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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탕국 Aug 16. 2020

‘정치 드라마=노잼’이란 생각을 자신 있게 반박하는

<여총리 비르기트>


이 드라마에 관심 갖게 된 건 한 잡지에 실린 핀란드 총리의 인터뷰 때문이었다. 핀란드의 산나 마린 총리는 34세로 현재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젊은 국가원수인데, 인터뷰 중 드라마 <여총리 비르기트>를 보았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 젊은 여성 총리의 인터뷰가 흥미로웠기에 옆 나라 덴마크의 여성 총리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에까지 관심이 갔다고 해두자. 바로 넷플릭스에 접속해 ‘찜’을 눌러두긴 했지만, 정치 드라마는 불호인 내가 바로 볼 리는 없었다.


여느 때처럼 넷플릭스 탐험만 주구장창 하던 어느 날, 그간 본 흔적만 남긴 영상들은 더 볼 마음이 영 들지 않았고, 찜한 콘텐츠 목록을 살피다 이걸 선택하게 됐다.

정치 드라마는 늘 불호 장르였다. 악은 분명한데 선은 분명하지 않다. 숨통 조이고 바짝 긴장하지만 그럼에도 팽배한 권모술수와 비리에 농락당한다. 그런 드라마를 보고 있자면 어느새 염세적인 가치관에 잠식된 마냥 맥이 빠지는 것이다. 드라마의 어느 누구도 응원할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를 보기로 한 건 앞서 말한 인터뷰와, 바로 직전까지 한 달간 IP를 우회해가며 북유럽 콘텐츠를 이것저것 봐왔고 그것들이 굉장히 매력적이었기 때문. 그리고 영상 재생은 누르지 않고 설명만 읽거나 예고편만 보며 넷플릭스를 부유하는 일도 그만두고 싶었다.


사실 한국어 제목은 정말 별로다. 여성 인권이 아주 높다는 북유럽 국가 덴마크인데, 아무리 10년 전 방영한 드라마라고 해도 원제가 <여총리 비르기트>일 리는 없을 터. 검색해보니 원제는 <borgen>, 덴마크의 국회는 크리스티안스보르 성 안에 있고 그걸 줄여 borgen이라 부른단다. 대놓고 정직하게 정치 드라마라는 거다. 하지만 한국어로 번역하며 ‘국회의사당’이라고 옮길 수도 없는 거고, 드라마의 전반적인 내용이 덴마크 첫 여성 총리의 정치와 삶이니 그렇게 지었을 것이다.




총 3시즌으로, 첫 시즌을 방영할 때 덴마크에서 폭발적 인기를 누렸단다. 평균 시청률이 무려 53%. 우리나라에서도 TV 시청이 대표적 여가활동이던 20세기엔 50~60%의 시청률이 종종 나왔는데, 21세기엔 2000년대 초반의  <대장금>과 <파리의 연인> 정도이니, 2010년대 기록으론 놀라울 만하다.


시즌1은 온건당 대표이자 뚝심 있는 진보 정치인 비르기트 뉘보르가 감동 연설로 민심을 사로잡아 총리에 당선되면서부터 시작된다. 첫 여성 총리인 데다 갑작스러운 역전승을 한 터라 내부의 적도 적지 않지만 그는 묵묵히 잘 싸워 나간다. 하지만 가정 상황은 다르다.

비르기트(빨간 코트)와 남편 필리프(왼쪽 파란 셔츠) / 이미지 출처: imdb


비르기트가 정치를 하는 동안 남편은 전업주부로 살림과 육아를 담당하는데, 총리인 아내가 가정에 아예 관심을 두지 못할 정도로 바빠지자 둘 사이엔 갈등이 생긴다. 그 불만을 털어놓자 비르기트의 대답: “당신하고 나하고 5년씩 번갈아 사회생활하기로 했잖아!”. 아 이게 덴마크이고 북유럽인가 새삼 문화충격. 예전에 본 스웨덴 드라마에서 남자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앉아서 소변을 보길래 ‘북유럽쇼크’를 받은 적 있는데 그와 비슷한 경험을 또 다른 북유럽 드라마에서 한 거다.


성 안, 즉 국회에 들어서면 세상 두려울 것 없는 카리스마를 풍기는 비르기트도 집에선 누구나와 다를 바 없는 엄마이자 아내라는 걸 보여주는 어쩌면 전형적인 이야기. 시청률 53%라는 수치는 정치 드라마임에도 현실 워킹맘 이야기와 하나 다를 것 없는 이 드라마 주인공의 승승장구를 응원하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시즌2와 시즌3 역시 정치 활동에 열심인 비르기트의 모습과 더불어 국회를 벗어났을 땐 정치인이 아니고자 하는, 하지만 정치와 결국 엮이고 마는 그의 삶을 보여준다. 가령 시즌1 말미에 남편과 헤어진 비르기트는 시즌2부터 더 저돌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총리로 그려지지만, 동시에 1년째 별거한 남편이 이혼 서류를 마무리해줄 것을 요구하자 일을 할 때도 집중하지 못해 대변인에게 들켜버리는가 하면, 마음에 병이 나버린 딸을 미리 돌보지 못하고 언론으로부터도 지키지 못해 괴로워하기도 한다. 시즌3에선 총리에서 물러나고 야인으로 시간을 보내다 정치계에 다시 발을 들이지만 비르기트 본인이 병을 얻게 되고, 그걸 당원과 대변인은 물론 가족에게까지 말하지 못한 채 고독해야만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치 드라마임에도 일상의 고민 -자극적이기만 한 비현실 고민이 아닌-이 함께 엮인 드라마이기에 부담 없이, 정말 주인공을 응원하는 순진한 맘으로 볼 수 있다.




크리스티안스보르 성 외에 중요하게 등장하는 장소인 TV1 방송국도 드라마의 재미다. 언론의 제 역할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자부심으로 일하는 사람들, 그러나 외면할 수 없는 시청률 때문에 새로운 이사진과 삐걱대는 보도국장, 능력으로 선배들을 다 제치고 메인 앵커가 된 29세 기자 등 저 멀리 북유럽 방송국 이야기라는데도 어디서 들어봄직한 에피소드가 많다.


29세에 메인 앵커가 된 TV1기자 카트리네 푄스마르크. 시즌3에선 비르기트의 대변인이 된다. / 이미지 출처:imdb


국회가 시끄러워질 때마다 방송국도 덩달아 바빠지는데, 정치인들의 수싸움이 언론과 엮이니 극엔 긴장이 가득 찬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언론은 단순한 자극제가 아니다. 종종 극의 중심이 되고, 그럴 때면 진한 여운을 남긴다.

예를 들어 시즌2 중 한 에피소드가 그렇다. 수년간 냉랭한 사이에 놓인 북카룬과 남카룬(북수단과 남수단을 모티브로 한 가상국 같다)은 덴마크의 도움으로 평화협정을 맺기 위해 덴마크를 찾는다. 하지만 두 국가 수장은 계속 어긋나고 그 사이에서 비르기트는 진땀을 빼는데, 그 와중에 북카룬이 남카룬을 공격하기 위해 몰래 무장 헬기를 옮기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헬기 운송을 중단하기 위해 비르기트와 의회 사람들은 며칠밤을 새며 애를 쓰고 드디어 평화협정 테이블에서 마지막 확인을 위해 마주할 일만 남는다. 이 협정을 성공으로 이끄는 건 비르기트의 정치적 인생에 엄청난 영광이 됨과 동시에, 내전을 중단함으로써 수많은 목숨을 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때, TV1이 협정을 백지로 만들 수 있을 만한 북카룬의 거대 비리를 알게 되고 이를 보도할지 고민한다. 총리실에도 이 사실을 전하고 함께 고민하는데, 이때 고민 지점은 국가 위상과 언론의 투명성 vs 인류애적 가치관이다. 설령 내가 정치인이나 언론인이 아니더라도 쉽게 이입할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그렇게 이 드라마를 하나씩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시즌3 마지막 즈음엔 비르기트를 온전히 응원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개인적, 정치적 역경을 딛고 다시 도약하려는 그의 노력이 국민들에게 가 닿을 때, 시즌1에선 이성적이던 태도가 감성적으로 바뀌어있음을 깨닫게 된다.

새 정당 창당 후 다시 도약하는 비르기트 / 이미지 출처: netflix


이 드라마의 마지막 회에선 시즌1 첫 화처럼 총선 결과를 기다리는 비르기트를 보여준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우리가 그간 알고 있던 드라마 작법처럼 비르기트는 다시 역전승해 총리가 될 수 있을까? 혹은 전혀 다른 결과를 도출해낼까?

사실 나도 아직 마지막 회는 보지 못했다. 하지만 지난 한 달 북유럽 콘텐츠를 훑어본 경험에 의하면, 이 차가운 나라들은 드라마에서도 철저히 현실을 택하는 냉정함을 보이곤 했다. 심지어 마지막회를 고작 한 회 앞둔 회차의

마지막 장면은 다시 병증을 확인하는 비르기트의 모습이다. 그래서 비르기트가 어떤 선택을 받을지, 그리고 또 어떤 선택을 할지는 예측 불가다.


자, 그럼 여기까지 쓰고 나는 마지막 회를 감상해야겠다. 혹시 정치드라마라면 신물이 나는 분들에게도 이 드라마는 그렇지 않을 거라는 기대를 주었길 바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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