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으로 그린 여름 풍경화
책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사둔 지는 오래되었는데 이제야 완독했다. 건축에 관한 이야기이고 작가의 묘사가 탁월해 머릿속에서 찬찬히 그림을 그려가며 읽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스태킹 체어와 윈저 체어를 구별하게 되고 공간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난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내가 앉아 있는 공간과 가구를 둘러보는 일도 잦아지는데 읽는 속도가 더뎌지는 이유다. 장편인데다 스펙터클한 경합, 화려한 결과물이 아닌 건축 설계 과정을 공들여 담았으므로 누구든 시간을 들여 읽어야 할 것이다.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무라이 건축사무소의 여름 별장을 배경으로 한다. 커다란 활화산 기슭에 자리잡은 별장에선 건축 설 계와 잦은 회의 외에도 세 끼를 만들어 먹고, 식재료를 재배하고, 책을 읽고, 사색도 한다. 별장에서 일어나는 일상을 가늘고 촘촘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묘사한다. 볕을 쬐는 새끼 곰의 등에서 날 것 같은 향기가 나는 흙, '잇피츠 게이조 쓰카 마쓰리소로'(붓을 들어 문안올리옵니다)라고 우는 멧새 등의 묘사엔 밑줄을 긋지 않고선 견딜 수 없었다. 책을 모두 읽고 나면 지금 이 여름의 풍요로움을 손끝으로, 코끝으로 촘촘히 감각하게 된다.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플레이리스트 노트
완고한 노건축가 무라이 슌스케는 화려하고 웅장한 것보다 자연과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건축을 지향한다. 그가 운전하거나 도면을 그리며 듣는 섬세하고 청명한 음악들에 그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인물마다 음악 취향도 크게 다르다. 마리코는 주로 블랙 컨템포러리나 AOR(Adult-Oriented Rock)을, 주인공은 비틀스를 듣는다.
난로 옆에 있는 오디오 앞에 쭈그리고 앉아 스위치를 켜 베토벤의 교향곡 8번을 플레이어에 올려놓는다. 우치다 씨는 커피를 끓이고, 유키코는 남아 있던 애플파이를 나누었다. 식당 테이블에서 파이를 먹기도 하고, 난로 앞 소파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거나 막 도착한 건축 잡지를 뒤적이면서, 으르렁거리는 비바람에 지워질 것 같은, 그러나 어딘가 경쾌하고 편안한 교향곡을 듣는다고 할 것도 없이 모두 듣고 있었다.
p54
책상에서 하는 업무가 끝나면 마리코는 커다란 책상 가장자리에 놓인 새 워크맨을 켜 헤드폰을 쓰고 블랙 컨템포러리(흑인이 만 든 현대음악)나 AOR(Adult-Oriented Rock)을 듣는다. 귀는 알자로랑 마이클 프랭크스 노래를 듣고, 눈과 손가락은 냉장고나 식량고 재고를 체크한다.
p101
블랙 컨템포러리를 듣는 사람은 건축과 학생 중에는 한 명도 없었다. 장 보러 갈 때마다 마리코가 차 안 에서 트는 음악을 들으면서, 어느 틈엔가 나도 일렉트릭 피아노와 베이스의 리드미컬한 소리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었다. 가끔 들려오는 가사는 당신이 없어서 쓸쓸하다느니,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느니,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서 내 가슴은 찢어질 것 같다 등이었다. 괴롭다느니 슬프다느니 해도 선율은 달콤하고, 애절하고, 어디까지나 가볍다. 마리코에게 물어봤더니 지금 나오는 음악은 테디 펜더그래스라고 한다. (중략) 나는 이대로 계속 운전하는 마리코 옆에 앉아서, 사랑이니 당신의 눈이니 하는 노래를 듣고 싶기도 하고, 그 래서는 몸 둘 곳이 없어질 것 같은 두 마음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p110
오디오는 모두 영국제였다. 쿼드 앰프, 플레이어는 린, 스피커는 탄노이였다. 이 세트로 블랙 컨템포러리를 들으면 어떤 소리가 날까. 양손을 펼친 것보다도 폭이 넓은 레코드 선반에는 대체로 클래식뿐이었 고, 재즈도 약간 섞인 LP컬렉션이 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
몇 장 꺼내보고 나서 되풀이해서 듣는 듯 한, 재킷이 닳은 레코드를 골랐다. 클리퍼 드 커즌이라는 서sir 칭호가 붙은 피아니스트의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이었다.
B면에 플레이어의 암arm을 천천히 내려놓는다. 북 하고 고막을 미는 듯한 소리가 나고 나서 가을 햇살처럼 어딘가 쓸쓸함을 머금은 곡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소파에 앉아 피아노곡을 듣고 있자니 마리코의 아버지가 같이 있는 듯해서 빈집에 무단으로 들어온 것처럼 거북한 마음이 든다.
p111
연주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띵' 하고 오븐 소리가 들리고, 달콤한 향기가 떠돌았다. 나는 암을 올려 다시 3악장을 처음부터 듣기로 했다.
p171
렌즈가 두툼한 안경을 쓰고 전신에 힘이 넘쳐흐르는, 판목에 얼굴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대고 조각하는 무나가타 시코의 모습이 떠오른다.
"기분이 좋을 때는 말이야, 쭉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어. 베토벤의 제9교향곡 합창 부분을 걸걸한 목소리로 낮게 으르렁거리듯이 노래하면서 조각하더라고."
우치다 씨는 그 걸걸한 목소리를 흉내내 보였다.
"덮어놓고 죽죽 조각하는 것 같지만 그렇 지 않아. 노래한다는 것은, 즉 숨을 쉬면서 손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니까 손놀림이 가벼웠을 거야. 사람은 말이야, 그냥 의자에 앉아 있을 때조차 어깨에 힘이 들어가거든. 그렇지만 숨을 쉬면서 몸의 긴장을 풀면, 어깨에서 힘이 빠지지. 호흡을 편히 하면 어깨도 굳지 않아."
p190
가사이 씨 가 일어나서 선반에서 LP를 꺼내 턴테이블에 올려놓는다. 바늘이 내려오기를 고대했다는 듯이 일제히 관현악기가 울리기 시작 한다. 클라리넷, 오보에, 호른, 바셋 호른, 파고토···. 모차르트의 ‘그랑 파르티타’이다. 개방적이고 경쾌해서 식당 분위기가 일변한다. 토요일 대낮, 식사를 끝내고 조금 더 가만히 있고 싶은 우리를 누군가가 너그럽게 인정해주는 듯한 음악이었다.
p225
중학생 때 비틀스 노래 가운데서 대륙검은지빠귀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 그렇게 생각했다. 영국에서는 블랙버드라고 불리는 대륙검은지빠귀 울음소리는 리듬도 멜로디도 약간 복잡하다. 가슴을 부풀리며 우는 모습도, 지저귀는 멜로디도, 검은개똥지빠귀와 많이 닮았다. 여러 세대에 걸쳐 오랜 시간을 들여서 멀고 먼 동쪽 섬나라에 오기까지, 날개 모양이나 노랫소리가 조금씩 변화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p292
난로는 피우지 않았다. 작은 소리로 모차르트의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협주 교향곡’이 울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 모습은 이미 안 보였다. 자기 방에 돌아갔던지, 목욕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p357
저녁을 마치고 둘이 설거지를 하고 나자, 마리코가 앰프 스위치를 켜고 턴테이블에 레코드를 올려놓았다. 기타로 연주한 바흐의 전주곡이었다.
"피아노가 아니네." 내가 말했다.
"기타 소리가 좋아."
옆방에는 스타인웨이의 그랜드피아노가 있다. 이제 안 치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p370
《햄릿》에서도 햄릿의 애인 오필리아의 무덤 장면에 등장한다. 데이지와 쐐기풀로 짠 화환을 큰 버드나무에 장식하려던 오필리아는 잘못해서 강에 떨어져 목숨을 잃는다. 비탄에 잠긴 오빠가 오필리아 무덤을 향해 ‘아름답고 때 타지 않은 여동생의 몸'에서 피어날 꽃, 허츠이즈의 이름을 입에 올린다. 모차르트도, 스카를라티도 ‘제비꽃’이라는 가곡을 남겼다.
"유럽 사람에게 이 꽃은 그 무엇인 거겠지요.” 후지사와 씨가 말한다.
p402
읽다 만 문고본이 페이지가 펼쳐진 채 침대 가장자리 에 떨어져 있다. 슈만의 《음악과 음악가》였다. 책갈피를 껴두고 안경이 놓여 있는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엽차가 든 찻잔이 손대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 선생님은 이 방에도 북셀프 스피커를 갖다놓고 일하는 중에도 볼륨을 줄여서 피아노곡 레코드를 듣는다. 선생님은 큰아버지로서 마리코가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남몰래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p405
잠시 뒤에 일층에서 말러의 교향곡 4번이 들려왔다. 소파에 앉아서 레코드를 듣고 계시리라. 아무도 없는 널찍한 설계실에서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말러를 들으면서 작업을 계속했다. 얼굴을 들자, 창밖에 대낮의 햇살을 받은 계수나무의 노란 잎이 100와트 백열등처럼 빛나고 있었다.
p432
그전 주말, 나는 마리코한테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피아노곡을 몇 곡 골라서 연주해달라고 부탁했다. 테이프에 녹음해서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선생님께 들려드리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은 나의 감상적인 생각이 아니라 뇌 질환에 대한 책을 여러 권 읽는 중에 청각이 인간의 진화과정 중에서도 태곳적부터 있었던 원시적인 것으로, 의식이 맑지 않는 상태에서도 기능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p444
18번 국도를 달리는 차 안에 마리코가 치는 피아노 소나타가 흐르기 시작했다. 터치는 부드럽고 막히는 곳이 없었다. 교양이라고 할 레벨이 전혀 아닌 것에 대한 놀라움은 이내 사라지고 그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와 맞서는 것도 아니고 친한 친구에게 보내는 것도 아닌, 하물며 애인에게 들려주려는 것도 아니고 혼자 자기하고 대화하고 있는 것 같 은 선율이었다. 슈베르트는 남겨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p450
왼쪽 앞에 보이는 아사마 산은 완전히 눈에 덮여 있었다. 글러브 박스에서 카세트테이프를 꺼내서 틀었다. 선생님이 차에서 자주 듣던 곡이다. 카세트에는 만년 필로 '하이든 사계'라고 적혀 있다. 선생님의 꼼꼼한 글씨였다.
테이프는 3부 가을부터 시작했다. ‘사계’는 북쪽으로 향하는 겨울 길 여행을 위해 준비된 음악인 것처럼 들렸다. 나카가루이자와에서 좌회전하여 구불구불한 언 덕길을 올라갈 즈음에는 와인을 맛보는 기쁨을 밝고 튀는 듯이 합창하는 가을의 최종 파트에 들어서 있었 다. 구불구불한 길이 끝나자, 갑자기 조용해지면서 어두운 겨울의 서주가 시작되었다. 유키코는 바깥을 보면서 "추워졌나봐" 하고 말했다.
p451
똑바른 길이 이어졌다. 길가에 쌓인 가루눈이 강풍에 휘날려 도로 위를 미끄러지듯이 흘러간다. ‘사계’는 침울한 곡조가 끝나자, 여성을 감싸는 베일을 짜기 위한 ‘물레의 노래’가 되었다. 그것은 격려의 노래이고 사람들을 기쁨으로 유도하는 노래였다. 그것이 이윽고 어딘가 윤택한 울림이 있는 사랑의 노래로 변한다. 우리 인간의 삶과, 그것을 지탱하고 때로는 위협하는 자연을 그대로 긍정하려 한 하이든의 만년의 의지가 넘쳐 있었다. 선생님은 차를 운전할 때, 싫증내지 않고 이 음악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차가 아오쿠리 마을에 들어섰다. 음악은 조금 전에 끝났다.
p460
고속도로에 들어섰을 때, 선생님이 자주 듣던 하이든의 ‘사계’를 틀었지만 선생님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워크맨으로 들려드린 마리코의 피아노에 대해 언젠가 물어보고 싶었지만, 선생님 얼굴을 보고 있는 동안에 그 마음이 시들어버렸다. 말의 자유를 빼앗긴 상태로 선생님은 무엇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슬픔이 나 짜증나는 감정은 가끔 전달되어온다. 사소한 일이라도 기쁨의 감정이 전달되어올 때까지 도대체 얼마큼의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하이든의 ‘사계’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안을 공연히 채울 뿐이었다. 아무도 듣지 않는 음악은 서먹서먹한 음의 연속에 지나지 않는다. ‘여름’의 합창이 끝났을 때 오디오 스위치를 껐다.
무슨서점 @musn_books의 "한문단클럽"에
[책듣기]로 연재하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