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알 Apr 12. 2020

비극 앞에서 인간의 몫

우리가 해야 할 일, 신이 해야 할 일  

현 시대의 포퓰리즘에 대해 써야 하는데 복잡한 게 영 잡히지 않아서 좀 뛰고 왔다. 400미터 4바퀴를 연달아 뛰니 좀처럼 숨이 내려가지 않아서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복잡한 포퓰리즘 생각도 사라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달이 유난히 둥그렇고 환한 게 눈에 들어왔다. 달빛이 훑고 지나가자 벚꽃잎은 거의 살구색을 띄었다. 무드등의 주황빛보다는 훨씬 밝고 산뜻해 벚꽃잎들이 달린 가지 아래를 걸어가는 길이 기분을 괜히 들뜨게 했다. 


무심코 스마트폰으로 포탈 기사를 보는데 이런 기사가 있었다. 서울에서 처음으로 코로나 사망자가 나왔는데 40대 남성 폐암 말기 환자라는 내용이다. 닭장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던 작업환경 탓에 열심히 일하다 감염된 구로 콜센터 직원의 남편이었다. 이 직원분은 남편이 폐암 투병 중이라 가장으로서 생계를 위해 콜센터에서 일했다고 한다. 이 일가족이 모두 감염됐다. 15살 아들과 12살 딸까지 전부. 하나의 비극이 다른 비극을 부르고, 그게 다시 더 큰 비극이 됐다.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암투병을 해야 했고, 그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콜센터에서 일해야 했다.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코로나에 감염돼야 했고 어쩔 수 없이 가족이 모두 감염됐다. 기저 질환이 있는 경우는 코로나가 치명적이라는 의학적 사실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남편이 죽었고, 아버지가 죽었다. 최초의 불행은 불가해한 것이었고, 이후의 불행은 그에 따른 불가항력이었다. 그 불가항력의 연쇄를 정리하다보니, 다시 불가해를 마주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 이런 분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런 가혹한 설상가상이 왜. 아마도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은 인간의 영역이 아닌 신의 몫일 것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한 대목이 떠오르는 밤이다. 조르바는 늙은 마브란도니 영감이 죄 없는 과부를 살해하자 슬픔에 빠진다. 주인공을 향해 이런 말을 쏟아낸다. 


"두목! 이놈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같이 부정, 부정, 부정입니다! 나는 이놈의 세상에 끼지 않겠어요. 암, 나 조르바, 벌레 같은 놈, 굼벵이 같은 놈이지만 어림없고말고! 왜 젊은 것은 죽고 늙은 것들은 살아야 하나요? 왜 어린 것들이 죽습니까! 아들 녀석이 하나 있었는데(이름이 디미트리였지요) 나는 이걸 세 살 때 잃었습니다. 그래요... 나는 이 생각만 하면 절대로, 절대로 하느님을 용서할 수 없어요. 아시겠어요? 내 죽는 날 하느님이 내 앞에 광대뼈를 내밀면, 그리고 그 작자가 진짜 하느님이라면, 부끄러운 꼴 좀 볼거에요. 그래요. 하느님은 이 조르바, 이 굼벵이 같은 놈의 눈 앞에 나타난 걸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겁니다!" (열린책들, 356쪽)


신이 조르바 앞에서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을까?


그 기사에 달린 댓글 중 가장 많은 공감을 받은 것은 "이런분들께 재난자금 5배로 주세요. 저희는 안줘도 됩니다. 힘내세요~~"였다. 그에 딸린 대댓글 중 다시 가장 많은 공감을 받은 것은 "맞습니다 코로나 사태 이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월급받는 맞벌이 부부들은 재난지원금 나는 못받는다며 불평불만하지 마시고 이런 분들을 생각해보세요 재난지원금은 이번 바이러스 재난으로 생계가 어려워진 분들을 위한 돈입니다"였다. 재난지원금을 두고 하위 70퍼센트는 누구니, 내가 받니 못받니, 이럴거면 다 주지 말라니, 하며 오만 생떼가 세상을 채우던 지난 며칠이었다. 그 꼴보기 싫던 이기심의 악다구니에 지쳤던 마음이 위안을 받는 느낌이 들었다. 신이 아닌 인간의 몫, 인간의 대답은 명확한 것 같다. 


며칠 전 친구가 기사링크를 보내준 적이 있다. 남형두 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장은 2일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이었다. 그에게 개강 첫 주에 한 신입생이 자퇴하겠다고 e메일을 보냈다고 한다. 코로나로 가계 수입이 사라져 임대료도 내지 못하고 있으며, 중소기업 재직 중인 동생도 무급 강제휴직을 당했다고 한다. 이 신입생은 약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어 당장 응급실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는 상황이었고, 결국 자퇴를 결정했다는 게 편지의 요지였다. 남형두 원장은 이 사람을 잡고 싶어 백방으로 지원금을 알아봤다고 한다. 남형두 원장은 어떻게든 월 270만원의 지원금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고 이 사실을 그에게 알렸다. 남형두 원장이 받은 답장의 내용은 이랬다고 한다. “270만원은 사회초년생들의 월 평균 수입을 넘는 큰돈입니다. 스스로 경제적 부양 능력이 있음에도 교수님께 먼저 사정을 알렸다는 이유만으로 더 어려운 학우에게 돌아가야 할 호의를 가져가는 것은 정말 염치없는 일입니다." 

 

비극 앞에서 우리에게 할당된 몫이 더욱 명확해진다. 또 신이 있다면, 넉넉한 삶에도 아득바득 지원금을 타내려는 이기심의 도가니를 좀 씻어주시길.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2492632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32&aid=0003001596
           





매거진의 이전글 남자와 비겁의 끝없는 밑바닥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