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도시에 내 공간을 만든다는 것

ep3. 비엔나에서 쓰고 그리고

by 양탕국
닥치는대로 그리기


2016년 겨울, 8주 간 매주 한 번씩 펜 드로잉 수업을 들었다. 홍대 상상마당에서 진행하는 '금요일 밤의 여행 드로잉'이라는 제목의 수업이었는데, 이곳에선 연필 사용을 하지 않는 것이 규칙이었다. 내 생각대로 그려지지 않더라도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 전년도에 미얀마 여행을 갈 때 야심차게 드로잉북을 가져갔지만, 시작조차 하지 못했던 적이 있다. 그때와 달리 '닥치는 대로 그리자'는 마음을 장착하자, 신기하게도 그림이 그려졌다. 수업이 끝나고 반년 후인 2017년 여름, 나는 유럽 여행을 떠나게 됐고, 손바닥만한 드로잉북과 내게 잘 맞는 펜 하나를 챙겼다.

자연보다 사람을, 사람보다 사물을, 사물보다 건물을 그리는 게 더 재밌다


그땐 그림을 그리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정말 많이 그려댔다. 그런데 내가 배운 건 펜 드로잉이라 늘 그림이 흑백. 다음번엔 색을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지. 그리고 올 봄, 색연필과 수채화, 크레파스 등을 골고루 사용하며 내게 맞는 재료를 찾아보는 단기 드로잉 강의를 들었다. 다음 여행은 다채로워지기를 바라며.


글쓰기의 갈증 해소하기

드로잉을 배운 지 꼭 1년 정도가 지난 2017년 겨울, 또 상상마당. 이번엔 ‘전방위 글쓰기’라는 강의를 들었다. A4 한 장 정도 분량의 영화평, 기사, 에세이 등을 써보는 수업이었다. 이땐 글쓰기에 대한 갈증이 급격히 치솟았던 시기였다.

방송글을 쓰는 건 고등학생 시절 3년 내내 하던 소설쓰기나, 대학때 국문학을 전공하며 썼던 ‘-론’ ‘-의 이해’ ‘-에 대한 연구’와는 다르다. 보통 글쓰기란, 작업 결과를 문서로 남기는 것이지만 방송글은 그 방식이 영상의 형태다. 즉, 읽는 글이 아닌 듣는 글을 쓰는 것이다. 언젠가 이에 큰 아쉬움을 느끼는 날이 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뭐가 됐든 글자가 보이게 남는 글을 쓰고 싶었다.

게다가 2017년 예상보다 일찍 메인 작가 타이틀을 얻게 되면서 + 색이 강한 프로그램을 맡게 되면서 글이 문장 하나 단어 하나 단위로 평가대에 올라 짖이겨지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소설을 쓰던 시절에도 꽤 강한 합평들을 경험했는데, 그때와 다른게 있다면 그땐 내가 쓰고싶은 글에 대한 평가였고, 돈을 벌지 않는 아마추어였다는 점이다. 대본 평가를 당하면서 절절히 느낀 건, 내 글은 이 프로그램의 색깔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그렇지만 돈을 받는 프로이기 때문에 맞춰서 써야한다는 것이었으며, 그건 결국 내가 싫어하는 스타일의 글이지만 좋아하는 글을 쓸 때보다 몇 배로 더 열심히 쓰는 경험을 하게 해주었다.

그것이 또 다른 글쓰기에 대한 엄청난 갈증을 불러 일으켰고, 글쓰기 수업 듣기와 브런치를 시작하게 된 계기였다.


마침 비엔나라니!


그림 그리기도 글쓰기도 열심히 했다. 물론 수강기간 한정(...) 그 덕분인지 이제 브런치에 글을 써서 사람들에게 선보일 수도 있고, 백지를 바라보며 뭘 그릴지 망설이기만 하지 않을 수 있으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게다가 마침 한 달 살기 할 도시가 비엔나라니? 예술의 도시에서 얻는 예술적 영감!


현실은 거창하지 않아도 감성만큼은 무한하지 (사진: 영화 <디 아워스>, <빅 아이즈> 스틸컷)


10년 넘게, 거의 매년, 그것도 몇 달씩 장기 여행을 해왔지만, 낯선 곳에 뚝 떨어진다고 해서 영감도 번쩍 떠오르는 게 아니라는 걸 모를 리 없다. 새로운 세계를 갈망했던 과거의 예술가들은 언제나 새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가 넘쳐났던 것이고 그게 낯선 곳을 여행하게 되면 점화되어 빛을 발한 것이라는 걸 앞으론 잊지 말자.

게다가 글과 그림을 양껏 생산해내고 싶다면서 작업에 대한 아이디어 사색이 아닌, 작업 공간이 될 비엔나 식 카페에 대한 검색을 더 많이 했으니- 소설을 쓴다고 수없이 메모를 하던 고등학생 때 멋진 작업실이 있었던가. 수십 시간씩 매달려 대본을 쓸 때 채광이 끝내주는 커다란 창과 그윽한 커피가 있었던가. 작업실이 있었다면 그건 등하굣길의 지하철 좌석 한 칸, 침대 위 앉은뱅이 책상 정도일 테다.


하지만, 끝내 버릴 수 없는 생각.

그래도 비엔나잖아?


비에니즈 카페를 작업실로 삼을 수 있을까?


비엔나 한 달 살기를 하기 전, 야심차게 다짐했다. 1일 1비에니즈 카페. 커피와 케익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도시에서 매일 같이 아인슈페너와 자허토르테를 먹지 않는다면 엄청난 실례 아닐까?


머물던 동네의 비에니즈 카페들


그 생각이 나에 대한 실례임을 알게되는 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관광 스팟에 자리한 자허, 데멜 같은 비에니즈 카페와 달리 독일어만 줄창 들리는 동네 카페는 에어컨도 없고, 영어 메뉴 같은 건 당연히 없고, 게다가 실내 흡연이 허용된 곳도 많다. 그리고 노트북이나 일거리 따위를 들고 가 앉아있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그래서 이 동네 카페들 중 실내 금연인 오른쪽 카페는 자허토르테가 먹고 싶을 때만 방문하기로 했다. 여행자 스팟이 아닌 곳의 비에니즈 카페는 맛은 큰 차이가 없지만 값은 훨씬 저렴하다. 작년에 자허토르테의 원조인 자허와, 여행자 거리인 슈테판플라츠의 카페에서 커피와 케익을 먹고 가볍게 10유로가 넘었던 걸 생각하면, 같은 메뉴를 7유로 정도에 맛볼 수 있는 건 괜찮은 옵션이다.


서울이든 비엔나든 노트북 펼치고 앉아있는 건 스타벅스 / 일하고 책 읽는 사람들이 많던 카페. 비건케이크가 맛있다.


작업실에 대한 동경


상상하던 것과 달리 작업실로 삼을 만한 외부 공간은 비에니즈 카페가 아닌 전세계 체인인 스타벅스. 뒤늦게 일하고 책 읽는 사람들이 많은 체인 아닌 카페를 찾았지만, 비건 케이크도 무지 맛있었지만, 노트북을 껴안고 오기엔 너무 멀었다. 그럼에도 작업공간에 대한 꿈은 쉽게 접을 수가 없었다. 그건 모두 소설가들이 심어준 동경. 소설책을 읽다 보면 작가의 말에 ‘지난 여름 저는 스위스의 한 마을에서-’라거나, 글 마무리에 ‘20**년, 스위스에서’ 같은 문장들이 적혀있는 것을 어렵잖게 볼 수 있었다. 그런 자유가 작가의 삶에 있어 필수 같았다. 물론 일을 하지 않으면 돈이 없고, 그런 자유도 얻기 힘들다는 진리를 이젠 너무 잘 알게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

만들기로 했다! 생각해 보니 언제나 나의 작업 공간은 집, 정확히는 70% 정도의 비율로 내 방 침대 되시겠다. 그래, 작업실이 별 거냐. 집에 만들면 되지. 마침 한 달 살기 하려고 구한 집도 얼마나 예뻐.


볕 좋은 곳에 마침맞게 책상이!


2018년 여름, 비엔나에서


그저 노트북 펼쳐놓고 색연필 깔아놓은 게 전부지만 나름의 규칙을 정했다. 식사나 간식 시간에 노트북을 사용할 땐 작업공간을 활용하지 말 것, 저곳에 앉아있을 땐 스마트폰을 내려놓을 것.

규칙까지 만든 것에 비하면 고작 올린 글은 세 편에, 그림도 몇 장 되지 않긴 하지만, 저기 앉아있을 때만큼은 나도 마무리에 이 한 마디 꼭 쓸 수 있는 진짜 작가가 된 것 같았다. 고작 1평짜리 공간인데, 이걸 만들었다고 이 도시가 더 정겹게 느껴진다.

- 2018년 여름, 비엔나에서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