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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알 Nov 05. 2018

망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쓰는 법

<바람이 분다, 가라>를 읽고

한 작가의 책을 3권이나 읽는 경험은 흔하지 않다.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그렇다. 하루키, 조지 오웰, 쿤데라 등 듣기만 해도 뿌듯한 이름들이 대개 그런 작가들인데, 이들은 내가 정말 사랑하는(혹은 사랑했던) 작가이다. 그러나 한강 작가는 여러모로 예외적이다. 나는 이 작가를 위 리스트의 인물들만큼 사랑하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 그럼에도 내가 한강 작가의 책마다 긴 서평을 적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런 뜻이다. 나는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에 이어서 이번에 「바람이 분다, 가라」을 읽게 되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자의로 찾아서 읽은 책은 단 한 권도 없다. 그런 와중에 써왔던 서평 중에서 한강 작가의 다른 책에 대한 것이 없나 살피게 되었고, 오래전 앞의 두 책에 a4로 5페이지가 넘는 긴 서평을 써두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당히 신기하면서도 곤란한 일이다. 뜻하지 않은 인연을 계속 이으라는 정체 모를 압박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마치 이번 서평 역시 5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문장마다 꽉 채워서 쓰라고 요구하는 편집자의 독촉을 맞닥뜨린 것만 같다.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역은 서인주, 이정희, 강석원 세 명이다. 인주의 삼촌까지 넣을 수도 있겠다. 이외에 상담사 류인섭도 있고 인주의 어머니도 있고, 과외학생 진수도 있고, 인주의 전 남편 정선규도 있다. 서인주의 아이, 민서도 있다. 이들은 저마다의 불행에서 태어난 고통스런 운명에 예속되어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가장 중심적인 불행은 인주 어머니의 불행이다. 유전병을 가지고 태어난 동생(삼촌)과 알코올 중독이라는 두 가지 고통 속에서 어머니는 폐인이 된다. 물론 그녀에게도 시궁창에서 스스로를 구원할 기회는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잠시나마 금주하고 건강한 삶을 살기로 다짐했을 때, 그녀를 타락시킨 것은 사랑이었다. 그녀 자신의 것이 아닌, 류인섭의 사랑, 그것은 일방적이여서 폭력적이었고 파괴적이었다. 류인섭과 진수와 그녀의 마지막 파티에서 그들은 서로를 파괴했고 스스로를 파괴했다. 이후 그들의 삶은 그 날 밤에 다녀왔던 미시령에 묶이게 되었다. 


     그들의 파멸은 인주에게 계승된다. 가족사의 불행으로 인주는 남모르게 고통 받았으며, 남편과 이혼하고 강석원과 엮이고 결국 미시령에서 죽는다. 삼촌은 유전병으로 이른 나이에 죽고, 그 병력은 인주의 딸 민서에게로 이어진다. 류인섭과 진수와 어머니, 그리고 멀리 삼촌까지 연결된 태초의 불행은, 인주와 정희(주인공)과 강석원으로 연결되어 또 다른 파멸로 귀결된다. 아니 사실 태초의 불행이라는 말은 어폐가 있다. 인주 어머니는 이미 가난했고, 과외 학생 진수는 정부 고위 관료의 사생아였다. 태초의 불행은 사실 그 이전의 불행의 결과물이었고 그것 역시 그 이전의 것의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그런 불행이 자기 탓이 아니라는 것. 자기 탓이 아닌 불행으로 고통스런 삶의 조건에 내던져진 이들에게는 언제나 파멸하고픈 유혹이 뒤따르는 걸까. 자신을,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파괴하고픈 충동이 뒤따르는 걸까. 인주의 남편 정선규는 멀리, 이 불행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곳으로 민서를 데리고 피신한다. 그러나 그런 도피가 민서 피에 흐르고 있는 불행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을까? 그 갑작스런 발작으로부터. 


     이 소설에서 불행과 슬픔은 연대기의 형식으로 내려온다. 인물들의 이야기는 연대기가 교차하는 특이점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약 400페이지나 되는 소설 속에서 인물들이 고통으로부터 몸을 지켰던 경우는 단 하나였다. 바로 인주와 정희 그리고 삼촌이 만들었던 작은 공동체. 서로 상대방에게 존재하는 아픔의 존재를 어렴풋하게 느끼면서도 그것에 대해서 묻지 않는 유사 가족. 그리고 그 아픔을 보듬어주려는 배려가 흐르는 곳. 일방적이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러운 곳. 우악스럽게 손목을 잡는 것이 아니라 노크를 하고 문 앞에서 서서 기쁜 기다림의 시간으로 머무는 곳. 시나브로 가까워지는 희미한 사랑이 있는 공간. 이 속에서 정희는 레스토랑을, 삼촌은 과거 병마의 고통을, 인주는 어머니로 대표되는 가족사의 어둠을 잠시간 잊는다. 그러나 삼촌의 죽음으로 공동체는 망가진다. 이후 정희와 인주의 삶은 다시 이런 공동체를 새로 구하는 것이었지만, 그런 시도들이 모조리 실패한다. 삼촌-정희-인주의 삼각관계는 정희-인주-민서의 새로운 삼각관계로 치환되는 듯 보이나, 그것들 사이에는 꽤나 오랜 시간적 간격이 있다. 그 사이 각자의 어둠은 더욱 깊어졌다. 희미한(나이브한) 사랑으로 해결할 수 없을 만큼. 


     인주는 자살한 것일까, 살해당한 것일까. 강석원이 해하지 않았다면 인주가 죽지 않았을까. 아무리 삶의 슬픔에 괴로워할지라도 정희는 인주에게서 삶에 대한 의지를 보았다고 했다. 그림을 그리고, 미술학원 선생일을 하면서 민서와 함께하는 일상을 지켜내겠다는 지친 의지를 보았다고. 그렇기에 자살로 발표된 인주의 죽음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인주의 죽음을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그러니까 인주의 ‘달의 이면’을 알면 알수록 정희는 혼란스러워진다. 인주의 이면은 거의 평생을 함께했던(그렇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생각보다 더 거칠고 깊은 상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주에게는 스스로를 파괴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모든 것을 알게 된 후 정희의 황망함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어느 한 인간에 대해 다 알고 있다 여기던 오만? 인주의 아픔을 감싸주지 못한 자책? 스스로의 오판에 대한 수치? 오리무중에 빠진 진실에 대한 혼란? 정희의 황망함은 사실 자신이 강석원과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 가장 짙어진다. 


     강석원은 인주를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책을 냈고 그 책 이외에는 어떠한 가능성도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 그 근거는 자신이 얼마나 그녀에게 목메는지,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따위의 ‘자의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정희가 똑같이 범했던 실수이기도 하다(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다). 타인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려는 모든 시도는 어떤 종류의 폭력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것은 사랑의 필수적인 속성이기도 하다. 사랑과 폭력이 뭐가 다를까. 사랑 없는 폭력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폭력성 없는 사랑이 존재할 수 있을까? 자의적 해석 없는 타인에 대한 이해가 가능한가? 결국 여기서 뻔한 말을 해야 하는 걸까. 우리는 균형점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그런 뻔한 말. 우리는 모두 타인에게 해석되지 않으려는 달의 이면을 가지고 있다. 타인의 이면은 어떠한 장비로도, 어떠한 태도로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영역에 대한 확고한 태도야말로 우리 각자가 평생을 두고 고민해야할 문제다. 


     나는 삼촌에 대해서 생각한다. 작은 상처에도 죽을 수 있어서 타인에 손길에 민감한 삼촌, 그래서 타인을 만지는 손길 역시 아주 섬세한 삼촌. 사실 그는 한강 작가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지점이 아닐까. 한강 작가는 소설을 통해서 끊임없이 폭력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책을 읽으면서 때때로 나는 한강 작가가 폭력을 증오하고 있다고 느꼈다. 폭력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거부가 바로 「채식주의자」의 내용이다. 그러나 폭력, 정확히 말하면 타인에 대한 강제와 자의적 개입이 극단적으로 말소된 세상에서 사랑이 존재할 수 있을까. 폭력이 없는 세상을 꿈꾼다면, 채식주의자의 영혜처럼 스스로 나무가 되어버리는 수밖에 없다. 식물의 세상 역시 하나의 극단이다. 한강 작가의 세계는 양 극단의 세계가 아닐까. 한 쪽이 「채식주의자」의 식물의 세계라면, 그 반대편에는 분명 「소년이 온다」에서 나타난 5.18 계엄군의 잔혹한 폭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사랑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양 극단만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사랑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섬세함이다. 폭력이라고 말하기에는 아주 옅은 그런 손길로 상대방을 만지는 것. 만지면 부수어지는 것이 아닐까 계속 반문하면서 상대방을 다루는 것. 그 섬세한 손길에 맞추어 조금씩 내 마음을 여는 것.     

     이러니저리니 해도 나는 한강이라는 작가를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 거두절미하고 나는 한강 작가의 글을 읽기에 너무 평범하다. 바꾸어 말해서 한강 작가의 글을 읽으면 꽤나 과장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고 작가가 현실의 리얼리티를 포착하지 못했다는 뜻은 아니다. 한강 작가의 문장에는 분명히 삶의 어느 순간에 느꼈던 특별한 감정들이 들어가 있다. 그녀가 느낀 감정뿐만 아니라 내가 느낀 감정까지도 말이다. 전반적인 체념 속에서 희미하게 살아있는 억울함이라고 할까. 하여간 단어조합으로 포착할 수 없는 상황과 감정들이 분명히 한강의 문장으로 재현된다. 그러나 내가 이 감정들을 느끼는 순간은 말 그대로 순간이다. 순간적인 감정들이 만성화된 것을 정서라고 하기로 하자. 나와 한강 작가는 정서가 다르다. 예컨대 나는 세상 모든 것을 돋보기로 바라보려는 그런 예민함을 가지고 있지 않다(때때로 한강 작가는 예민하려고 특별하게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나는 평범하다. 나는 잘 정돈된 사회와 부모님이 넘겨준 일상을 준수해왔고, 견딜 수 있을 정도의 슬픔을 이따금씩 주어지는 행복으로 상쇄하며 살아왔다. 바꾸어 말해 나의 인생에서 아직까지 광기가 들어올 여지는 없었다. 내 삶은 아직 전반적으로 파괴되지 않았다(나와는 리얼리티에 대한 인식이 다르다).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바람이 분다, 가라」의 공통점은 모두 삶이 파괴된 이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한강 작가에게 이렇게 물어보고 싶었다. 


당신이 망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망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삶은 아직 파괴되지 않았기에 나는 그들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그런 이들을 실제로 목격한 적이 있으며, 그들과 꽤나 일상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군 복무 시절 나는 자주 수사과로 가서 잡혀온 이들을 감시했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훔쳐 들었다. 


     아마도 그들은 내게 순간적으로 덮쳐오는 우울과 히스테리를 영구적으로 느끼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마치 한강 소설의 어느 인물처럼, 식당에서 국수를 먹는데도, 문을 여는데도,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데도 우울 속에 사로잡힌 그런 인물처럼. 내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까지다. 이런 짐작은 ‘이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급이 낮다.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짐작할 수 있는 범위를 늘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이해가 불가능하다면, 대강의 어림짐작 말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그게 아마 한강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아무리 과장된 것이라 해도, 한강의 문장에 담겨 있는 파괴된 자들의 심정을 읽고 또 새겨야 하는 것이다. 한강의 문장은 가장 비폭력적인 짐작의 방식을 은연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울과 히스테리, 여러 부정적 감정들의 정도와 빈도의 차이다. 내가 읽은 한강의 소설은 빠짐없이 그런 감정들에 경도된 인물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그들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슬픔을 가슴 한 켠에 간직한 채, 어떻게든 살아가는 인물들이었다. 「채식주의자」의 인혜는 육식의 세계가 주는 폭력과 식물의 세계로 도피해버린 그녀의 동생 영혜가 주는 현실적인 고통에 괴로워한다. 그러나 그녀의 서러움과는 별개로 그녀는 끝내 버텨나갈 것처럼 묘사된다. 「소년이 온다」에서 대개 유족들은 광주의 참사가 앗아간 것과는 별개로 일단 삶을 살아가고 있다. 희생된 동생에 대해서 누구도 자신의 동생을 모욕할 수 없도록 글을 써달라는 형의 대사가 그 복잡한 사정을 함축하고 있다. 이런 인물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한강 작가에게 한 가지를 더 묻고 싶어졌다. 


당신은 희망을 말하고 있는 건가요? 


     희망, 인간에 대한 일말의 믿음을 섣불리 이야기해도 될까. 인주와 정희의 관계에서, 사랑이라고 불러도 될 깊은 관계들에 대한 묘사에서, 나는 그것들을 읽어낼 것 같기도 한데, 명확하게 잡히지는 않는다.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 결국 정희는 강석원에게 폭행당하고 험한 꼴을 당하게 되지 않은가. 오히려 그것보다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럼에도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럼에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한강의 소설에는 꼭 그런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는 어떨까.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주인공(정희)는 차치하자. 바로 인주가 그런 인물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짐작해본다. 강석원이 아니었다면 인주는 아마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자살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건 인주가 가진 달의 이면이나 작품의 내적 개연성과는 전혀 별개인 이야기다(사실 그렇지도 않다). 「바람이 분다, 가라」는 2007년에 나온 「채식주의자」와 2014년에 나온 「소년이 온다」 사이 2010년에 나온 작품이다. 점철된 폭력의 세계와 그럼에도 살아간다는 희망 아닌 희망. 그게 2007년 작과 2014년 작에 모두 등장하니, 당연히 2010년 작(「바람이 분다, 가라」)에도 그렇지 않을까.   

             

p.s 내가 본 그들에 대한 이야기      

그들은 조곤조곤 이야기하다가도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입을 꾹 다물어 버리기도 했다. 완전히 광기에 물들어 버린 어느 여자가 생각난다. 그녀는 형사들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울었으며, 다시 소리를 질렀다. 나는 무덤덤히 앞을 보고 서 있었어야 했는데, 그러는 와중에 그녀의 말에서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정말로 이것만은 진실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말을 들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슬프고 구역질나는 것이었다. 형사들이 결국 그녀를 다시 정신병원에 넣으려고 할 때, 그녀는 갑자기 당당하던 태도를 바꾸어 애원하기 시작했다. 제발 자신을 그곳으로 돌려보내지 말라며, 그 곳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자꾸 만진다고. 그 뒷말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 그녀의 울음 속에서 뒷말이 흐려진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나는 그 말을 그녀의 표정, 잔뜩 찡그린 채, 오열하는 우는 아이의 얼굴 같은 그 표정을 보고서는 슬퍼졌다. 삶이 파괴된 이의 표정이었다. 나는 그녀의 양팔을 붙들고 그녀를 호송차에 집어넣었다. 그런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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