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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알 Nov 06. 2018

우울한 와중에 사진 한 장

「우리들의 20세기」, 를 보고 

 

필름포럼에 마지막으로 간 게 언제였더라?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다. 계절도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건 영화관 안의 정경, 사람이 없었고, 조용했고, 커피도 팔았다. 오랜만에 영화관에 가는 오늘은 올해 중 가장 추운 날이었던 것 같다. 추웠다. 추웠고, 바람이 찼고, 손을 꽉 쥐고 있으면 땀이 증발해서 더 시렸다. 나는 걸었다. 버스정류장도 어차피 꽤나 걸어야했으니, 나는 그냥 끝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이어폰을 안 가져와서, 걸어가는 길이 지루했으나 의외로 빨리 도착했다. 예전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던 것 같은데 오늘은 계단으로 내려갔다. 계단 끝에 맞닿은 입구부터 사람들이 붐볐다. 아니 고작 10명 정도?로 붐볐다는 표현을 쓸 수는 없겠지만 분명히 붐볐다. 그런 곳이 아니었는데,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였고 말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로 풍성했고, 곳곳에 열린 뚜껑으로 김을 뱉은 커피들로 실내에 향이 찼다. 내가 제일 먼저 도착했고, 또 한 명이 도착했고, 나머지 두 명도 도착했다. 우리는 4명이 쓰기에는 작은 테이블에 두꺼운 외투를 벗어놓았다. 테이블 위로 옷이 쌓였고, 남은 공간은 없었고, 나는 창문으로 밖을 쳐다보았다. 사람들이 떠는 게 보였다. 우리는 무슨 얘기를 했는데, 그때에도 시덥지 않은 얘기라고 생각했으니 지금 기억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우리 중 한명이 카메라 렌즈를 샀다고 했다. 그걸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나는 1995년에 태어났다. 그 말은 20세기를 딱 5년 경험했다는 뜻이다. 그마저도 군데군데 망각되어서 내게 20세기는 먼 세계다. 우리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유년의 기억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면서 나머지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니, 우리는 20세기를 기억하지 못하면서 그것의 여전한 영향력 아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일어났던 이야기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분명한 향수이다. 그렇지 않다면 응답하라 시리즈를 보면서, 「동감」이니, 「8월의 크리스마스」니, 「미술관 옆 동물원」, 이런 영화들을 보면서 느끼는 아련한 감정을 설명할 길이 없다. 「우리들의 20세기」는 미국인들의 향수를 자극할 것이다. 나는 20세기의 끝자락을 유년시절로 한국에서 보냈으니 스크린에 그려지는 그들의 삶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분명히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든다. 내가 앞의 작품들을 볼 때 느끼는 감정들은 그들도 느낄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들만큼 이 작품 속에서 보이는 삶의 행태는 일관성 있다. 그럴 듯 했고 질색했으며, 살짝 부러웠다. 어머니는 아들을 적당히 과소평가했고, 아들은 적당히 엇나갔으며, 둘은 적당히 싸우고 화해했다. 아들은 어머니로부터 도망쳐 나와 누나들에게 피신한다. 누나들은 제이미를 자기의 색으로 물들이려 노력하며, 그런 노력들이 투쟁하는 가운데 소년은 성장한다. 두 누나도 성장하고, 어머니도 성장한다. 그러나 이런 성장은 순전한 기만이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우리는 그저 적응할 뿐이다. 페미니즘에 적응하고,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고, 폭력과 섹스에 적응하고, 사랑과 이혼에 적응할 뿐이다. 어머니는 매일을 적응된 우울 속에서 살며, 에비는 매일을 적응되지 않은 우울 속에서 산다. 쥴리는 우울의 꽃망울을 터뜨리려 한다. 제이미는 조금씩 삶의 우울을 체감하기 시작한다.          


대공황 시대의 사람들이 시대의 격변 속에서 우울의 이유를 찾았다면, 그 이후의 사람들은 우울의 이유가 될 만한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정신병자 같은 노래를 듣고 미친 사람처럼 분장하며 서로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드러낼 수 있는 밤의 장소를 찾는다. 우울에는 이유가 없고 그렇기에 해결 방법도 없다. 우울은 덮어둘 수밖에 없다. 음악과 담배와 섹스와 쾌락으로. 도로시에는 제이미가 자신과 같은 우울 속에서 살지 않기를 바라지만, 소년은 조금씩 우울의 세계를 체화한다. 어머니가 두 누나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은 아주 적절했으면서도 아무 의미 없는 행위였다. 두 사람은 이미 우울 세계의 주민이었으며, 사실은 이 세기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우울 세계의 주민이므로 우울로부터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놀라운 점(이자 동시에 영화적인 점)은 5명의 의사 가족, 서로가 각자의 우울을 인정하면서 각자의 대처 방법을 존중하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점이다. 어머니는 화를 내지 않는다. 새로운 시대를 배우려 한다. 춤을 춘다. 때로는 담배를 같이 피기도 한다. 잠을 같이 잔다. 키스를 한다. 물론 서로의 의도가 그대로 전달되지는 않는다. 그런 일치와 불일치, 따라오는 좌충우돌, 그게 바로 이 영화의 이야기다.          


에비는 줄곧 사진기를 들고 다닌다. 자신의 물건을 찍고, 제이미를 찍고, 클럽의 어느 한 곳을 찍고, 계속 찍는다. 나는 사진기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5명의 인물들의 가족사진이 나올 것이라 예상했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1979년의 짧은 순간이 지나고, 모두는 서로 헤어지고 각자의 길로 떠난다. 누가 누구와 결혼했고, 어디로 떠났으며, 이혼했고 언제 죽었다. 인물들의 뒷얘기가 내레이션으로 언급되면서, 영화의 배경 1979년은 마치 집의 어느 한쪽 벽에 걸려있는 사진처럼, 추억의 형태로 남게 된다. 그러나 모두가 같이 찍은 사진은 없다. 나오지 않는다. 모두 1979년을 뒤로 하고, 이 좌충우돌을 잊었는지 말았는지 떠나고 결혼하고 이혼하고 죽는다. 나는 이 허망함을 사랑한다. 그것에는 결국 모든 것이 잊혀진다는 우울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대공황의 우울은 레이건 행정부 때의 우울로 이어지고 곧 21세기 한국의 우울로 이어진다. 아니 이어진다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을까? 우울은 각개 발생하는 것 아닌가? 뭐가 되었든 나의 우울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는 점에서 위로를 받는다.          


일상적 우울과 허망함 속에서 영화 속 어느 한 장면을 기억한다. 쥴리와 제이미가 바다로 여행 갔을 때, 제이미가 갑자기 방을 뛰쳐나가고 쥴리는 울고, 도로시에와 에비와 윌리엄이 급하게 제이미를 찾아 나선다. 도로시에가 우는 쥴리를 안아줄 때, 모두가 한 방에서 흐르느 음악에 맞춰서 춤을 출 때, 서로 눈을 맞추고 희미한 미소를 짓는 바로 그 장면. 나는 그 장면이야말로 여러 개의 우울이 서로 등을 맞대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모두가 각자의 우울 속에서 허우적댈 때 그를 지탱해주는 특별한 순간이 될 것임을 믿는다. 그 장면은 카메라로 담지 않았던 추억의 순간 그 자체며, 회고할 때 다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순수의 장면이다. 그래서 나는 앞의 영화관의 정경을 길게 묘사했다. 아무렇지도 않았던 그때의 우리들, 시덥잖아서 기억도 안나는 이야기들, 그것들은 이제 알맹이는 빠지고 인상으로만 남을 것이다. 점점 빠져가는 알맹이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나는 이 글을 쓴다. 우리 역시도 곧 각자의 우울 속에서 각자의 길을 걸어갈 것이니까. 대학을 졸업하고, 먼 곳으로 떠나고, 누군가와 결혼하고(혹은 이혼하고), 자식을 낳고, 병에 걸리고, 죽어갈 거니까. 그 즈음 되면 22세기를 맞이할 수 있든 없든 간에, 우리는 21세기와의 불화를 겪을 것이다. 적응과 불화 모두가 한 세기의 내용이다. 그 속에서 2017년 유난히 추웠던 초겨울의 하루, 영상미도, 지루했던 아나운서의 평론도, 목도리도, 패딩도, 추위도 뭐도 이 날에 있었던 모든 일이 사진 한 장처럼 모두에게 힘이 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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