지점인 레온에 도착했다.
힘들다는 구간을 내 두 발로 꼭꼭 걸어왔다고 해서 더 큰 기쁨과 뿌듯함을 느끼진 않았다. 오히려 이 구간의 끝인 레온에서보다 순례길의 절반 지점인 레디고스(Ledigos)에서 내가 얼마큼 걸어왔는지를 체감한 때가 더 뿌듯했다. 메세타를 지날 때가 순례길의 반을 걸은 것이고, 앞으로 딱 그만큼만 더 걸으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한다고 하는데, 그걸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뿌듯함도 잠시일 뿐, 순례자라면 또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다시 길을 나서야 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사는 게 그런 것 아니겠나 싶다. 지루하고 힘든 시간도 있고 그걸 잘 통과하면 기쁘기도 하고, 지금까지 내가 해온 것을 보며 뿌듯하기도 한. 그러나 그 행복에 매몰될 수 없고 계속 나아가야 하는 그런 것. 우리 인생의 메세타 평원 구간도 결국 그저 하나의 길이고 과정일 뿐임을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