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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알 May 20. 2016

<먼 북소리> 존재의 세 가지 균형이 무너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를 읽고





먼 북소리라니, 매혹적인 언어다. 몇 번의 여행을 다녀왔지만, 나는 여행에 대해서 제대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여행을 왜 떠나는지, 왜 떠나고 싶은지, 몇 십 페이지를 거쳐 줄줄이 써봤지만 거기에 적힌 것은 전부 빈 껍데기였다. 성장? 유희? 시련? 기투? 세상? 배움? 이런 말들은 모두 수박 겉핥기다. 여행이 주는 독특하고 애틋한 감성을 도저히 내 죽은 말로는 재현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라니. 종소리도, 피리소리도 아니고 북소리라니. 북은 멜로디의 소리가 아니라 울림의 소리를 낸다. 그래, 여행을 부추기는 그 충동 역시 울림이다. 멀리서 들리는 울림에는 뭔지 모를 아련함이 있다. 마치 여행을 생각할 때 느끼는 향수처럼. 그야말로 뜻에 적중하는 언어가 아닌가. 그 말처럼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먼 북소리면 충분한 것이다. 




하루키의 여행은 일반적인 유희의 여행과는 다르다. 멋진 광경을 보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특이한 음식을 맛보는 것이 여행의 다가 아니다. 그는 유럽에서 자그마치 3년을 있었다. 그 3년을 살았다고 해야 하나 여행했다고 해야 하나. 서른여덟부터 마흔까지 그는 그의 삶을 살았다. 장소가 유럽이었을 뿐이다. 이런 것도 여행일까. 아니면 이런 것이야말로 여행일까. 하루키에게 여행은 삶의 연장이다. 삶의 연장이되, 다른 공간에서의 삶이다. 우리는 아직 시간을 바꿀 수 없기에 공간을 바꾸었을 뿐이다.  


나는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이동해간다. 시간과 장소. 때때로 그것이 내 마음 속에서 무게를 더해간다. 나 자신과 시간과 장소라는 세 가지 존재의 균형이 무너진다. p177


여행은 그 말처럼 존재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여행자는 이국성을 확인한다. 


어딘가 교회에서 종을 울리고 있다. 동방의 교회는 때때로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시간에 아주 묘한 식으로 종을 울린다. 개가 뭔가를 보고 컹컹 짖고 있다. 누군가가 엽총을 쏘았다. 1시 30분 페리가 입항 기적을 울린다. 그리고 나는 새삼스럽게 이국에 있음을 깨닫고, 내가 이질적인 사람들의 생활 속에 들어와 있음을 느끼게 된다. 나는 외국을 방문하면 종종 소리를 통해 가장 첨예하게 그 이국성을 인식하곤 한다. 시각이며 미각, 취각 또는 피부감각이 채 감지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소리를 통해서 알 수 있을 것 같다. 어딘가에 앉아서 내 몸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귓속으로 주위의 소리를 빨아들인다. 그러면 그들-어쩌면 나 자신의-이국성이 부드러운 거품처럼 둥실 떠오르는 것이다.  p76


이국성은 살아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 생동감이 삶의 피폐와 무기력에 저항한다. 그러나 피폐와 무기력은 너무도 강해서 저항은 항상 실패한다. 여행을 떠나더라도 우리는 어느 순간 외로움과 권태의 늪에 빠져든다. 밖의 반짝이는 풍경과 삶의 활력은 마음속의 어둠을 더욱 깊게 할 뿐이다. 모든 여행자는 기본적으로 우울하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우울함은 삶의 숨결이 미치는 곳 어디에나 있다. 존재의 균형을 억지로 무너뜨리는 것은 결국 그 우울함에 끊임없이 저항하기 위해서이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해도 더욱이 실패를 계속하는 것이다.

 



하루키의 여행기를 읽어보면, 그의 삶은 한결같은 부분이 있다. 일본 사람과 유럽 사람은 다르다. 각 나라에서 겪는 삶의 우연도 전혀 다르다. 일본이었다면 편지가 1년이 걸려서 도착하는 일이 있을까. 그건 이탈리아에서만 있는 일이다. 버스 기사가 포도주에 취해서 운전하는 일은? 그건 그리스에만 있는 일이다. 그런 차이 속에서 그는 꿋꿋하게 글을 쓴다. 그의 글은 어디서나 변하지 않는다. (달리기도 이 범주에 넣어줘야 할 것 같다. 그는 어디서나 달린다.) 그 연속성이야말로 존재의 세 가지 균형 중 하나인 나 자신이다. 아마 그는 의도적으로 그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존재의 세 가지 균형 중 두 가지가 무너지면 그는 다른 존재가 된다. 다른 세상에서 다른 경험으로 다른 삶을 살게 된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한 가지를 챙기려는 그의 마음이 대단하다. 시련이 삶을 폐허로 만들더라도 그 위에 삶의 중흥을 이끄는 것이 그러한 중심일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삶의 피폐에 맞서는 강한 마음이고 존재의 의지다.




그래서 하루키의 여행기는 보다 특별하다. 흔히들 여행 작가들은 여행지의 진부한 스펙터클과 감상을 과장하고 에피소드 마다 과하게 의미를 부여한다. 그들은 일상과는 다른 새로운 별천지로 여행지를 소개한다. 하루키의 여행기는 그보다 훨씬 담백하다. 스펙터클? 책에는 온통 비오는 날이고 추운 겨울이고 불평과 불만뿐이다. 어째 날을 골라도 그런 날을 골랐을까할 정도로 온통 최악의 날씨와 환경이다. 그리스에는 강풍이 몰아치고 이탈리아에는 도둑이 넘친다. 그렇지만 그의 글에는 이야기와 철학이 있다. 삶의 흔한 일상을 이야기로 만드는 것이 소설가의 능력일 것이다. 마치 단편 소설 여러 편을 붙여 놓은 것 같은 글이다. 인물은 살아있어서 매력적이고 서술은 담담해서 매혹적이다. 여행기에 감상이 아닌 철학이 담기기는 어렵다. 거기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담기기는 더 어렵다. 문학이 된 산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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