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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알 Nov 05. 2018

먹이사슬 속에 사는 사람들에

<채식주의자>를 읽고,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사피언스, 정확한 분류로 동물계 척삭동물문 척추동물아문 포유강 영장목 유인원과 호모 속 사피언스. 아종명 사피언스. 인간의 생물학적 분류다. 철저하게 분류된 인간의 생물학적 위치는 곧 기원을 담고 본성을 담는다. 물론 이 생명 족보는 인간이 임의대로 분류한 것이긴 하다.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의 최종점을 확신할 수 없다. 자신의 정체 역시도 완벽히 파악할 수도 없다. 생물학적인 분류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건 부연 설명일 뿐이다. 그래서 위 문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분류는 인간이 동물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식물인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아니다. 인간은 식물이 아니다. 인간은 동물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러한 종의 계보를 뿌리부터 거스르려는 이야기를 쓰기도 했다.


이야기의 주역은 영혜다. 영혜는 어느 날 꿈을 꾼 후, 육식을 거부하고 꽃이 되려 하고 나무가 되려 한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이야기다. 왜 육식을 거부하고 왜 나무가 되려하는가? 나무는 손톱과 이빨이 없기 때문이다. 나무는 다른 생명을 공격하지 않는다. 생명을 억압하고 약탈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다른 모든 생명과는 다르게 나무는 물과 햇빛과 흙만으로 살아간다. 억압과 약탈, 그것이야말로 동물의 특성이다. 사자는 사슴을 약탈하고 사슴은 벌레를 약탈한다. 벌레는 잎을 약탈하고 식물을 약탈한다. 그 모든 약탈의 굴레 끝에 억압이 있다. 다른 모든 생명에게 인간은 억압 그 자체다. 인간은 자기보다 약한 모든 존재를 억압해왔다. 소, 돼지, 말 등 가축은 물론, 각종 물고기와 새를 양식해 가둔다. 맹수들을 험한 산 구석으로 쫓아냈고 코끼리의 상아를 뜯어간다. 뜯긴 자리의 상처라든지, 고통이라든지, 멸종과 같은 것들은 인간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들은 그저 뜯고, 쏘고, 먹을 뿐이다. 


엄밀히 말해 영혜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육식을 거부할 뿐이다. 육식이란 그 억압과 약탈의 상징이다. ‘꿈’이 다가왔던 순간부터 영혜는 점점 억압/약탈과 멀어지려 한다. 그 노력이 소설의 시작이고 끝이다. 소설은 남편이 시작한다. 영혜의 남편은 억압과 약탈로서 인간 사회에 가장 섬뜩하고 의연하게 적응한 개체다. 그로부터 멀어지는 처절한 과정이 1부 <채식주의자>다. 인혜의 남편은 공중을 떠다닌다. 그는 새가 공중을 돌아다니다가 둥지로 돌아오듯이, 공상의 세계 속을 돌아다니다 필요할 때 생활인으로, 인혜의 남편으로 돌아간다. 그는 공상과 욕망의 세계에 아주 침잠해서 처제라는 (불)꽃에 몸을 불사른다. 너무 멀리 떠난 새는 돌아올 수 없다. 이것이 <몽고반점>이다. 그 이후가 되면 영혜는 이제 먹는다는 행위를 거부하고 나무가 되려한다. 모든 먹는 존재는 본래 약탈자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먹는 존재는 더 강한 자에게 먹히는 존재다. 오직 나무만이 그렇지 않다. 모든 이야기 끝에 인혜가 남는다. 이 과정이 <나무불꽃>이다. 


이야기는 칼조각이 음식에 섞여 남편이 호통을 쳤던 그 날 시작된다. 다음 날 새벽, 그녀는 ‘얼굴’이 나오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생고기를 으적으적 씹고 그 피로 범벅이 된 얼굴이 피웅덩이 표면으로 올라온다. 그녀는 흰 개의 피눈물 흘리는 얼굴을 기억한다. 감히 나를 물어? 자신을 물었다는 죄로 개는 오토바이에 묶어 사지가 터져나가는 고통 속에서 죽는다. 개의 피와 생명은 한 그릇 국밥이 되어 영혜의 뱃속으로 들어간다. 영혜가 피눈물이 흐르는 개의 마지막 두 눈을 기억하는 것처럼, 개 역시 영혜의 마지막 얼굴을 두 눈에 똑똑히 각인시켰을 것이다. 그 때 영혜의 얼굴은 개에게 어떻게 다가왔을까. 


남편의 호통을 들었던 바로 그 순간, 영혜는 아주 특별한 감각을 느낀다. 벙 찐 기분, 텅 빈 기분, 주변의 모든 것이 순식간에 멀어지는 이질감. 과거의 기억이 현재로 몰아쳐 오는 순간이다. 기억 속에서 오토바이에 끌려 낑낑대는 개와 남편을 무서워하고 불편해해서 끙끙거리는 자신이 합쳐진다. 오토바이를 무자비하게 끌었던 아버지와 언제나 재촉하고 호통치는 남편이 합쳐진다. 개의 눈에서 흘렀던 피눈물과 남편의 재촉에 그만 베어버린 손가락에서 흘러나오는 핏방울이 합쳐진다. 그렇다면 개가 죽기 전에 마주했던 그 무자비한 무표정과 합쳐지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헛간 피 웅덩이 속에서 보았던 인간의 얼굴, 그것은 바로 먹기 위해 죽이는 건지 죽이고 싶어 먹는 건지 이제는 분간조차 할 수 없게 찌르는 듯한 ‘종의 공격성’이다. 영혜에게 무엇보다 섬뜩한 것은 자신의 얼굴이 아버지와 남편의 얼굴과 겹쳐지는 것 아니었을까. 


물론 과거의 순간과 현재의 1대1 대응은 위험하다. 개 이야기는 영혜의 죄의식에 대한 상징일 뿐이다. 꿈은 임계점이다. 임계점을 넘어 상태를 변화시키는 에너지는 낙엽을 밟으며 걸어오는 소리처럼 시나브로 다가온다. 강압적인 아버지, 겨우 자기 몸을 지키고 사는 언니와 어머니, 그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남동생, 그 너머 수많은 인간관계 속에서 영혜는 견뎌왔을 것이다.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이지만 그 스트레스는 분명히 그녀 생의 역사에 착실하게 쌓여갔다. 영혜 또한 그런 방식으로 누군가를 공격하고 무엇이든 상처 입히고 결국에는 고기를 먹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꿈속에서 도저히 두 가지 감각을 구분하지 못한다. 지금 느끼고 있는 이 더러운 기분이 내가 누구를 죽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누가 나를 죽였기 때문인지. 그녀는 두 가지의 연쇄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몸 담아 왔다는 것을, 더 나아가 스스로 활약했다는 것을 그야말로 ‘갑자기’ 깨닫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영혜는 너무나도 철저하게 파괴된다. 스스로에 대한 죄책과 세계에 대한 혐오로 고기를 먹지 않을 수 있다. 억압적인 가족들 앞에서 손목을 그어버리는 장면까지도 이해할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새의 목을 물어뜯는 순간부터 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다. 뒤어 그녀는 형부와 섹스를 하고, 나무가 되겠다면서 물구나무를 서고 모든 음식과 양분을 거부한다. 이는 분명 확연한 광기의 영역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진단한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갑자기 바뀔 수가 있을까? 그 얌전한 사람이 야수처럼 변할 수 있을까? 트라우마와 죄책감이 그녀 주변에 뿌리를 내린 모든 인간관계를 불살라버릴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나? 영혜의 아버지와 남편이 한국에 존재하는 다른 남편과 아버지보다 훨씬 폭압적이고 유별난 종자였나? ‘영혜’가 본디 그렇게 악마적인 기질을 타고 났는가? 아니면 광기는 항상 사람의 뒷면에 도사리고 있는 것일까? 


정말 오래 고민했지만 여전히 알 수 없었다(아마도 그것이야말로 ‘소설’이다). 영혜는 왜 그렇게 되었을까. 한 인간이 스스로 본능과 생명을 거부할 정도로 강력한 에너지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비쩍 골아서 거동조차 버거운 상태에서 오랜 시간을 물구나무로 서있는 추동력과 폭발력은 어디서 온 것인가. 도대체 미쳐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미쳐간다는 것은 ‘불가해’의 영역 속으로 침식된다는 뜻이다. 아무래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내가 영혜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알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암은 개체 내에서만 태동한다. 그래서 암의 고통은 개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는다. 경험하지 못한 고통에는 도저히 공감할 수 없고, 그저 어설프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분명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 마법이나 기적처럼 존재조차 의심스러운 그런 신비를 말하는 것이다. ‘존재’는 하지만 ‘해석’할 수 없는 것이 분명히 있다. 그것들은 그렇게 둬야한다. 나는 실제로 미친 사람을 경험한 적이 있다. 


수갑을 찬 여자를 경찰서 수사과에서 마주한 적이 있다. 그녀의 죄목은 경찰관을 폭행한 공무집행방해죄였다. 눈빛이 달랐다. 섬뜩했다. 형사가 조서를 쓰기 위해 추궁하기 시작했다. 경찰 왜 때렸어요? 아버지가 시켜서. 아버지? 아버님 계세요?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아버지가 시켰다면서요. 시켰다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시켜요. 전부 아버지 말대로에요. 네? 이게 다 당신들이 아버지 말을 안들어서 그래, 아이들이 죽은 거도 다 당신들이 아버지 말을 안들어서 그렇다고. 아이들이요? 진짜 몰라요? 무슨 아이들이요? 왜 몰라요? 뭔 소리야? 세월호 몰라요? 그 때부터 그녀는 소리를 꽥꽥 지르기 시작했다. 도저히 조서를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옆 의자에는 그녀의 여동생이 앉아있었다. 자초지종을 푸는 여동생은 그녀보다 훨씬 늙어있었다. 그 모습에는 억울함과 체념이 반씩 담겨있었다. 팔팔한 언니와 고개를 푹 숙이고 종이컵만 훌쩍이는 동생의 모습이 묘하게 대비되었다. 여동생은 삶을 살아가는 희망찬 에너지를 언니에게 모조리 빼앗긴 것만 같았다. 자매를 포함해서 누구도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소리를 지르고 의자를 발로 차다가 이내 다리를 꼬고 앉아서 아버지아버지아버지아버지 소리를 염불처럼 줄창 되뇌이는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세계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비정상이라는 말과는 다르게 ‘광기’라는 말은 사뭇 파괴적이다. 경찰서의 여자가 미쳐가면서 여동생은 더 늙어갔을 것이다. 영혜가 미쳐가면서 그 주변이 초토화된다. 미치려면 혼자 곱게 미치라고 하는 말. 사실 그건 정말로 불가능하다. 그 여자의 소동은 사람이 미치면, 극단적으로 시야가 좁아진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분명히 자기 안에는 생동하는 고통이 있고 타인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때, 사람은 소통의 문을 닫는다. 그리고는 일방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이해의 관계든(남편), 윤리의 관계든(형부), 피의 관계든(인혜), 모든 관계를 파괴하고 세상을 혼자 살기 시작한다. 자기만의 세계로 들어가는 존재는 곧 불가해의 존재가 된다. 그 존재는 블랙홀 같이 그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모조리 빨아들이고는 아무것도 내놓지 않는다. 그 비대칭은 분명히 폭력이다. 가장 큰 피해자는 분명 광인을 사랑했을 사람이고, 그에 대한 책임이 있는 사람, 아무래도 가족일 것이다. 


광기가 지나간 자리에 무엇이 남는가. 일단 소설에서는 인혜가 남았다. 주요 인물 중 영혜의 남편은 제 발로 떠났고, 인혜의 남편은 추방당했다. 영혜는 사실상 인간의 길을 포기 했으니, 남은 것은 정말 인혜 뿐이다. 인혜에게 영혜의 각성은 재앙이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죄를 짓지는 않았으나 그 때 거기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변을 당하는 사람.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서 오래전부터 살던 집이 박살났다거나, 우연히 폭동이 생겨 경영하던 상점이 털렸다거나. 인간들의 죄로 대홍수가 터졌을 때 노아의 방주에 타지 못하고 익사한 모든 동식물이 그렇다. 아내를 도구처럼 대한 죄로 영혜의 남편은 그 만의 세계를 잃었다. 스스로의 욕망에 쓸려, 윤리를 허물고 금기의 영역에 들어섰던 인혜의 남편은 일상으로부터 영구추방령을 선고받았다. 그렇다면 인혜는 무슨 죄를 지었던 것일까. 영혜가 육식을 금한 이후 그녀는 부모와의 정을 잃었고 남편을 잃었고 가정을 잃었고 동생을 잃었고 돈을 잃었다. 얻은 것은 추문과 마음의 어둠뿐이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각자만의 어둠이 도사린다. 어둠을 정면에서 극복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차선책으로 사람들은 주의를 다른데로 쏟아 어둠을 ‘소홀히’하려 한다. 인혜는 열심히 생활하는 것으로, 다른 이를 친절히 대하는 것으로 어둠으로부터 일상을 지켜간다. 인내, 배려, 친절, 성실과 같은 미덕은 단순히 지키면 좋은 것이 아니라 삶을 지탱해주는 기둥과 같은 것이었으리라. <나무불꽃>에 이르러 인혜는 평생 동안 단련한 인내의 근육으로 파국으로 치닫는 서사를 받아내려 한다. 오로지 그것뿐이었다면 그녀는 파탄의 이야기를 그저 삶의 슬픔 속 한 장면으로 녹여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둠과 어둠은 공명한다. 국경 밖의 적이 흥기했을 때, 국경 안의 적이 터져나오는 것처럼, 내부의 어둠이 꿈틀댄다. 참전용사 아버지 슬하에서 겨우 살아남을 때부터 그녀는 버텨가는 법을 배웠다. 인내와 어둠은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여서 한 쪽이 커지면 다른 쪽도 커졌다. 열아홉 살에 서울살이를 견디면서, 구멍이 있는 남편과 살면서, 잠깐만 참으란 말로 들어오는 삽입을 견디면서, 지우의 존재와 책임감을 견디면서, 삶의 피곤함과 불합리를 견디면서 어둠은 은밀해졌고 날카로워졌다. 파국이 터진 바로 그 날, 어둠이 히죽 웃었고 그녀는 하혈을 시작한다.      


이 소설의 구조는 이슬람 사원처럼 대칭적이다. 압도적인 모스크를 기준으로 양 옆에 가지런히 첨탑이 서있는 그런 중동의 사원. <몽고반점>은 단연 파국의 중심, 절정이다. 절정이 1부와 3부 사이에 끼여있다. 그리고 절정을 기준으로 도입과 결말이 거의 비슷한 비중으로 나란히 서있다. 얌전한 채식주의자였던 영혜는 ‘비디오’에 가담하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보여주더니 결국 자폐적인 ‘나무’로 변해간다. 반면 인혜는 본래 폭압적인 아버지의 방관자 중 하나였으나 곧 일상이 거덜나고 수난을 견디는 존재가 된다. 그녀가 바로 3부의 주인공이다. 흡입력 있게 펼쳐지는 1부와 2부의 서사가 끝나는 지점에서 그녀는 수습하고 정리한다. 전자의 강력한 서사를 대체하는 것은 깊게 깔리는 그녀의 고통과 고백이다. 마치 모든 이야기가 그 내면적인 고통을 끌어내기 의도한 것인양, 열정과 광기를 걷어낸 자리에 서러움이 쏟아져 나온다. 


살아본 적 없고 오직 견디어왔다는 그녀의 고백은 처절하다. 그녀의 서러움은 가을 날 듬성듬성한 들풀의 서러움과 닮았다. 그저 묵묵히 먹이사슬의 최하층을 지키고 있는 그런 풀들과 닮았다. 인내하는 자는 공격하지 않는다. 두 자매는 삶이 준 상처에 각자의 방식으로 대응한다. 영혜의 방식은 거부다. 육식에 대한 거부, 먹는 것에 대한 거부, 본능에 대한 거부, 생에 대한 거부. 아주 또렷하게 자신을 걸어잠궈서 강력한 존재감을 표출한다. 반면 인혜의 방식은 인내다. 이후 어떤 선택을 할지는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인내다. 그 방식은 위태위태하다. 보는 사람은 조마조마하다. 무엇보다도 슬픈 건 누구도 그녀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누구도 그녀를 위로하지 않는다. 풀들의 서러움을 누구도 읽어내지 못하듯이. 심지어 어떤 나무도 그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이야기의 막이 내리기 직전, 나무들의 푸른 불꽃을 보면서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녀는 알 수 없다. 그것들의 물결이 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그 새벽 좁다란 산길의 끝에서 그녀가 보았던, 박명 속에서 일제히 푸른 불길처럼 일어서던 나무들은 또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그것은 결코 따뜻한 말이 아니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받아줄 나무를 찾아낼 수 없었다. 어떤 나무도 그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마치 살아있는 거대한 짐승들처럼, 완강하고 삼엄하게 온 몸을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 p205     


인혜의 넋두리가 불러오는 것은 언젠가 기억의 잔상이다. 나와 내 동생은 할머니 곁에 앉아 조용히 tv를 본다. tv가 지루해질 무렵 밖에서 따닥따닥 들려오는 발소리마다 귀가 쫑긋해진다. 그녀가 돌아오는 것은 9시가 넘어 늦은 저녁이다. 열쇠소리로 문이 열리면, 문틈으로 깜깜해진 하늘과 검은 정장이 형광등의 희미한 불빛을 먹는다. 그녀는 나를 꼬옥 안고는 조용히 숨죽여 흐느낀다. 몸의 체온과 떨림이 피부의 경계를 타고 들어온다. 엄마 왜 그래. 잠깐만 잠깐만 이렇고 있자. 그 얼굴은 대체 어떤 표정이었나. 좁은 시야 밖에서 그녀가 내 품에 새겨놓은 그 표정을 난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그녀는 당시 먼 광역시로 새벽차를 타고 떠나 늦은 밤에야 돌아와야 했던 생활인이었고, 여자로서 차별과 조롱으로 조직의 생리를 깨쳐야 했던 사회인이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두 짐덩이의 어머니였다. 나는 이제야 그녀가 내 몸에 남겼던 눈물자국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본다. 인내와 책임감의 장벽 안쪽에서 봄의 풀 냄새같은 서러움이 넘실거린다. 엄마는 인혜처럼, 나는 지우처럼. 먹이사슬의 세상에서 민감한 더듬이를 지녔던 모든 이들을 존경한다.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공포와 분노를 느낀 영혜도. 미친 여자의 여동생도. 그 더듬이를 스스로 부러뜨려야 했던 인혜도. 그리고 내 어머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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