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가 한식에 환장할 줄이야

ep10. 순례길 한식로드

by 양탕국


나의 여러 별명 중 하나는 ‘미맹’이다. 말 그대로 맛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내게 어떤 음식에 대한 맛 평가는 ‘맛있다‘와 ’맛없다‘로 이분화되곤 한다. 언젠가 서울의 한 카페에서 판매하는 우유 아이스크림이 아주 인기였던 적이 있다. 백화점에 갔다가 그 소문의 아이스크림 팝업이 열려 맛을 보게 돼 동료들이 모인 단톡에 사진을 찍어 올리게 되었다. 그 톡방엔 맛에 민감한 동료가 있었는데 그가 내게 아이스크림의 맛을 표현해 달라는 난제를 냈다. 나는 애를 썼다. “음, 그러니까 우유 맛이 강하게 나고, 아주 부드럽고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르 녹아. 정말 맛있어.” 스스로 꽤 괜찮은 설명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동료가 답했다. “그건 어떤 우유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그렇지 않겠어?“ 이런, 듣고 보니 과연 맞는 말이었다.

맛을 세심하게 구분하지 못해서일까, 나는 맛집에 대해서도 큰 흥미가 없는 편이다. 적당히 마음에 드는 음식점이나 카페가 생기면 갔던 델 계속 가거나(새로운 델 찾는 게 귀찮기도 하다), 아니면 지나가다 분위기가 괜찮아 보이면 그냥 자리를 잡고 앉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 이런 성향은 여행을 갔을 때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 나라에 갔을 때 이건 꼭 먹어야 해!’라고 꼽히는 요리는 몇 가지 시도하는 편인데, 그것도 내 일정과 멀지 않은 곳에 괜찮은 식당이 있다면 가는 편이다. 유명 음식점을 찾아가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만약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면 미련 없이 돌아선다. 여행 중 식당을 고를 땐 주로 이런 과정을 거친다. 1) 배고픔을 느낀다 2) 구글 맵에서 주변 식당을 검색한다 3) 평점 4.0 이상 혹은 분위기가 괜찮다면 go. 메뉴는 그때그때 끌리는 걸로 결정한다.


순례길에서도 그럴 줄 알았다. 아니, 초반엔 그랬다. 그리고 내가 걸은 프랑스길은 프랑스에서 시작해 스페인 북부를 쭉 거치는데, 이때 비교적 초반 일정에 스페인 바스크 지역을 지나게 된다. 그렇다, 바스크 치즈 케이크의 그 ‘바스크‘다. 이곳은 핀초스 문화로도 유명한데, 핀초스는 흔히 우리가 타파스로 알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 나도 이전에 스페인 여행을 할 땐 타파스로만 알고 있었기에 핀초스와의 차이는 무엇인지 알아보니 핀초스는 빵과 함께 나오는 게 일반적이라더라. 그러고 보니 바스크 지역에서 먹은 핀초스는 모두 빵 위에 여러 재료를 올린 후 이쑤시개를 꽂아 고정해 둔 모양이었다. 바스크 지역에 해당하는 마을에서는 확실히 다양한 핀초스를 맛볼 수 있었는데(바스크를 벗어난 후엔 메뉴 선택의 폭이 다소 좁아졌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먹는 재미가 꽤 쏠쏠했었다.

부르고스(Burgos)의 핀초스 바

그러나 여행을 하며 하루에 1만 5천보 안팎으로 걸을 때도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하면 체력이 달리는데, 하루 4만보 가량을 걷는 순례길 일정을 소화하며 핀초스로 끼니를 해결하기는 어렵다. 사실 그날 묵을 마을에 도착하기까지 중간에 쉬어가는 바에서, 그리고 마을 도착 후 샤워와 손빨래를 마치고 1시간 정도 휴식한 후엔 이미 레스토랑 주방이 영업을 종료해서 핀초스로 허기를 채우는 경우가 많았기에 하루 한 끼만큼은 식사를 제대로 하려고 했다. 내겐 그 한 끼가 대체로 저녁 식사였는데, 스페인의 저녁 식사란 8시는 되어야 가능하기에 나는 늘 상당히 배가 고픈 상태에서 저녁을 먹곤 했다. 이미 오후 6시쯤이면 배가 슬슬 고픈데 그 시간에 나서봤자 먹을 건 핀초스뿐이라 나는 그 시간을 구글 맵의 음식점 검색으로 보내곤 했는데, 순례길 시작 2주 후쯤부터 부쩍 많이 검색한 키워드가 있다. 바로 ‘Asian’, ‘Korean’, ’Japanese’, ‘Vietnamese’ 같은 단어들이다. 간절함이 더해져서일까, 베트남 현지보다 유럽에서 먹는 베트남 쌀국수가 항상 더 맛있었다.

순례길 일정 중 먹은 베트남 쌀국수(좌), 중국식 탕수육과 쌀밥(우)


나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행을 가서 굳이 한식을?’이라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일상과 다른 것을 경험하고 싶어 큰돈 들여 그 멀리까지 갔는데 일부러 한식을 찾아 먹는 건 유난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대학생 때 1년간 유럽에 살 때에도 단 한 번도 국물 요리를 해 먹은 적도 없을뿐더러 외할머니가 농사지은 고추를 꼽게 빻은 고춧가루를 국제 택배로 받아놓고도 밀봉 상태 그대로 두었다가 귀국 직전 다른 한국인에게 주고 왔다(그는 닭볶음탕과 떡볶이, 라면을 해 먹을 때 그 고춧가루를 아주 잘 썼다며 당시 페이스북으로 내게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그 ‘유난스러움‘의 당사자가 될 줄이야. 나는 이미 진작에 순례길에서 거치는 마을 중 한식을 먹을 수 곳을 몇 군데 파악해 두었고, 구글맵 검색을 통해 일부 아시안 레스토랑에서도 한식을 맛볼 수 있었다. 또 어느 마을에선 케밥으로 대충 끼니를 해결하려다가 ‘라면, 밥, 김치’라고 적힌 입간판을 발견해 그날은 라면도 아니고 무려 짜파게티를 먹기도 했다. 한국에선 라면도 잘 안 먹었는데 그곳에선 어찌나 맛있던지. 게다가 나는 직접 끓여 먹는 건 귀찮아서 라면 메뉴가 있는 식당에서 사 먹기만 했는데, 그러면 가격이 우리나라 돈으로 1만 원이 훌쩍 넘는다. 그래도 그 돈이 아깝지 않을 만큼 꿀맛이었다. 내가 충만한 행복감을 느낀 한 상을 맛본 곳은 아래와 같다:


1. 부르고스(Burgos) 한식당, <두 번째 소풍(2° Sopung)>

여긴 한국인 순례자들에겐 이미 너무 유명한 곳이다. 프랑스길을 걷는 순례자라면 제대로 된 한식을 먹을 수 있는 첫 번째 장소이기도 하다. 여러 명이 식사를 하면 다양한 메뉴를 주문해 나눠먹어도 좋을 것 같다. 한국 밥솥으로 지은 흑미밥이 맛있었고, 4유로에 판매하는 막사는 환상적이었다. 평일 점심에 워크인으로 방문했다가 식사를 못하고 돌아왔기에 미리 예약을 하고 방문하는 걸 추천한다. 메뉴는 제육볶음, 간장불고기, 잡채, 간장계란밥, 찌개류 등이 있었다.


2. 카스트로헤리츠(Castrojeriz), <오리온 알베르게(Albergue Orion)>

카스트로헤리츠는 굉장히 소박한 마을이다. 당시 나는 마을 초입에 위치한 알베르게에 묵었는데, 단 하나 있는 마트가 도보로 왕복 45분이었다. 그런 마을에서 라면도 모자라 김밥이라니! 가격은 두 메뉴 합쳐 15유로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라면도 매우 잘 끓였고 김밥도 한국식 김밥이었다(요즘 유행하는 재료가 왕창 들어간 뚠뚠한 김밥이 아닌 약간은 심심한 가정식 김밥에 가깝다). 이 메뉴를 판매하는 오리온 알베르게 사장님이 한국인이라고 하는데 얼마 전 부르고스에 한식 도시락집을 냈다고 한다(그래서일까, 내가 방문했을 땐 스페인 직원들만 있었다). 라면은 종류가 여러 가지여서 고를 수 있다. 그리고 이곳에 묵은 필리피노 순례자에게 들은 바로는 숙소에서 저녁을 먹을 시 제공되는 저녁 메뉴는 한국식 비빔밥이라고 한다. 비빔밥은 해당 알베르게에 묵지 않아도 저녁에 방문하면 주문해 먹을 수 있는 것 같았다(내가 점심때 라면과 김밥을 주문하니까 저녁에 오면 비빔밥을 먹을 수 있다고 안내).


3. 레온(Leon), <토로토로 라멘(Torotoro Ramen)>

식당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여긴 일식당이고, 주 메뉴는 라멘이다. 그런데 비빔밥을, 그것도 돌솥비빔밥을 판다. 솔직히 순례길 이후 관광도시인 스페인 그라나다(Granada)의 한식당에서 먹은 돌솥비빔밥보다 훨씬 맛있었다. 돌솥의 기능이 어찌나 좋은지 바닥에 누룽지 생성까지 되더라! 정말 한국에 있는 여느 식당에서 먹는 돌솥비빔밥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매우 맛있었고, 나물도 골고루 들어갔으며 고추장도 한국 제품을 쓰는 듯했다. 그리고 양이 굉장히 많다. 무조건 밥 한 공기는 넘는 양이었는데, 배가 부른데도 싹싹 긁어먹었다. 날 ‘비빔밥집착광’으로 만들어 버린 만족스러운 한 끼.


4.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누마루(Numaru)>

산티아고 도착 후 내게 주는 선물과도 같았던 한식 한 상. 보르다에서 만난 한국인 순례자를 이곳에서 다시 만나 한 끼를 함께 했다. 김치찌개와 갈비를 먹었는데 둘 다 양이 상당했다. 기본 반찬으로 나오는 오이지와 김치찌개가 굉장히 칼칼하고 매운 편이라 맵싸한 한식이 그리웠다면 정말 만족할 것 같다. 내가 방문했을 땐 한국인은 우리뿐이었고 현지인이 많았는데, 그만큼 현지인이 적지 않게 찾아오는 식당인데도 현지화가 덜 된 맛이었다.


이렇게 한 끼를 먹고 나면 그날의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마저 들었다. 정말 만족스러운 한 끼의 위대함과 소중함을 몸소 체감한 경험이랄까. 그리고 사진을 올리며 발견한 재미있는 사실. 나는 앞서 말했듯 제대로 된 식사 메뉴는 주로 저녁에 먹곤 했는데, 한식을 먹는 날엔 부르고스에서처럼 자리가 없어 식사를 못하는 정도의 사정이 생기지 않고서야 모두 점심 식사를 했더라. 그만큼 휴식보다 한식이었던 모양이다. 주방 마감하기 이전에 어서 가서 먹으려는 조급함까지 있었다니! 언젠가 길에서 자꾸만 마주치던 한 순례자가 그랬다. 본인은 한국에선 파워 J형이라 미리 세운 계획에 따라 이동하지 않는 여행은 해본 적이 없는데 순례길은 계획이 와장창 부서지는 경험을 하는 곳이라면서, 그런데도 스트레스가 크지 않아서 본인도 모르는 스스로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고 말이다. 그의 감상을 빌리자면 나 또한 몰랐다. ‘굳이 한식을 왜?’라던 나의 생각이 이토록 와장창 깨질 줄이야! 내가 이렇게 한식에 환장할 줄이야!




keyword
이전 09화오후 2시면 동네 유일한 슈퍼가 문을 닫아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