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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알 Nov 08. 2018

「피로사회」에서 위안받기

「피로사회」를 읽고

언젠가 방 안에서 홀로 우울할 때가 있다. 갑자기 몰려오는 우울, 나는 그것이 이 작은 방에서 혼자 있는 고독 탓이라고, 사람을 약해지게 하는 밤의 마력 탓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일찍 자거나, 누군가와 함께 있으려고 노력했지만 대개 그런 노력은 일회적으로 효과를 보고 말 뿐이었다. 밤은 매일매일 끊임없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산다는 건 점점 지쳐가는 과정이라고. 누군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냐며 거울을 보면, 눈꺼풀은 항상 1/4정도 내려가 있었고 눈가는 쳐져갔으며, 팔자주름이 예전보다 짙어있었다.     


이 책은 매일 피로에 절어있는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책이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고, 우리 사회가 성과사회로서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구조로 바뀌게 되었다고, 나만 그런 게 아니라고, 나만 힘든 게 아니라고, 우리가 서로 벽을 쌓아서 가둬두고 있는 내면의 깊은 곳에는 모두 똑같은 종류의 피로와 고민이 숨어있다고. 우리 모두가 피로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로가 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피로로 탈진한 개인들이 서로의 박자를 공유한다는 게 이런 걸까. 한때 서로의 피로를 듣는 것만으로도 더 깊은 우울 속으로 빠지는 기분이 들 곤했다. 내가 왜 너의 성토를 들어야하는지. 세상에 힘든 게 너 뿐인 줄 아는지, 나도 위로받고 싶은 건 아는지. 그런 성토는 서로를 더욱 힘들게 한다. 우리가 피로를 공유하는 방식은 서로를 파괴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5살 아이가 떼쓰듯이, 그보다 더 어린 아이가 우는 것처럼 나를 향한 관심만을 갈구하는 방식은 도리어 자멸적이다. 


사실 우린 그럴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저 너의 어깨에 기대어 피곤에 지친 눈을 잠시 쉬게 해주면 된다. 그리고 너는 그런 나의 머리에 너의 머리를 올리고 서로의 체온을 나누면 된다. 우리는 우리 각자가 서로의 영역에서 분투하고 있는 걸 알고 있으니까. 영역은 다르지만 우리가 고통을 느끼는 방식은 서로 같다. 이 책이 그것을 말해주었다. 우리가 이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나는 부정적이다. 우리는 역사상 최고로 편리한 이 시대에서 온갖 편의에 중독되어 자라왔다. 당신은 당신이 누리는 아주 사소한 편의까지 모조리 희생할 자신이 있는가? 성과사회에서 우리 자신의 성과(우리에게는 생존)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불의와 비극에서 눈을 돌렸는가? 우리 사회는 성과사회면서 피로사회고 또 중독사회다. 우리는 편의와 혜택에 중독되어 있다. 당신은 내게 나약하다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나는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나는 조금 지쳐있기에 그저 누군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싶다. 그리고 아주 잠깐만 아무 생각 없이 있고 싶을 뿐이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과거의 꿈에 패배하면서 살게 될까. 만약 이 사회가 피로사회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과 같은 야망 없이 주어진 환경에 만족할 수 있었을까. 소박하게 살 수 있었을까. 그러나 이런 가정과는 별개로 나의 꿈이 조금씩 사그라지는 걸 목격하는 건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다. 결국 우리는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는 해야한다는 뜻이다. 욕망을 줄이거나 성취를 늘이거나. 우리는 전자를 하지 못해서 후자에 매진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전자를 실행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애초에 그런 능력이 있을까? 내가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이 챗바퀴는 사실 피로사회가 아니라 내 욕망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닐까. 피로사회를 격파할 수 없다면 우리에게 남은 선택은 한 가지뿐이다. 피로사회에서 살아남은 법. 생존이야말로 우리 세대를 상징하는 적절한 단어다. 그렇다고 생존이 꼭 적응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우리가 자신을 소모해서 다 타버리지 않을 정도의 힘을 기르기를. 비관적 전망 속에서도 희망을 갖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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