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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탕국 Jan 31. 2021

진짜 뉴요커의 멋이란 게 폭발한다

<도시인처럼>


프랭크 시나트라는 노래했다.


난 뉴욕의 일부가 되고 싶어요. 뉴욕의 심장부를 가로지르고 잠자지 않는 그 도시에서 깨어나고 싶어요.
나는 오래된 도시 뉴욕에서 새 출발을 할 거예요. 뉴욕에선 모든 게 당신에게 달려있어요.

- 프랭크 시나트라, <new york new york> 중


가사를 전부 읽어보면 알 수 있는 충격적 사실. 화자는 아직 뉴욕에 도착도 안 했다!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있지, 내가 오늘 뉴욕으로 떠나는데 동네방네 소문 좀 내주겠니?


세월이 흘러 제이지와 알리샤 키스도 노래했다.


영화에서나 나오는 그런 곳에서 자랐죠.
사람들은 말해요. 여기서 뭔가 할 수 있다면 어디서든 할 수 있다고.

뉴욕은 꿈이 이뤄지는 콘크리트 정글이죠. 당신이 하지 못할 일은 없어요. 이 거리는 새로움을 느끼게 하고 이 불빛이 영감을 줄 거예요. 뉴욕, 뉴욕, 뉴욕에 귀 기울여 봐요.

- 제이지 & 알리샤 키스, <empire state of mind> 중


뉴욕에서 나고 자랐다는 화자는 마약과 소음이 뒤엉키는 도시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동시에 이 도시가 설렘으로 가득하다고 찬양한다. 마치 이렇게 말하며 우쭐대는 듯하다. 어딜 가든 이렇게 대단한 도시는 없을걸?


뉴욕이 대체 어떤 곳이기에 토박이부터 아직 도착도 안 한 사람까지 목소리 높여 외치는 걸까. 꼭 유명 가수들이 아니더라도 주변만 해도 뉴욕에 다녀온 후, 혹은 아직 가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뉴욕병’을 앓는 사람이 얼마나 많던가.

그럴 만도 한 게 뉴욕은 미국의 수도 지위를 박탈당한 지 수백 년인데 수도보다 더한 상징성을 자랑하기 때문. 월스트리트, 국제연합 본부, 브로드웨이, 세계 4대 패션위크, 미국 최대 방송사가 모두 모인 것만 봐도 이곳이 금융과 경제, 국제정치, 문화와 패션, 언론까지 아우르는 거대 도시임을 알 수 있다. 이 말인즉슨 세상에서 영향력 있다는 사람들 중 꽤 많은 이들이 이곳에 산다는 뜻이고, 그만큼 우리는 그들이 쏟아내는 말과 행동에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생각해 보라. ‘어느 도시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의 가장 유명한 고유명사가 무엇인지. 바로 ‘뉴요커’다. 서울에 30년 이상 살면서 서울 사람이라는 영어 단어는 몰라도 뉴요커는 진즉에 알고 있었다고! (참고로 서울 사람이라는 뜻의 영어 명사는 ‘서울라이트 seoulite’. 3년 전에야 습득했다.)


우리가 귀 기울여 듣고 눈여겨보는 바로 그 뉴요커, 심지어 50년 차 뉴요커인 작가 프랜 리보위츠가 역시 뉴요커인 명 감독 마틴 스콜세지가 연출하는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뉴욕과 뉴욕에서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제이지의 랩처럼 뉴욕을 흉보다가도 프랭크 시나트라의 노래처럼 뉴욕의 찬란함을 자랑한다. 세계의 수도라 불리는 이 도시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그가 이야기하는 ‘진짜 도시인처럼 산다는 것’은 뭘까? 나이 많은 사람이 자기가 살아온 지역과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혹시 미국형 꼰대의 이야기는 아닐까?



[도시인처럼. Pretend it’s a city. 2021]

프랜 리보위츠. 1950년에 태어나 70년에 뉴욕으로 이주, 지금까지 수십 년째 거주하는 뉴요커이자 수많은 칼럼과 강연을 통해 유명세를 이어가는 대작가다. 촬영지에 들어서는 그의 착장은 70대 노인 치고 꽤나 젊다. 부스스 부풀어있는 단발에 어깨가 한껏 올라간 뽕 코트, 찔릴 듯 빳빳한 셔츠에 폭넓은 청바지 차림으로 휘적휘적 뉴욕 거리를 걷는 모습을 보며 처음 든 생각은 ‘이 분 젊을 때 욕 좀 먹었겠네’였다. 그만큼 첫인상이 평범하지만은 않다. 남들과 다르면 일단 실눈 뜨고 주시하는 게 인간이니까, 그런 의미로 꽤 ‘실눈질’ 당해봤을 것 같다.

그런데 입을 열면 나오는 말들은 옷차림보다 더 젊다. 아니, 나이 따질 것 없이 기발하고 유쾌하다. 독설 같은데 유머처럼 진담 같은데 농담처럼, 그게 이 대작가의 특징. 게다가 이 7편의 다큐멘터리에선 돈, 재능, 예술, 건강 등 민감한 주제에 대해 얘기하니 위험도가 상승한다. 그런데 웬걸, 마지막 편이 끝나면 아마 많은 사람이 이 독특한 뉴요커의 매력에 흠뻑 빠지리라.


50년 차 뉴요커인 그에게 뉴욕은 예나 지금이나 정신없이 시끄럽고 번잡한 도시다. 세탁소 하나 찾아가는 것도 <니벨룽겐의 반지>와 같다. (바그너가 작곡한 이 4부작 오페라는 공연하는 데만 약 15시간이 소요된다) 잠시만 한눈팔면 소매치기당하는 건 예삿일이다. 경찰마저 도둑질당한 사람에게 당연하다는 듯 이야기하는 도시에서 살아가려면 연필 한 자루도 목숨처럼 부여잡아야 한단다. 내 한 몸 건사하기 위한 집값과 생활비는 어떤가. 프랜은 자신을 포함해 뉴욕 시민 8백만 명이 아마도 생활비에 허덕이며 이 도시에 살아가고 있을 거라고 말한다. 글로만 벌어먹고 살기 힘들어 택시 운전까지 했던 그처럼, 아니 그 한참 전에 살아남기 위해 바다를 건너온 조상처럼 말이다.


프랜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은 이것 말고도 아주 많다. 도대체 지하철 상태가 이토록 구린데 왜 그건 내버려두고 역 안에 유명 작가의 예술품 따위나 설치하는지, 미술품 경매에선 언제부터 작품의 질이 아닌 작품 가격을 보고 박수를 치고 앉았는지, 왜 사람들은 건강 관리를 강요하며 시도 때도 없이 건강 주스를 마시고 도시 미관을 해치는 요가 매트를 이고 다니는지 모를 일이다.

낡은 지하철역에서도 우아한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고 명작 경매 최고가 신기록을 남기고 ‘건강한 나’를 위해 바쁜 시간을 쪼개는 라이프 스타일은 분명 세계의 트렌드를 선도하는 뉴욕의 자부심이다. 하지만 동시에 프랜은 묻는 듯하다. 정말 그게 뉴욕의 모습이야? 진짜 그게 당신이 바라는 삶이야? 혹시 트렌드를 선도하는 뉴욕에 산다는 이유로 트렌드에 끌려가는 건 아니야?

뉴욕은 지금과 달라질 거란 걸 알 만큼 이 곳에 오래 살았다고 자신하는 프랜 리보위츠 / 이미지 출처: 뉴욕타임즈 캡처


물론 그에게 뉴욕은 어마어마한 기회를 준 곳이기도 하다. 앤디 워홀(이 이름이 나오는 순간 프랜이 사실상 노인에 속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과 애증의 관계를 형성하며 일한 것도, 글로 먹고살게 된 것도, 영화에 출연한 것도 뉴욕에서 이뤄졌으며 심지어 이 다큐를 찍게 된 것도 뉴욕에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을 만났기 때문이다. 평온하지만 재미라곤 없는 고향과 달리 사건사고도 많고 번잡한 뉴욕은 늘 흥으로 넘치는 짜릿한 공간임이 틀림없다.


혹자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좋은 건 다 취해놓고 왜 이제 와 싫은 소리 하는 거야? 그렇게 싫으면 떠나면 되지 굳이 이곳에 붙어있을 이유가 있어?

하지만 신랄한 비판은 프랜이 뉴욕과 뉴요커를 너무나 아끼기 때문이다. 세계의 중심이 되어 버린 이 찬란한 도시와 여기 사는 이들이 단지 뉴욕과 뉴요커라는 껍데기에만 자부심을 가질 게 아니라, 제발 세계 일류 도시와 그곳의 진정한 도시인처럼 상식과 품격을 갖추길 바라기 때문이다.그게 바로 프랜이 말하는 뉴욕의 멋, 뉴요커의 본질이다. 그것이 실현되는 날을 꿈꾸며 프랜은 결코 뉴욕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 프랜 리보위츠를 검색하면 뉴욕 대표 독립서점 스트랜드의 존립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싸우는지를 알 수 있다. 설령 다큐에서 뉴욕을 세게 비판했더라도 이 정도 뉴욕 문화 지킴이인데 ‘까방권’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러나저러나 현재에 불만을 털어놓는 70대 꼰대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틀렸다. 중간중간 프랜이 지금보다 몇십 년은 젊었을 때의 이야기와 당시 토크쇼에 출연했을 때의 자료화면이 나오는데, 그는 예나 지금이나 꾸준히 뉴욕에 대해서는 독설가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프랜은 절대 나이와 경험을 앞세워 자신이 정답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밝히고, 그것을 억지로 이해하는 척하지 않으며, 모든 이들에겐 각각 걸맞은 세대가 있다고 말한다. 각자 현재의 위치에서 품격과 소신을 잃지 않고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어떻게? 그의 명대사처럼 ‘말하기 전에 생각하고, 생각하기 전에 읽으면서’. (언행일치를 위해 부지런히 읽고 생각하는 프랜의 모습이 담긴 마지막 회차는 그에게 홀랑 빠지게 되는 이유이자 스스로의 삶을 반추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다큐 여기저기 양념처럼 스콜세지 감독의 낄낄대는 웃음소리가 배어있다 / 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이 정도면 프랜 리보위츠와 그가 말하는 뉴욕을 좀 더 알고 싶지 않은지?

넷플릭스 다큐 <도시인처럼>은 30분짜리 7편으로 이뤄져 있다. 좀 긴 영화 한 편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아이리쉬 맨 같은...) 혹은 영화 두 편 정도 길이다. 그 안에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펼쳐지고, 그걸 보면 뉴욕을 진하게 여행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심지어 여행책이 소개하는 뉴욕의 명소는 거의 나오지도 않는데 말이다.

어쩌면 이 다큐를 본 후 누군가는 새로운 ‘뉴욕병’에 걸릴지도 모른다. 나는 뉴욕을 방문한 후 아주 극소 부분만 제하고 나머지는 너무나 별로라고 생각했는데도 뉴욕에 다시 가보고 싶어졌으니 말이다. 사실은 프랜 리보위츠가 인터뷰한 바, 스콜세지 감독과 방문한 뉴욕 공립도서관, 명대사가 새겨진 머그를 살 수 있는 기념품점 같은 델 가보고 싶은 맘이 더 큰 걸 보니 어째 ‘뉴욕병’의 하위분류인 ‘프랜병’에 걸린 것 같다만.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 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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