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 라이프 앵그리맨>
여기, 사는 게 귀찮은 남자가 있다. 식구라곤 충직한 개 한 마리뿐. 그나마 죽지 못해 사는 이유가 이 유일한 식구인 개가 개밥 통조림을 스스로 따지 못하기 때문인데, 막상 개밥은 떨어진 지 오래다. 찬장을 여니 사람용 통조림 두 개가 전부. 유일한 식구와 하나씩 나눠먹기로 한 남자는 덜어먹는 것마저 귀찮은지 음료수 먹듯 커리 통조림을 꿀꺽꿀꺽 마신다. 집안엔 설거지 거리가 쌓인 지 오래고 남자는 치울 생각이 없어 보인다.
세상에 흥미라곤 없어 보이는 표정의 남자가 외출을 한다. 집을 나서자마자 맞닥뜨린 우체부는 마침 이 집에 우편물이 왔다며 직접 건네주는데, 남자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우편함에 넣지 왜 날 줘서 귀찮게 하느냐고 시비다. 기부 독려를 하는 청년에겐 ‘어차피 자원봉사 아닌 것 다 안다’며 짜증을 내고 보란 듯이 옆에 있는 다른 단체 사람에게 기부금을 낸다. 그야말로 성질 참 고약하다 싶은데, 이건 어린아이에게도 가차 없다. 학교 담장 너머로 한 아이가 ‘변태! 소아성애자!’라고 외치자 ‘어차피 너 같은 갈색 뚱보는 건드리지 않으니 안심해’라며 아이를 벙찌게 만든다.
남자가 시종 삐딱하게 구는 이유는 얼마 전 아내를 잃었기 때문. 별 다를 것 없는 삶의 유일한 행복이었던 아내가 없는 인생은 엉망으로 살아도 상관없을 것 같다.
한 시즌당 6회, 길이는 회당 30분인 이 드라마의 시즌1은 얼마 전 사별한 중년 남자 토니가 무기력하다 못해 삐딱하게 살아가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자신의 삶을 마구 살아대는 것도 모자라 그 화를 남들에게 풀어대는 토니. 뾰족한 말들을 듣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배려할 리 없다. 그 과정을 거름망 없이 그대로 노출시킨 듯한 이 드라마를 보고 있자면 마치 나도 토니에게 언어 공격을 당한 듯 종종 미간이 찌푸려진다.
토니에게 세상은 시시하고 하찮기만 하다. 그가 수석 기자로 일하고 있는 지역 신문사엔 무료로 배포하는 그들 신문처럼 눈길 한번 제대로 주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뿐이다. 한시도 먹을 것을 입에서 떼지 않거나 시답잖은 질문을 내던지며 방해를 일삼는 동료들. 지역민들의 소식을 취재하러 가면 만나는 이들은 우리 애가 히틀러를 닮았다며 아이 얼굴에 우스꽝스러운 수염을 그려둔 부모, 콧구멍으로 쌍 리코더를 부는 남자, 벽지에 생긴 눌은 자국이 유명 배우의 얼굴을 닮았다는 사람들이다. 한편으론 어이없는 웃음이 툭툭 터질만한데 토니에게 이것들이 그럴 리 없다.
여타 다른 드라마처럼 그 흔한 미남 미녀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긴장감 있는 스토리가 심장을 쫄깃하게 하지도 않는데 거기다 이 드라마는 주인공이 짜증 가득에 무례하기까지 하다. 보다 보면 그런 생각도 든다. 아니, 도대체 왜 저따위로 사는 거야? 우울증이면 우울증인 거지 남들한테 막 대할 정당한 이유가 돼?
그런데 웬걸. 이 드라마는 시즌2가 공개된 지 2주 만에 시즌3 계약을 체결했다. 영국 출신 코미디언이자 프로듀서인 리키 저베이스가 제작과 각본, 주연까지 도맡은 <애프터 라이프 앵그리맨>은 분명 영국 특유의 시니컬함을 지닌 드라마다. 그게 어쩌면 이 드라마의 진입장벽일 수 있다. 인물들이 무심한 듯 툭툭 내던지는 말이 그렇다. 죽음을 목전에 둔 치매 아버지를 돌보는 요양사에게 토니가 ‘거의 다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사람을 지켜보는 건 어떻냐’고 묻는다거나, 여자친구를 약물 중독으로 잃은 줄리언에게 공감을 표하자 ‘제 여자친구의 죽음은 어차피 아무도 슬퍼하지 않아요’라고 한다거나.
하지만 시니컬함에 따뜻함이라는 잉크를 한 방울 똑 떨어뜨려 그것이 서서히 번지듯, 이 드라마엔 시청자를 천천히 붙들어 매는 뭔가가 있다. 위 대사들만 봐도 그렇다. 대화도 통하지 않는 노인에게 수도 없이 말을 걸고 매일 찾아오는 건 그저 의무감과 죄책감 때문은 아닐지, 생전의 사회적 지위가 죽음에 대한 슬픔의 정도를 정하는 잣대가 되어도 괜찮은 건지 우리는 그들의 말을 통해 되새겨본다.
이 드라마를 포근하게 만드는 건 대사뿐만이 아니다. 사실 돌이켜 보면 토니 옆에 있는 사람들은 토니를 가만히 위로하고 포용하고 있었다는 것.
끊임없이 뭔가를 먹고 있는 동료는 뒷목살을 잡아대며 놀리는 토니의 장난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래도 괜찮냐고 다른 동료가 물어보는데, 친구니까 받아줄 수 있다며 쿨하게 넘긴다. 줄리언을 통해 알게 된 성 노동자 록시는 불쑥불쑥 나타나 토니에게 잔소리를 해댄다. 쌓아둔 설거지를 보고 타박하면서도 밥은 어떻게 챙겨 먹는지를 묻는다.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생초짜 신입사원은 삐딱한 사수의 태도에도 불쾌함 하나 없이 묵묵히 제 일을, 그것도 잘 해낸다.
우리가 사회에서 보통 별 볼 일 없는 사람,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사실은 토니 곁을 가장 굳건히 지켜주고 있었다는 것. 그 역시 자신의 가시 돋친 말과 행동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 너무나 아무렇지 않았음을, 어쩌면 그게 최고의 배려였음을 서서히 깨닫는다.
사실 우리 삶이 그렇지 않은가. 우울하고 짜증 나고 화가 날 때 우리가 위로를 얻는 건 꼭 유명한 책과 글귀, 평이 좋은 영화와 음악, 훌쩍 떠난 여행지가 아닌 평소엔 잊고 지냈지만 늘 곁에 있던 주변의 아주 소소한 것이 되기도 한다는 걸. <애프터 라이프 앵그리맨>은 단순한 그날의 감정보다 더 진폭이 큰, 자살 충동을 느끼는 우울증 환자 토니의 이야기지만 그것도 어쩌면 우리가 살면서 쌓아온 것들, 지금의 우울감에 그저 다 부정해온 것들이 다시금 힘이 될 수도 있음을 일러주는 듯하다.
실제로 시즌1 마지막이 되면 토니는 삐딱하게 굴던 태도를 고쳐먹고 따뜻하고 배려심 있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건 영화처럼 큰 계기가 있지도, 중대한 사건을 겪어서도 아니다.
그래서 시즌2의 토니는 그 전편의 기운을 받아 달라지느냐고? 그게 쉬울 리 없다. 때론 다 포기하고 확 그만두고 싶기도 하다. 나만 힘든 것 같고 정체된 듯하다. 하지만 적어도 전보다 시도하고 주변인에게 관심을 갖는다. 그게 설령 잘 되지 않더라도 일단 해보는 거다.
시즌2는 토니가 새로운 관계를 맺을 것을 암시하며 막을 내린다. 아마 다음 시즌에서도 그의 삶은 순탄하지 않을 거다. 그렇지만 우리는 안다. 삐그덕 대는 그의 삶 곳곳엔 그를 일으켜줄 수많은 호의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좀 엉망이어도 살아볼 만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