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리 크라임>,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지난 3월 8일, 넷플릭스는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해 ‘우리에게 영감을 준 작품들(Because she watched)’이라는 컬렉션을 공개했다. 엔터테인먼트 업계 유명 여성 인사들이 추천한 55개 작품의 리스트였다. 이벤트를 함께 진행한 유엔 여성기구는 다양한 배경에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조명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면서, “스크린 속은 물론, 현실 속 여성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는 것을 통해 우리 사회가 진정한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밝혔다.
리스트가 공개됐을 때 누가 어떤 작품을 추천했는지 하나하나 확인했다. (지금도 넷플릭스 검색창에 because she watched를 입력하면 해당 리스트에 오른 작품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이 영감을 받은 작품은 무엇이고, 추천한 이유는 무엇일지를 의미 있게 기억하기 위함이었다.
오늘 이야기할 작품들은 그 리스트에서 골랐다. 두 작품 모두 실제 사건이 바탕이 된 드라마로, 끔찍한 피해를 당한 여성이 나온다. 한 편은 인도, 다른 한 편은 미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 두 편을 함께 본다는 건 유엔 여성기구에서 밝힌 다양한 배경의 여성들의 이야기, 스크린뿐 아니라 현실의 이야기도 반추하길 바란다는 말에 알맞은 일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이걸 통해 우리 사회 여성이 번영을 누리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는 목적엔 부합할까?
올해 세계 여성의 날의 주제는 ‘평등 세대: 여성의 권익 실현’이었고, 지금부터 소개할 작품은 그걸 누리지 못한 여성들과, 뒤늦게라도 되찾기 위해 혹은 다른 누군가는 누릴 수 있도록 애쓴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인도 뉴델리 어두운 밤거리에서 두 남녀가 발가벗겨진 채 발견된다. 소지품도 모조리 빼앗기고 폭행까지 당한 후 길거리에 짐짝처럼 내던져진 두 사람. 특히 여자의 상태가 심각하다. 병원 응급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는 의사에게 피해 여성이 답한다. 강간을 당했어요. 쇠막대기로 마구 때리고 그걸 질 안에 넣었어요. 그리고 내장을 밖으로 빼낸 것 같아요.
가만히 듣고 있는 것도 힘들 정도로 끔찍한 이야기인데, 더 충격적인 건 이게 실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지난 2012년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일명 ‘뉴델리 여대생 집단 성폭행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가해자는 버스 기사를 포함해 모두 여섯 명. 그날 밤 피해자의 심신엔 무수한 상처와 고통이 남았지만 가해자의 흔적은 없는 희대의 사건. 관할 경찰서 여성 부청장인 바르티카는 일말의 단서라도 잡기 위한 수사에 나선다. 남자 형사들은 이제껏 발생한 수많은 사건에 비해 유독 이 일에 사활을 거는 바르티카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굽힘 없이 속도전을 지시한다. 그렇다고 무조건 많은 경찰들을 풀어 범인을 검거하려 하지 않는다. 뇌물을 받거나 언론에 수사 내용을 흘릴 위험이 있는 하급 경찰은 철저히 배제하고 믿을 수 있는 동료들만 투입시킨 것. 하지만 병원에서 피해 여성 디피카 곁을 지킬 사람으론 갓 2주 된 경찰 훈련생을 지목한다. 경찰들 중 피해자를 가장 많이 만날 사람이기에 피해자와 성별이 같고 나이가 비슷한 사람을 배치한 바르티카의 세심함이다.
총 7개의 에피소드로 이뤄진 드라마는 사건 발생을 그린 첫 회를 제외하고는 매회 한 명씩, 총 6명의 범인을 모두 검거하는 모습을 충실히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인도 경찰력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고 정치적 계산도 있었음이 암시되지만, 밤잠 없이 스스로를 혹사하며 며칠간 사건을 쫓던 형사들에게 ‘모든 범인 검거’라는 결과는 분명 뿌듯함을 느끼게 할 만하다.
그러나 이 사건 뒤에 남는 건 무엇일까. 본인의 첫 사건을 막 끝낸 훈련생은 사건 해결을 자축하는 형사들을 보며 차마 함께 웃을 수 없다. 피해자가 계속 마음에 남는다는 그에게 바르티카는 말한다. 맥주병으로 강간을 당한 여성이 있었고 결국 사망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이 사건처럼 언론의 관심을 받지 못해 그대로 지나갔다면서 이런 일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잊으라고. 바르티카는 피해자의 모습에 함께 화내고 아파했고 수사에 진심을 다했음에도 왜 이렇게 이야기하는 걸까. 자조적인 이 말을 우린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인도 뉴델리 사건 발생 4년 전인 2008년, 미국 워싱턴주 청년 복지주택에 살던 마리는 간밤에 방에 침입한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마리의 눈을 가리고 손을 결박한 채 범행을 저지른 가해자는 협박용 사진까지 찍는다. 곧바로 마리는 경찰에 신고하는데, 수사관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날 밤의 일을 묻고 또 묻는다.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또요? 아까 말했는데요”라는 말을 반복하는 마리의 모습은 처참하기까지 하다.
계속되는 진술에 마리는 힘들어하고 수사관들은 작은 내용을 오락가락하는 걸 문제 삼으며 마리 주변을 탐문하기 시작한다. 위탁모 중 한 명은 마리의 행동이 ‘피해자 답지’ 않았다며 조심스레 진술이 거짓일 수 있다는 의문을 제기하고 수사관들 역시 ‘허위 진술은 범죄’라며 그를 몰아세운다. 결국 마리는 자신의 진술이 모두 지어낸 것이라는 거짓 자백을 하고 수사는 종결된다.
그로부터 3년 뒤, 콜로라도주에서 비슷한 사건이 발생한다. 피해자는 복면을 쓴 푸른 눈의 백인 남자에게 눈이 가려지고 손이 묶인 채 강간당한다. 가해자는 협박을 하며 사진을 찍었고 무기도 들었다. 범죄 후엔 피해 여성이 샤워를 하게 만들고 속옷과 시트를 가져감으로써 DNA를 남기지 않았다. 사건의 실마리를 찾지 못해 답답한 듀발 형사는 역시 형사인 남편으로부터 자신의 동료가 비슷한 사건을 맡았다며 연락해보라는 조언을 듣고 다른 관할에 근무하는 라스무센 형사를 만난다.
같은 콜로라도주에서 일어났지만 각각 다른 관할에서 벌어진 두 건의 성범죄. 담당 경찰서끼리 전혀 공유가 되지 않았던 이 사건들은 너무나 닮아있다. 마치 범인이 담당서가 겹치지 않게끔 지역을 옮기며 범행을 저지른 것 같다. 이 가설이 들어맞는다면 이건 명백한 연쇄강간인 것. 두 형사는 수사 방향을 전 지역으로 넓힌다.
결국 범인은 덜미를 잡히고 끔찍한 범행을 시인하기에 이른다. 두 형사는 가해자가 전리품처럼 남긴 피해자들의 사진을 확인하다 3년 전 마리의 사건이 진실이었다는 것까지 밝혀낸다.
마리는 자신을 몰아세웠던 수사관을 찾아가 사과를 받고 시를 고발해 합의금 15만 달러를 받는다. 재판을 진행하면 이보다 두 배는 되는 돈을 받을 수 있단 변호사의 말에 마리는 차분하게 답한다. 이제 그만 끝내고 싶어요.
<델리 크라임>의 실제 사건인 뉴델리 사건 이후 인도에선 성범죄자에 대해 최고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는 강간방지법이 만들어졌다. 이 여파로 가해자 6명 중 4명은 올해 3월 사형당했다. (1명은 옥중 자살했으며 다른 1명은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3년 형을 살고 출소했다) 미국의 연쇄 강간범은 콜로라도에서 327년 6개월 형, 워싱턴에서 68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현재 콜로라도에서 복역 중이다.
하지만 가해자가 무거운 벌을 받는다고 일이 해결된 건 아니다.
인도에선 하루에도 평균 88건의 성폭행 신고가 잇따르고 강간이 유죄 판결을 받는 비율은 채 30%도 되지 않는다. 오죽하면 <델리 크라임> 감독은 “델리엔 2200만 명이 살지만 경찰은 8만 명뿐이니 스스로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할까.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서 피해자 중 한 명은 법정에서 만난 가해자에게 말한다. 도대체 나의 어떤 모습 때문에 나에게 그런 짓을 했나요? 그 행동이 뭔지 알려주면 그것만 바꾸면 될 텐데, 내 일상은 전부 달라졌어요. 이제는 정원에서 책을 읽지도 못해요.
여성 인사들이 추천한 ‘나에게 영감을 준 작품’. 그들은 이걸 보고 앞으로 어떤 드라마와 영화를 만들고 어떤 기준으로 출연을 결정하거나 무를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의 마리는 저 멀리 콜로라도에서 범인을 잡아 준 듀발 형사에게 감사 전화를 건다. 이 일들을 겪으며 희망이 남아있지 않다는 게 힘들었어요. 이 세상에 남아있을 이유가 있을까. 그런데 제가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애써 준 두 분의 이야길 들었어요. 이젠 좋은 일을 상상할 수 있어요.
넷플릭스가 소개한 ‘Because she watched’의 무수한 she에게 여성의 권익이 실현되는 작품을 양산하길 기대하며, 나 역시 누군가의 she가 되기를, 서로가 서로의 she가 되기를 소망해본다. 우리는 봤으니까. Because we watch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