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같은 고민을 한다
오랜만에 출근을 하면 가장 처음 하는 일은 막내작가와 차 한잔을 마시며 근황을 듣는 일이었다. 요즘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가 물어보니, 막내가 말했다.
- 언니, 옆팀에 새로 들어온 막내는 곧 그만둘 것 같아요
- 한 달도 안 됐잖아! 왜?
- 맨날 섭외만 하고 글은 안 쓴다고 다른 데 알아본대요.
들어보니, 해당 막내작가는 대학에서 방송 글쓰기를 전공했단다. 그곳에서 프로그램 기획, 방송 대본 쓰기, 구성하기 등을 다 거쳤는데 섭외와 취재가 일의 80%인 막내작가 일을 최소 6개월, 보통은 1년씩 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거였다. ‘다른 데 가도 똑같을 텐데...’라는 말이 목젖까지 도달했지만 다시 꿀꺽 삼켰다. 이미 마음이 떠난 그 친구에겐 어떤 말도 들리지 않을 터였다.
처음 막내작가로 출근하던 날, 그날은 주말이었는데 나는 노동자의 권리 같은 건 생각도 않고 마냥 설렜다. 내가 ‘작가’라니?
하지만 설렘은 얼마 가지 못했다. 회사에서 내가 하는 일은 프리뷰와 전화번호 찾기가 90%였다. 당시 나는 영화 관련 다큐멘터리 제작팀에 속해있었는데, 영화감독, 시나리오 작가, 배우, 기술감독 등을 인터뷰하는 것이 주 내용인 다큐멘터리였다. 누굴 섭외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일이었고, 대체로 출연자는 거물급이었기 때문에 섭외 역시 메인작가와 피디가 도맡아 했다. 나의 역할은 기획사나 제작사 등에 전화해 그 거물급의 매니저나 비서의 연락처를 획득하는 일이었다.
또 다른 할 일인 프리뷰는 정말 기계처럼 해댔다. 프리뷰란 영상의 내용을 문자로 그대로 옮겨 적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걸 30초 단위로 시간 체크까지 해가며 적어야 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00:00 김영수, 혼자 서 있는 모습 fs
김영수, 발 끝을 땅에 비빈다. 발끝 ts
00:30 김영수 핸드폰 쳐다보는 bs
핸드폰 들고 있는 김영수의 손->김영수 얼굴
00:45 김영수, 전화하는
김: 야, 너 어디야? 왜 이렇게 늦어?
이런 식으로 모든 걸 다 적다 보니 처음엔 1시간짜리 영상을 옮겨 적는 데에 4시간씩 걸리기도 했다. 나중엔 거의 실시간으로 타이핑이 가능할 정도의 경지에 올랐으니 도대체 얼마나 많은 프리뷰를 한 걸까. (사실 방송계엔 ‘프리뷰어’라고 부르는, 프리뷰만 도맡아 하는 분들이 있다. 하지만 꽤 많은 회사가 돈을 아끼기 위해 프리뷰어 대신 막내를 부린다.)
매일 출근해 10시간 이상 하는 일이 이것뿐이니, 과연 내가 작가인지 아닌지 혼란스러울 수밖에. 특히 누군가의 연락처를 알아내기 위해 여기저기 전화를 해 “안녕하세요. 저는 000 프로그램의 000 작가입니다”라고 소개할 때마다 스스로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민망했다.
방송 아카데미를 다닌 덕에 막내 때도 아는 작가가 여기저기에 제법 많았다. 우리는 자주 각 방송사와 어떤 외주제작사가 좋고 나쁜지를 논했고, 이곳엔 얼마나 많은 또라이가 있는지 가늠했으며, 오늘은 누가 더 늦게 퇴근하는지 겨루었다. 그렇게 신세 한탄을 하는 것으로 다시 또 일할 힘을 얻곤 했다.
일한 지 1년쯤 되니 아카데미 동기 중 이미 방송계를 떠난 이가 절반, 남아있는 이가 절반인데 후자의 가장 강력한 고민이 바로 ‘막내작가도 작가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조금 폼나게 제목을 붙이면 <우리의 쓸모에 대하여>, 혹은 <우리의 하찮음에 대하여>가 되겠다.
얼마 전, 후배 작가가 만남을 청했다. 워라밸이 정말 좋고 동료들도 착하고 프로그램도 안정적인 곳에서 일하는데, 자신의 역할은 그다지 크지 않아 그만두어야 하나 고민이 된다는 거였다. 그 친구는 막내로서의 연차가 꽉 찼기에, 몸이 편하다는 이유로 더 막내작가의 일을 이어가는 것보단 어서 서브작가가 되는 게 좋을 것 같단 생각이 자꾸 든다고 했다. 결국 현실에 안주하느냐 vs 커리어를 위한 결단을 (결과가 힘들 것을 알면서도) 감행하느냐 사이의 고민이었다.
전자를 추천하는 선배나 동료들은 “여기 있다 보면 좋은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때 네가 추천 1순위야.” 라거나, “어딜 가도 이런 꿀 같은 자린 없을 거야.”라는 말로 현재에 머물라고 말했단다. 사실이다. 후배가 속한 곳은 안정적이고 유명한 프로그램인 데다, 외부에 소문이 날 정도로 좋은 팀워크를 자랑했다. 거기다 워라밸도 좋아서 한 번 거기서 일하면 안 나온다고 알려질 정도였다. 더군다나 선배들 역시 후배 작가의 고민을 알고 있어서, 알음알음 자리를 옮길 수 있는 정보를 귀띔해준다고도 했다. 하지만 급하게 작가를 찾는 경우도 있고, 그만둔다 해도 원래 일하던 곳에서의 정리도 필요하기에 정보를 얻더라도 당장 옮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몇 번의 아쉬운 일을 겪었단다. 후자를 추천하는 경우는 사실 그다지 많지 않았는데, 그만큼 ‘커리어만 얻고 다른 모든 건 잃는’ 상황에 처해질 수도 있단 이유였다. 특히 이제 막 막내를 벗어난, ‘갓 서브작가’를 채용하는 프로그램이 많지 않은 것도 걱정이었다.
나 역시 두 가지 경우의 장단을 모두 말하며 더 하고 싶고 더 궁금한 쪽을 선택하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며칠 후, 후배에게 카톡이 왔다.
언니, 저 #월 @일까지만 일하기로 했어요.
답장으로 해줄 말은 하나였다. 잘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잘할 거다, 무엇보다도 전전긍긍하지 말라는 것.
많은 막내작가가 같은 고민을 한다. 나보다 유명한 프로그램을 하는, 나보다 빨리 입봉하는 동료를 보며 조바심이 난다. 하지만 동시에 입봉할 기회를 넙죽 받기에도 겁이 난다. 나는 지금 작가일까? 그렇다고 지금 당장 이 상태에서 구성도 편집도 대본도 가능한 작가가 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토로하는 후배들에게 해준 말은 늘 같다. “닥치면 하게 되어 있어. 궁금하면 해 봐야지.” 막연히 상상하던 ‘작가’의 세계로 진입하려면, 막내의 세계를 벗어나는 수밖에 없으니까.
사실 그 뒤에 이어져야 할, 하지만 절대 말하지 않는 비밀도 있다. 서브가 되면 갑자기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 같았지만, 막내를 벗어나도 ‘내가 작가일까?’에 대한 고민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 섭외와 취재가 주된 업무이던 막내일 때도, 대본과 구성이 주 업무가 되는 입봉 작가일 때도 그 고민은 절대 덜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 깊어진다는 현실. 그러니까 사실은 많은 작가가 경력과 상관 없이 당신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