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한 겹 더 껴입을 때가 되고 바깥에서 뛰어노는 게 다소 버거워질 때가 되면, 엄마는 내게 물었다.
- 이번엔 산타 할아버지한테 무슨 선물 달라고 할 거야?
한껏 욕심이 많던 어린 나는 늘 고민했다. 이것도 갖고 싶고 저것도 갖고 싶단 말야. 그때마다 엄마는, 때로 고민이 길어질 때면 아빠도, 그리고 이모까지 후보 중 하나의 물건만을 강력하게 추천했다. 어른들의 취향이 이렇게 일관되다니! 의아할 새도 없이 덜컥 그들의 의견을 따랐다. 그렇게 정해진 ‘산타 할아버지에게 바라는 선물’은 대개 인어공주 목걸이, 누우면 눈이 감기는 인형, 어린이소설 시리즈, 전자시계, 학용품 세트 따위였다.
우리 집엔 크리스마스 트리도, 선물 보따리 양말도, 캐롤이 흐르는 분위기도 없었지만 어린이였던 나는 크리스마스를 무척 기다렸다. 12월 24일 저녁까진 휑했던 머리맡에 25일 아침만 되면 반짝이는 포장지로 정체를 감춘 선물꾸러미가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 산타 할아버지가 뭘 놓고 갔을까? 열어봐.
당시, 안방에서 아빠를 쫓아내고 엄마를 차지하고 잤던 터라 늘 크리스마스 아침에 눈을 뜨면 보이는 건 1.엄마 2.선물이었다. 엄마의 연기력은 매우 형편없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선물에 눈이 먼 나는 포장지를 뜯는 데에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그런 걸 알아챌 리가 없었다. 그리고 포장지를 뜯으면 짜잔! (엄마의 의도대로 조종되어) 산타 할아버지에게 꼭 갖고 싶다고 12월 내내 마음 속으로 이야기한 물건이 내 손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산타의 존재를 믿는 어린이였던 시절은 나에게도, 엄마아빠에게도 무척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을 빌미로 고집 센 아이는 유해졌고, 엄마아빠는 다양한 심부름을 시킬 수 있었다.
진실이 밝혀진 건 초등학교 4학년 크리스마스 때. 아침에 일어났더니 머리맡에 선물이 없었다. 이럴 수가? 산타 할아버지가 나에게 선물을 안 주고 가다니? 당시 아빠는 출장으로 집에 없었고, 엄마는 독감에 걸려 며칠째 몸져 누워있었다. 엄청 시무룩해진 나를 달래던 아픈 엄마... 아, 엄마란 이렇게도 극한직업이다. 문제는 이 절망스러운 뉴스를 친구들에게도 이야기해버리면서 산타는 엄마아빠라는 사실을 앎과 함께 놀림까지 받았던 것이다. 그제야 하나둘씩 퍼즐이 맞춰지는 일들. 1. 6살 땐가 자다가 잠시 깼는데 검은 손이 불쑥 들어와 뭔가를 두고 간 일 2. 산타가 쓴 편지의 폰트는 언제나 ‘엄마정갈체’였다는 점.
배신감에 일주일 간의 대화 단절기를 보내고, 해가 바뀌고나서야 ‘우리 집에 오는 산타는 수염 난 할아버지가 아니라 같이 사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게 됐다. 크리스마스날의 머리맡 선물 이벤트도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의 머리맡에는 말이다.
2018년 크리스마스 이브에서 크리스마스로 막 넘어간 자정 즈음에 집엘 도착했다. 딸을 기다리느라 꿈나라에 가지 않은 엄빠가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머리맡엔 못하고 침대 옆 바닥에 선물을 두고 왔다.
엄빠가 마지막으로 나의 산타로 활약했던 때로부터 20년은 더 지나서 내가 그들의 산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