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 이러다간 쫄쫄 굶겠다는 위기 의식을 경험하는 순례길 시골 마을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순례길 완주를 하고도 2주가량이 흐른 때로, 스페인 수도인 마드리드(Madrid)를 여행 중이다. 순례를 마친 후 포르투갈의 포르투(Porto)에서 1주일간 휴식을 취하고, 스페인으로 이동해 바르셀로나(Barcelona)와 그라나다(Granada)를 여행했다. 대도시 혹은 관광지로 유명한 이곳들에 머물며 순례가 끝났다는 사실을 가장 직접적으로 체감하는 때는 아무 때나 슈퍼마켓에 가도 되고, 브레이크 타임이 없는 식당도 꽤 있고 그렇지 않아도 배곯을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것, 그리고 주말에도 상점들이 문을 여는 걸 볼 때다. 순례길을 걸을 땐 보통 오후 1~2시에 그날 묵을 마을에 도착하곤 했는데, 그러면 샤워를 하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슈퍼에 가서 물과 식량을 사는 일이었다. 식당뿐 아니라 슈퍼와 약국 등 거의 모든 상점이 시에스타/브레이크 타임을 철저히 지키기 때문에 조금 누워서 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다간 목이 너무 말라… (물론 물을 못 구해서 수돗물을 마신 적도 있지만 생수를 살 수 있는 환경이면 웬만하면 생수를 마시려고 했다.) 게다가 식당도 관광지에서는 4시나 5시는 되어야 브레이크 타임이 되는 식당이 적지 않은데, 시골에선 그보다 빠른 경우가 많았다.
순례자들이 필수로 사용하는 어플 중 ‘까미노 닌자(camino ninja)’라는 어플이 있다. 걸어가는 길이 올바른지 표시가 될 뿐 아니라(오프라인 상황에서도 지도를 볼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 각 마을의 대략적인 인프라를 안내해 준다. 그리고 시작 지점과 도착 지점을 입력하면 그 거리를 알려주기도 해서, 나는 저녁을 먹은 후 온전히 휴식을 취할 때엔 이 어플을 통해 다음날 어디까지 걸어갈지 대략적으로 정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곤 했다.
7월의 끝자락 어느 날, 나는 벨로라도(Berolado)에서 비아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Vlafranca Montes de Oca)까지 11.9km를 걸었다.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기에 20km를 넘게 걸은 다음날은 짧은 거리를 걸으며 완급 조절을 했다. 많은 순례자들이 아헤스(Agés)까지 걷곤 하는데, 위에 첨부한 이미지를 보면 아헤스보다 비아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에 더 다양한 시설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찾은 정보는 거기까지였다. 이 이름도 긴 비아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라는 마을엔 마을 이름을 형성하는 알파벳만큼의 식당도, 마트도, 카페도 없다는 것을 몰랐다. 게다가 이들이 무지막지하게 빨리 닫는다는 사실도 저녁 먹을 곳이 없는 상황에 닥치기 전까진 알 수 없었다.
그날은 벨로라도에서 아침 8시가 넘어 출발했는데도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아 12시에 도착했다. 카페에 들러 여유를 부리면서 온 건데도 말이다. 예약한 알베르게는 1시부터 체크인이었고 혹시 하는 마음에 출입문을 두드려봤지만 답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숙소 바로 옆에 있는 바에 가서 타파스 한 접시와 이온 음료를 주문했다.
틈틈이 들르는 순례자들과(대부분 이 마을에 묵지는 않고 잠시 쉬었다 가는 듯했다) 마을 사람들을 구경하며 한 시간가량을 보낸 후 1시가 조금 넘어 예약한 숙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숙소 호스트는 이곳저곳 공간을 소개하며 규칙도 함께 말해주었는데, 독특하다고 생각한 것이 하나 있었다. 부엌에서 요리를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주방에 있는 식재료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요리를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고, 그럴 체력도 없었기에 순례길을 걸으며 단 한 번도 음식을 직접 조리해서 먹은 적이 없다. 그래서 어차피 요리를 하지 않고 사 먹을 테니 큰 관심 없이 대충 둘러보니 각종 양념류를 비롯해 파스타면, 쌀 등도 있었다. 아마 이전에 묵은 순례자가 남겨둔 것일지도 몰랐다. 남은 식재료를 챙기느라 배낭이 무거워졌다는 후기를 읽은 적도 있기에 식재료를 미처 챙기지 못하고 두고 가는 사람들도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실제로 목격한 건 처음이었다.
호스트의 숙소 소개를 들은 후 방에 들어와 세면도구를 꺼내놓는 정도로 간단히 짐을 푼 후 먼저 구글 맵에서 식료품점부터 검색했다. 순례자 루트란 생각보다 간단한데, 숙소 체크인 후에 하는 일은 다음과 같다. 1) 샤워 2) 손빨래 3) 물 (+간식) 구매. 이 3단계를 거쳐야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시에스타 시간에 걸려서 슈퍼도 닫고 레스토랑도 닫는 때면 물도 살 수 없어 수돗물을 마시고 당장의 허기도 채우지 못하는 난감한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늘 숙소에 들어오면 근처 식료품점의 위치와 영업시간을 확인하는 게 습관화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동네 유일한 슈퍼가 오후 2시면 영업을 종료한다고 안내되어 있었다. 물론 5시면 다시 영업을 재개한다고 했지만, 샤워와 손빨래부터 했다간 3시간 동안 목마름을 견뎌야 할지도 몰랐다. 일단 슈퍼에 가서 2L짜리 생수와 다음날 챙길 500ml 생수를 사고 바나나 하나와 커피도 집어 들었다. 5시에 문 열면 다시 오면 되니까 지금은 이 정도로 만족하자는 마음이었다. 슈퍼를 다녀온 후에야 편안한 마음으로 샤워와 밀린 손빨래를 할 수 있었고, 바나나와 커피로 대충 허기도 해결했다. 숙소 체크인 시간을 기다리며 타파스 한 접시를 먹었기도 해서 점심은 이 정도로 해결하고 저녁을 제대로 먹으면 되니까.
방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저녁 7시가 좀 안 되어 밖으로 나왔다. 스페인의 식당, 특히 이런 작은 마을에선 최소 오후 8시는 되어야 주방이 열린다. 하지만 그때까지 기다리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외국인이라곤 순례자뿐인 작은 마을에선 일명 ‘순례자 메뉴’라는 걸 파는 곳도 적지 않았다. 저렴하지만 간단하게 조리할 수 있는 메뉴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런 메뉴들은 다소 이른 시간부터 판매하기도 했다. 정 안 되면 타파스 여러 접시로 배를 채우고 슈퍼에 가서 쿠키나 아이스크림을 추가로 사 먹자, 생각하며 밖으로 나섰다.
구글맵을 통해 파악한 정보에 의하면, 오전에 들렀던 바는 오후 4시에 영업을 종료했다. 그 옆에 있는 더 작은 바 하나만이 오후 늦게까지 영업을 한다고 했다. 나는 그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느껴지는 쎄함. 아, 여기에선 배를 채울 수 없다는 직감. 나는 번역 어플을 통해 이곳에 식사 메뉴가 있는지 물었다. 돌아온 답은 ‘없다’였다. 투명 플라스틱 가림막 아래 놓인 타파스 메뉴가 전부라고 했다. 별도의 메뉴판도 없었다. 쓱 둘러보니 먹고 싶은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냉동식품임이 분명해 보이는 또르띠야와 아침 메뉴로 쉽게 보이는 초콜릿이 들어간 마트 빵, 그리고 올리브 정도가 메뉴의 전부였다. 어쩔 수가 없다. 아쉬운 대로 슈퍼에서 저녁거리를 사자! 물을 사러 갔을 때 둘러본 바론 매우 작은 슈퍼였지만 과일이 있었고 과자와 빵도 몇 종류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슈퍼가 문을 닫은 것도 모자라 아예 셔터를 내려 버린 거다. 분명 구글맵엔 영업 중이라고 뜨는데, 사장님, 오후 8시까진 문 여신다면서요.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망연자실하며 수 분 간 슈퍼 앞을 서성이는데, 그런 날 지나치지 못한 한 어르신이 스페인어로 무어라 말을 걸었다. 나는 냅다 번역기를 켜고 슈퍼가 문을 닫은 거냐고 물은 후 번역기 어플의 마이크 버튼을 누르고 그분께 가까이 댔다. 어르신은 답했다. “슈퍼는 오늘 2시에 닫았어. 내일 아침에 다시 열 거야.” 그랬다. 사장님은 시에스타 후 복귀하지 않고 아예 퇴근을 해버린 거였다.
그때부터 나의 ‘저녁 찾아 삼만리’가 시작됐다. 사실 3리도 채 되지 않을 정도의 작은 마을을 나는 돌고 또 돌았다. 그냥 가정집인 줄 알고 지나친 데가 사실은 식당일 수도 있어. 하지만 세 바퀴쯤 돌아도 그런 곳은 보이지 않았다. 성당 너머로 올라가 봤지만 사정은 같았다. 숙소 주방에 놓인 파스타면과 쌀을 맘껏 써도 된다던 호스트의 말이 그제야 이해가 갔다. 그걸로 요리를 해 먹으려 해도 아무런 소스도, 반찬도 없었다. 정말 먹을 게 없다면 처음 방문했던 타파스 바를 가야 했지만, 배가 고프더라도 아침부터 나와있었을 게 분명해 보이는 말라빠진 또르띠야를 먹고 싶진 않았다.
구글맵을 켠 후 손가락으로 지도를 확대하며 샅샅이 살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장소가 바로 호텔이었다. 성당 뒤쪽으로 언덕을 오르면 이 동네 유일한 호텔이 하나 있었다. 그제야 이 동네에 있는 단 하나의 도미토리 알베르게의 이름이 이 호텔 이름과 동일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래, 여기로 가면 뭐든 팔겠지! 희망을 안고 성큼성큼 언덕을 올랐다.
언덕에 위치한 만큼 힘들기도 했지만 입구를 찾기도 상당히 어려워서 나는 여기에 도착하고도 하마터면 건물의 바깥만 빙빙 돌다가 주린 배를 움켜쥐고 다시 걸음을 돌릴 뻔했다. 건물 사면을 다 둘러본 결과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문이 한 군데 있었다. 문을 열자 호텔 특유의 잘 정돈된 모습이 보였지만, 로비도 직원도 없었다. 그런데 복도 끝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달그락달그락. 그곳으로 다가가니 아주 작은 손글씨가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Rastaurant. 하, 살았다!
안으로 들어서자 직원이 나를 따뜻하게 맞이하며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메뉴는 단 하나, 순례자 메뉴뿐. 가만 보니 식사하는 사람들도 모두 순례자 같았다. 호텔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의 식당인가 보았다.
그날 저녁을 먹으며 깨달았다. 너무 작은 마을에선 묵으려 하지 않는 순례자가 많은 이유를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느낀 점은,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다는 거였다. 어떻게든 걸을 만한 거리에 한 끼 배 불리고 하룻밤 지낼 곳은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하루였다.
덧) 그리고 이날 이후엔 나도 너무 작은 마을에선 되도록 묵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