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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에 일어나면 꼴찌입니다

ep11. 그래도 꿋꿋하게 나의 루틴을 지킨 이유

by 양탕국


순례자의 하루는 일찍 시작한다. 그것도 아주 일찍.


순례자 숙소인 알베르게의 소등 시간은 보통 오후 10시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서 100km가량 떨어진 지점인 사리아(Sarria)부터는 순례자가 대폭 증가해 이런 규칙이 무용해지는 듯했지만, 그 이전 구간에서는 얄짤없이 밤 10시가 되면 소등과 함께 알베르게의 대문도 굳게 닫혔다. 당장은 잠이 오지 않더라도 그 고요함에 가만히 몸을 맡기고 눈을 감으면 30분도 채 버텨내질 못하고 잠이 들곤 했다.

방 안 빼곡히 들어찬 이층침대들, 그중 한 칸의 침대가 내 자리. 순례길 시작 전 2주 간의 여행 중에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물가가 너무 높아 호스텔에 짐을 풀었었다. 그러나 대도시 관광객 중심의 호스텔과 알베르게는 같은 공용숙소라고 해도 그 환경 차이가 뚜렷하다(다만, 암스테르담보다 가격이 약 4배 저렴하다). 그러다 보니 알베르게에서의 잠자리가 불편한 게 당연한데도 생각해 보면 순례길에선 거의 매일 ‘통잠’을 잤다. 아마도 한여름 볕을 양껏 받으며 열심히 걸었기 때문이리라. 운이 좋지 않은 날은 거창한 코골이와 잠꼬대가 돌비 사운드처럼 울려 퍼지는 공간에서 잠에 들어야 할 때도 있는데, 나도 피곤해서 코를 골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퉁쳐진다.


다음날 새벽 4시쯤부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나도 잠에서 깰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땐 새벽 5시 반 경이면 자연스레 눈이 떠졌다. 실상 내 휴대폰 알람은 6시에 (물론 무음으로) 맞추어져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알람 설정 시간보다 일찍 깨더라도 최소 오전 6시는 되어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례길을 걸은 지 1~2주 정도 후면 자신만의 루틴이 생긴다. 언제 일어나는지, 준비는 얼마 동안 하는지, 아침을 먹는지, 물과 간식은 얼마큼 챙기는지, 몇 시에 출발하는지와 같은 일이 내게 편한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정해지는 것이다. 나는 보통 6시에 몸을 일으켜 양치질과 세수, 간단한 스킨케어(에센스-선크림)를 하고 옷을 입고(하의를 레깅스/운동복으로 갈아입기. 상의는 자기 전 다음날 입을 옷을 잠옷으로 입었다) 짐 정리를 한 후, 사위가 밝아질 즈음 알베르게를 떠났다. 사실 출발 준비를 다 끝내고 나도 6시 20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때는 너무 어두워서 최소 6시 40분은 되어야 길을 나섰다. 그때쯤이면 꽤 여러 명의 순례자들이 길을 나서는 것을 볼 수 있고, 그래서 아직 어둠이 완전히 걷히지 않더라도 안도감이 들었다.


사실 여름 순례길의 볕이 작열하는 탓에 이보다 더 일찍 길을 나서는 순례자가 많았다. 아주 깜깜한 오전 4시부터 짐을 싸서 나가는 순례자들의 인기척을 느끼는 일은 흔했고, 5시 반이면 방 안 대다수의 순례자가 짐을 싸고 있는 것 같았다. 이보다 이른 새벽엔 배낭을 방 밖으로 가지고 나가 짐을 싸는 소리가 들렸는데, 5시 반경이면 방 안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갈 채비를 하다 보니 그냥 방 안에서 부스럭거리거나 짤막한 대화를 나누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소리들을 들으며 침대에 누워있다 보면 썰물이 빠져나가듯 일순간 적막해지는 때가 있다. 그때가 나의 기상 시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 캄캄한 방 안을 휴대폰 불빛으로 한 바퀴 휘이 비춰보면, 이미 모두 체크아웃을 한 뒤였다. 순례길에서 나는 대체로 꼴찌 출발자였다.

새벽 6시 20분, 호르니요스 델 까미노(Horinillos del Camino) 알베르게의 모습. 모두 나가서 조명을 밝히고 짐을 쌀 수 있었다!


오전 6시 40분. 아직은 어두운 거리를 가로등 몇 개 불빛에 의존해 걷기 시작한다. 작은 마을에선 대다수의 알베르게가 근거리에 모여있다 보니 이 시간 순례자들의 루틴을 살짝 엿볼 수 있다. 어떤 순례자는 본격적인 출발 전 카페에서 배를 채우기도 한다. 순례자들이 주로 묵는 마을엔 아침 7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각에도 영업을 하는 카페가 제법 있는 편이다. 어두운 거리, 셔터가 내려간 상점들 가운데 유독 환하게 조명을 밝힌 카페는 걷기 전에 커피를 마시거나 아침을 먹는 루틴을 가진 순례자들이 모여들어 복작복작하다. 누군가는 전날 사둔 과일이나 간식을 해치우려는 듯 길을 걸으며 빠르게 흡입하고 과일 껍질과 포장지 같은 쓰레기를 버린다(마을을 벗어나면 쓰레기통이 없기 때문). 나는 6시 40분경 길을 나서고, 공복으로 걷다가 첫 번째 마을(보통 5km 정도를 걸으면 나온다)에서 크로와상과 커피 한 잔 정도로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는 편이었다. 너무 사람이 많은 공간을 선호하지 않는 내겐 이 방식이 딱 좋았다. 사람들이 주로 지나치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조용한 아침을 맞으며 오늘 하루 걸을 거리를 가만히 가늠하곤 했다. 그리고 사실은 공복으로 걷기를 시작하다 보니 5km쯤 지나고 나면(시간상으론 1시간 반 정도 걸린다) 슬슬 출출해지기도 한다.

아침을 먹기까지 1시간가량을 걷는 동안에도 루틴이라 할 만한 단계가 있었다. 출발 후 20분쯤 지나 몸이 슬슬 풀리고 정신도 맑아져 오는 오전 7시는 순례길을 걸으면서 내가 정말 좋아한 시간이었다. 한국 시간 오후 2시, 내가 좋아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청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주중엔 EBS FM <이승열의 세계음악기행>을, 주말엔 KBS 1FM <명연주 명음반>을 들으며 걸었다. 국내에선 집에 머무는 때가 아니면 거의 듣지 못하는데, 오히려 해외에 있으니 7시간이라는 시차에도 불구하고 더 꼬박꼬박 찾아 듣게 되었다. 거기다 순례길이라는 고요하고, 또 어쩌면 지루하고 지난하기도 한 시간을 채우는 데엔 라디오 청취만한 것도 없었다.

그렇게 걷다 보면 7시 30분을 전후로 붉은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프랑스길에서 해는 늘 내 뒤에 있었다. 때문에 앞만 보고 걸으면 밝아졌다는 것만 알뿐 해가 뜨는 광경은 볼 수 없다. 하지만 잠시 멈추어 몸을 반 바퀴만 돌면 타오르듯 바알간 해가 천천히 떠올라 대지를 붉게 물들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길어야 2분이나 될까. 찰나의 감상을 마치고 좀 더 걸어 아침 먹을 장소에 당도하는 것. 그게 나의 순례길 아침 루틴이었다.

부르고스(Burgos)에서 카스트로헤리츠(Castrojeriz)로 향하던 날의 아침 일출
카스트로헤리츠에서 프로미스타(Promista)로 향하던 날의 아침 일출

걸음이 느린 편이라 가뜩이나 뒤에 오던 사람이 나를 앞질러가는 경우가 많다 보니 조금 일찍 출발하는 게 좋을지 고민한 적도 있었다. 어차피 6시가 되기 전 잠에서 깼고, 준비 시간도 20분이면 충분했다. 만약 기상하자마자 준비를 시작한다면 충분히 오전 6시에도 길을 나설 채비를 마칠 수 있었다. 이런 고민은 내가 도착한 알베르게 대문에 ‘completo/full’이라는 글자가 붙어있을 때, 나보다 고작 10여분 늦게 도착한 사람이 더 이상 자리가 없어 다시 배낭을 지고 다른 숙소를 찾아 나서는 모습을 보면서 시작되었다. 생장(Saint jean pied de port)에서부터 걷다 보면 체감하는 바로는 팜플로나(Pamplona), 부르고스(Burgos), 레온(Leon) 등 도시를 기점으로 순례자가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실제로 한 번은 오전 6시에 알베르게를 떠난 적이 있었다. 까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on de los Condes)라는 마을에 묵고 싶은 알베르게가 있었는데 그곳이 예약을 받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보통 20km가량 걸으면 오후 1시쯤 도착했고 그보다 거리가 길어지면 오후 3시가 다 되어서야 도착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선착순으로 도착해야 들어갈 수 있는 공립 알베르게(예약을 받지 않는 게 일반적이며 사립에 비해 월등히 저렴하다)에 묵는 건 꿈도 꾸지 않았는데, 언젠가 공립에서 주로 묵었다는 순례자에게 들으니 그는 새벽 4시면 길을 나서고, 오전 11시면 이미 마을에 도착해서 점심식사까지 마친 시간이라고 했다. 순례 초반에는 ‘오늘은 이 마을에서 하루 잘까?’라고 생각하고 멈춰 서서 평이 괜찮은 알베르게에 찾아가도 내 한 몸 뉘일 침대는 있었는데, 이젠 사정이 그렇지 않은 것이었다. 게다가 내가 가려는 알베르게는 후기도 좋았다. 그러니 선착순 알베르게에 도전(?)하는 내 맘이 조급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오후 12시 도착을 목표로 새벽 6시에 걷기를 시작한 날, 거리는 매우 어두컴컴했다. 게다가 마을을 빠져나오자마자 바로 황량한 도로 옆 흙길을 쭉 걸어야 했는데, 차량 통행이 많은 도로가 아니어서 사위가 어두운 데다 가끔씩 도로를 지나는 차들은 마치 고속도로를 달리듯 엄청난 속도로 달렸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도로가로 걷거나 도로를 가로지르는 때가 많아서 그날도 그래야만 했는데 주변은 어둡지, 헤드랜턴이 없다 보니 휴대폰 불빛에 의존해야 하지, 새벽바람은 차갑지… 어찌나 긴장했는지 모른다.

화질도 망가뜨리는 어두움…


그렇게 바짝 긴장한 채로 부지런히 걸은 끝에 나는 오전 11시 35분에 내가 목표한 알베르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너무 여유롭잖아? 물론 나보다 먼저 짐을 풀고 이미 마당에서 휴식을 취하는 순례자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대강 훑어보니 아직 침대가 꽤 남아있었다.

까리온 데 로스 콘데스의 수녀원 알베르게. 이후 꽉 차긴 했지만, 내가 도착했을 때 반 정도는 빈 침대였다.


도착 후 루틴은 샤워-빨래-마트 쇼핑. 그날은 세탁기를 사용하는 날이었기에 빨래를 넣어두고 마트로 향했다. 일찍 도착한 데다 손빨래를 하지 않아도 되니 다른 날보다 여유로웠다. 그렇게 마을을 둘러보며 마트로 가는 길에 이틀 전 숙소에서 만나 길 위에서도 종종 마주치던 프렌치-더치 커플을 만났는데, 그들도 내가 짐을 푼 알베르게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 아닌가. “너 되게 빠르다! 언제 도착했어?“ 순례를 시작한 이래 ‘빠르다’는 평가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나보다 한 시간도 더 늦게 도착한 그 커플도 무리 없이 나와 같은 숙소에 묵을 수 있었다.


그날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꼴찌 출발자가 아닌, ‘새벽형 순례자’로서 길을 걸은 날이다. 그 이후 나는 다시 오전 6시는 되어야 침대에서 빠져나와 이르면 6시 40분에 길을 나서는, 오전 7시부터는 라디오를 듣고, 7시 반 즈음엔 잠깐 멈춰 서서 일출을 감상한 후 곧 나오는 카페에서 아침을 먹는 기존의 루틴으로 돌아갔다. 순례길 초반엔 길을 걷다가 그날 갈 마을을 정하고 숙소를 예약하거나 그저 워크인으로 도착하기도 했는데, 이젠 순례자가 늘어났으니 전날 예약하기로 했다. 순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땐 내가 얼마큼 걸을지 알 수 없기에 미리 숙소를 예약하는 게 꺼려지기도 했지만, 이미 순례길 중반 지점을 벗어난 후엔 내가 얼마만큼의 거리를 걸을 수 있는지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나는 20km까진 대체로 즐겁게 걸을 수 있었고 그 이상이 되면 걷는 게 급격히 힘에 부치는 편이었다(예를 들어 23km를 걷기로 한 날, 어느 순간 체력이 많이 소진됐다는 느낌이 확 들어 남은 거리를 확인하면 3km 정도였다. 22km를 걸으면 도착지까지 2km가 남아있는, 그런 신기한 경험). 그렇게 미리 숙소를 예약하니 내가 아무리 꼴찌 출발자라고 해도 뭐 어때, 새벽형 순례자보다 더한 여유도 부릴 수 있다는 마음이 자동 장착됐다.


그렇게 나는 나만의 ’게으른‘ 루틴을 성실하게 지켜냈다.


덧1) 오전 11시 반에 도착한 마을, 까리온 데 로스 콘데스엔 강이 있어 수영을 할 수 있다. 나는 다리를 담그는 걸로 만족!

덧2) 이 마을의 성당에선 매일 저녁 ‘순례자를 위한 미사’를 진행한다. 신부님이 직접 순례자 한 명 한 명에게 축복을 내려주고, 수녀님들은 종이별을 나눠준다. 순례자들을 환하게 비추어주고 지켜줄 별이라는 의미.

신부님이 미사를 집전하는 단상 아래 순례자들의 상징인 배낭과 스틱, 운동화가 있다(좌), 수녀님이 나누어주는 종이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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