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가슴속에 퇴사 소망 하나쯤은 있는 거잖아요
같은 연차의 다른 작가들에 비해 내 이력서의 경력 부분은 긴 편이다. 많은 프로그램을 했다.
- 능력이 되니까 여기저기에서 불러서 쉴 틈 없이 일했나 본데? (X)
- 투 잡 쓰리 잡 한 거 아니야? (X)
프로그램을 좀 더 자주 바꿨을 뿐이다. 가장 길게 한 프로그램은 1년이고, 짧게 한 건 특집을 제외하고 세 달 정도다. 더 짧게 한 것도 있는데 그건 아예 이력서에 적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면접을 볼 때 듣는 단골 멘트가 있다.
- 경력들이 짧은 게 많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
- 우리 프로그램에서도 일하다가 금방 나가버리는 거 아니죠?
사실 한 프로그램에서 1년 정도 일하면 차고 넘친다는 생각이다. 그것도 별 탈 없을 경우에 한해서지만.
그래서 9~10개월가량 일하고 그만둔 일이 제일 잦다. 강박적으로 여행을 가던 때라, 정말이지 여행을 위해 일을 그만뒀다. 이게 프리랜서의 매력이지 뭐, 그런 마음이었다. 지금은 ‘텅장’이 되어버린 통장을 보며 한 일터에서 전에 없던 인내심을 발휘하자 다짐하고 있다.
아 참,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라면, 그건 두고 봐야 아는 거지. 물론 이렇게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누구나 맘 속에 퇴사 소망 하나쯤은 품고 사는 거 아닌가요. ‘수 틀리면 그만둬 버리자’는 생각은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때부터 절대 버리지 않는다. 이런 담대함은 가져야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 프리랜서의 삶을 무탈하게 영위할 수 있지 싶다. 1. 실력(과 약간의 인맥)으로 연명하는 세계에선 종종 “혹시 내가 프리랜서(=비정규직)이기 때문에 더럽고 치사한 꼴 더 많이 보게 해주나?” 싶은 사람들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2. 내가 좋아서 시작했고 아직까지 해오는 일이지만, 일은 내 삶보다 우선될 수 없기 때문이다.
첫 직장은 월급 80만 원을 받고 주 7일, 하루 최소 14시간씩 일하는 곳이었다. 기계처럼 프리뷰를 하고 전화를 돌렸다. 막내 한 명당 프로그램 두 개씩을 맡아 진행했다. 그러다 보니 일주일에 한 날은 30시간 이상을 회사에서 보내곤 했는데,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도 버텨내기 힘들었다. 비인간적인 노동 강도는 막내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 때는 하루 종일 소처럼 일했다”며 왕년 풍월을 읊던 작가와 피디들도 한 편씩만 하고 백기를 들었다. 소문이 빠른 동네라 사람은 더 구해지지 않았고, 본부장과 팀장이 읍소를 해서 지인들을 데려오는 실정이었다. 웨딩촬영날 새벽 퇴근을 하는 메인 작가님과 방송 이틀 전까지 추가 촬영을 하는 피디님을 보며 나를 포함한 막내작가 무리는 대표를 씹고 또 씹었다. 힘들다며 나가는 작가님들은 남아있는 우리에게 미안했는지 밥이나 커피 따위를 사주며 작별의 변명을 했다. 그리곤 우리에게 1년만 버티라고, 그전에 그만두면 우리만 손해라고 했다. 그게 정말이라면 우리의 미래는 과로사였다.
- 대표님, 저희 일주일에 하루만 쉴 수 있을까요?
- 지금 다들 힘들게 일하는데 쉴 수 있는 날이 없지 않을까? 이 프로그램이 20부작이니까 이거 끝내면 다 같이 좀 쉬자.
- 제가 생각해봤는데 화요일은 편집 날이라 막내들이 하는 일이 다른 날보다 적어서 괜찮은 것 같은데... 혹시 자료 조사할 게 있으면 집에서 하도록 할게요.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하고 질렀는데 웬걸, 대표는 잠시 더 고민하더니 알겠노라 했다. 게다가 그날은 오후 7시 퇴근이라는 이례적인 일도 벌어졌다. 웃는 얼굴로 회사를 나온 지 10분 후, 당산역 환승구간에서 나는 이성을 잃은 대표의 전화를 받았다. 어디 감히 쉬겠다고 하느냐는 발악톤의 음성이 휴대폰을 뚫을 기세로 들려왔다. 너무 충격을 받았는지 그 뒤론 아무 내용도 들리지 않았다. 듣는 순간 잊는 경험을 해본 건 처음이었다. 전화를 끊으며 결심했다. 여긴 그만둬야 한다.
나는 다음날 대표에게 곧 회사를 나가겠다고 했고, 한 달 뒤 모두의 부러움을 받으며 백수가 됐다. 1년만 참으라고? 적어도 6개월? 경력상 손해라고? 물론 짧은 경력들은 괜한 의심을 사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때의 결정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 일이 삶보다 우선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여러 일들이 있었다. 출근 첫날부터 동물원에 새로 들여온 긴팔원숭이라도 된 듯 나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알고 보니 해당 방송국의 3대 또라이 중 한 명이 이끄는 팀에 들어온 것이었다. 다큐멘터리팀이라 3개월에 한 편을 만드는 일정이었는데, 정확히 3개월마다 (때로는 그보다 짧은 주기로) 막내작가가 바뀌고 있었다. 그때의 메인작가님은 “너는 그전 애들이랑 다르다는 걸 보여줘” 라며 한 편만 더 해보라고 했는데, 아직도 조언인지 악담인지 모를 말이다. 정작 본인은 한 편만 하고 떠날 거면서 나한텐 남으라니! 또라이와 또라이의 조수(조연출)가 내가 그만둘지 아닐지를 두고 술 내기까지 하는 저급한 팀에 무엇을 기대하고 남아야 하나.
처음 들어온 작가들은 강하게 키워야 한다며 충분한 부연설명 없이 아이템을 컨펌해주지 않는 또라이도 있었다. 겨우 진행한 아이템을 중간에 갑자기 엎으라고 해서 무슨 이유냐고 물었더니, 넌 앞으로도 작가 하기 글렀다며 저주를 퍼붓는 이와 계속 일을 해야 하나.
물론 또라이를 좀 많이 만난 것 같기는 하다만.
2년 전, 함께 일하던 막내작가가 어느 날 매우 미안한 표정으로 긴급 면담을 요청했다. 내용인즉슨, 그만두기로 한 날짜를 한 달 앞당기고 싶다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그때도 10개월만 채우자는 마음으로 도장깨기 하듯 다큐를 한 편씩 만들고 있었고, 막내작가 역시 내가 그만둘 때 함께 회사를 나가기로 약속을 한 상태였다. 그런데 역대급의 또라이 피디도 너무 힘들고, 회사 대표도 당시 막내들에게 업무부담을 주고 있던 터라 너무 스트레스가 크다고 했다. 나 역시 그 스트레스를 겪는 중이었지만 나야 메인이랍시고 출근을 않는 경우도 많았고, 또라이 피디에게도 쏘아댈 수 있었지만 막내는 달랐다.
- 일한 지 6개월은 넘었지?
내가 그 말을 할 줄이야.
하지만 그 친구는 정말 아꼈기에, 적어도 반년은 채우고 나가기를 간곡히 당부해왔다. 계산해보니 8개월. 그래, 그만하면 됐다, 그만두기 최소 한 달 전에는 회사에 말하고 마무리 잘하고 떠나라 했다.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게 다였다. 나도 버티기 싫으면서 넌 견뎌내라는 이야기는 와 닿지 않는다. 이 정도는 모두 다 겪는 거라며 지나 보면 별 거 아니라는 말도 잘 모르겠다. 그때 별 거였던 건 시간이 지나도 별 거더라.
한 프로그램에서 일한 지 1년이 가까워 오면 당연스럽게 그만 둘 준비를 했던, 마치 12시가 넘으면 모습이 바뀔까 봐 안절부절못하던 신데렐라 같았던 과거들을 되짚어 보면 늘 옳은 선택은 아니었다는 생각도 든다. 놀고 싶다는 이유로 너무 쉽게 그만뒀던 건 아닐까, 그때 그 사람과 이렇게 저렇게 해보았으면 좀 낫지 않았을까, 내가 인내심이 너무 적은 건 아닐까. 그런 생각들은 언제고 다시 내 뇌를 파고들 것이다. 물론 동시에 또 언제고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들 것이다. 올해 모으고자 하는 목표금액과, 이제는 커리어에 집중하고 싶단 바람이 전처럼 쉽게 백수행을 결정하지 못하게 할 테지만.
그치만 여전히 일을 지속하는 것에 대한 견해는 똑같다. 버티는 게 능사는 아니다. 내 삶에서 일은 정말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일이 내 삶보다 우선일 수는 없다. 이 말들을 퇴사 소망과 함께 늘 가슴에 품고 살아갈 테다.
나의 백수 선언이 방송제작에 큰 지장을 주진 않을 거다. 날 대체할 사람도 충분히 존재한다. 수없이 많은 선배들이 말해왔다. 우린 프리랜서(=비정규직)니까 경력관리를 잘해야 한다고, 늘 다시 부르고 싶은 인물이 되어야 한다고, 소문이 빨라서 조심해야 한다고, 더럽고 치사해도 여긴 그런 곳이라고. 다 맞는 말씀이다. 그러나 어느 날 후배가 와서 그만두고 싶은데 어떡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과연 선배들의 말을 대물림할 수 있을까.
영화 <베테랑>에서 동료 형사의 뇌물 수수 사실을 알게 된 행동파 형사 서도철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나한테 일은 그런 거다. 욕심은 있어도 자존심을 버리고 싶진 않은 것, 어떤 결정이든 그 결과에 대해 마땅한 책임을 지면 되는 것, 감당할 만큼 하면 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