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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알 Apr 16. 2020

n번방 사건의 명명법

케로베로스의 세 머리를 동시에 쳐야

n번방 사건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태안에 유조선에서 기름이 유출된 사건을 당시 언론은 ‘태안기름유출사고’라 불렀죠. 태안기름유출사고라고 하니 꼭 태안군이 기름을 유출한 것 같네요. 태안군은 엄연히 피해지역입니다. 명명에는 일을 저지른 가해자의 책임이 부각되는 게 맞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 사건을 ‘삼성 1호-허베이 스피릿 호 원유 유출 사고’라 합니다. 늦었지만 옳은 정정입니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라고 하면 그 안에서 가해자가 그다지 드러나는 것 같지 않습니다. 가해자 중심의 명명을 한다면 이 사건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조주빈 일당 n번방 성착취 사건? 조주빈 일당 텔레그램 n번방 성착취 사건? 뭐라고 명명하더라도 부족한 느낌이 듭니다. 그와 같은 명명은 이 사건의 가해자가 몇몇 조주빈 일당뿐이라고 말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 사건의 가해자가 조주빈 일당뿐인가요? 명명의 애매함이 이 사건을 제대로 분석하기 어려운 이유를 보여줍니다. 누가 이 디지털 성범죄의 가해자인지를 두고 혹자는 고작 몇 명을, 다른 누군가는 5000만의 반인 2500만을 얘기하고 있으니까요.   


디지털 성범죄는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상황에서 카메라로 신체를 동의 없이 촬영하고 유포하는 불법적 행위를 일컫습니다. 그 끊임없는 반복에는 개개 사건 배후에 그것들을 찍어내는 거대한 공장이 있습니다. 리벤지 포르노, 웹하드, 음란 사이트 등이 톱니바퀴처럼 얽힌 복잡한 공정시설이 그 안에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누가 가해자이고 어떤 구조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알아내려면 당연히 이 공장의 지붕을 뜯어내고, 돌아가는 공정을 해부해야 할 겁니다. 디지털 성범죄가 하나의 성 산업이 됐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산업은 시장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시장이 곧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요컨대 디지털 성범죄에는 공급자와 수요자, 그리고 그들이 만나는 플랫폼이 모두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씩 뜯어봅시다.


누가 공장에 원료를 공급하나? 조주빈과 같은 일탈적 남성들입니다. 이들은 연인의 신체나 그와의 성행위를 몰래 혹은 노골적으로 촬영합니다. 이들은 현장에서 여성의 존엄을 ‘포착’하고 성적 원료로 만들어 공장에 제공합니다. 이들은 성매매 정보 공유, 성폭행 모의, 혹은 금전적 목적으로 촬영물을 넷 상에 올립니다.


누가 그것을 가공해 유포하나? 소라넷, n번방을 위한 음란 커뮤니티와 p2p를 비롯한 파일공유 사이트가 주된 역할을 합니다. 이들은 서로 간 네트워크를 형성해 성산업의 파이를 키웁니다. 이들은 성산업 공장의 네트워크 플랫폼이자 적극적 유포자로서 활동하며 그 동기는 수익입니다.


누가 이 공장 생산품의 수요자인가? 불특정 다수의 남성들입니다. 이들은 리벤지 포르노를 성적 유희의 대상으로 여기고 소비합니다. 이들은 사춘기 시절부터 성 산업이 만들어내는 허구의 여성상을 꾸준히 접하며, 누군가의 고통을 손쉬운 유희거리로 여기게 되는 지경에 이릅니다. 결국 성 산업에 기꺼이 돈을 내는 적극적 수요자가 되는거죠.


이렇게 세 측면으로 나누니까 깔끔하게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이 세 주체를 두고 별개의 존재가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비자, 불특정 다수의 남성 중 일탈적 남성 집단이 탄생합니다. 이들이 다시 불법촬영물을 공급해 공장이 열심히 돌아가고, 성 산업은 번창합니다. 악순환 속에서 세 주체는 누가 원인이고, 결과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얽히게 됩니다. 그것이 어느 하나를 막는다 해도 디지털 성범죄를 낳는 성 산업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까닭입니다. 소라넷을 없애자 n번방이 등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 n번방 사건은 수요자와 공급자와 플랫폼이 찰떡같이 붙어 있는 괴물입니다. 


n번방 같은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위에서 본 것처럼, 디지털 성범죄는 케로베로스처럼 머리가 세 개가 있습니다. 머리 하나만 친다고 케로베로스는 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세 머리를 동시에 쳐야 합니다.


첫째. 공급자를 때리는 대책. 이 대책은 죄에 대한 처벌이므로 근본적인 연쇄관계는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단기적 대책입지만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불법촬영물 제작 및 공급자들에 대해 실효적 제재 수단을 마련해야 하는 거겠죠.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인데 현행법 상 불법촬영물 제작, 유통자는 징역 및 추징금의 처벌을 받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이 같은 처벌은 범행 단계에서 추상적으로 느껴질 개연성이 크다고 봅니다. 불법으로 촬영을 하면서 ‘에이 설마 걸리겠어’, 하는 생각에 저지르는 경우를 잡아야 합니다. 법적 처벌수위를 아무리 높여 봤자 본인이 안 걸린다고 생각하는 이상 실질적 효과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안 듭니다.


불법촬영물은 영구적으로 웹 상에서 남는다는 점을 고려해 사회적으로 가해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등, 일상의 전 영역에서 실질적 경각심을 높이는 방책을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상공개가 헌법 사항과 충돌해서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문제임은 알고 있습니다. 하여간 그와 다른 방식으로든 일상에서, 촬영하고 유포하는 범죄자가 ‘생각보다 많이 발각되고’, ‘그 말로가 비참하다’는 두려움을 널리 퍼뜨릴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공급자와 수요자를 연결해주는 플랫폼을 때려야 합니다. 이들은 사실상 유포를 촉진하는 세력으로 공급자와 다를 게 없습니다. 이에 대한 제제는 돈이 오가는 실제 산업판을 건드는 것임으로 중기적 대책이 될 겁니다.


웹하드 카르텔과 성 산업 네트워크를 공공 통제 안에 두도록 애써야 합니다. n번방과 같이, 이 네트워크는 점점 규제와 감시를 피해 은밀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두더지 잡기 식 사후 통제를 넘어 이 네트워크 전반에 대한 감시 생태계를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전담 신고기관을 두는 것은 물론이다. 온 국민이 이 같은 성 산업 유통망의 신고자가 되도록 적극적으로 교육하고, 관련 시민단체를 지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아가 정부는 이들의 수익 경로를 차단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셋째. 이 플랫폼들이 돈을 벌 수 있는 이유는 리벤지 포르노에 돈을 갖다 바치는 소비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에 손대는 건 결국 사회전반의 성인식과 문화를 상대하는 일이므로 장기 대책이 필요합니다. 이는 당연히 교육측면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청소년 성 인식에 대한 교육 내용을 전반적으로 재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는 특히 청소년기에 이성의 존재에 눈을 뜨는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각종 성인물, 만화, 드라마, 서브컬처 문학 등에서 여성은 있는 그대로 묘사되지 않죠. 성적으로 순종적이고 연애관계에서 종속적이고 그렇습니다. 예전보다 우리 문화생태계에 그렇지 않은 작품의 비율이 많아졌다고 하지만, 저 청소년기 남자애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주고 선택하는 콘텐츠가 어떤 거겠습니까. 그런 자극적 콘텐츠를 보면서 그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이상한 것 맞습니다만, 중요한 건 어떤 사람들은 현실과 그런 판타지를 ‘구분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죠. 현실을 외면하고 그 자리에 판타지를 끼워 넣는 겁니다. 


그와 같은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습니다. 왜 그런 지는 지금 제 역량에서는 특정하기 어렵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존감이 바닥을 치자, 성적 위계를 억지로 만들어서 그에 위안을 받으려는 것인지. 세상에 무시받는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스스로 인정의 방식을 잘못 형성한 것인지. 자극적 요소에 중독돼 계속 자극을 첨가하려다 보니 괴물이 되고 마는 건지. 무엇이든 간에 몹쓸 사고입니다. 이들이 콘텐츠 속 문화적 재현(허구적 여성상)에 매몰돼 그 논리를 확대재상산할 겁니다. 이들의 머릿속에서 여성은 강간해도 되는 성적 대상이며, 항상 나보다 밑에 있는 존재로 여겨져야 한다는 논리가 태어납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재현물, 콘텐츠를 다 없앨 수 있을까요? 싹을 잘라버리는 식으로요. 자본주의 세상에서 성 마케팅을 없애는 게 가능할까 혼자 물어보면 회의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성 상품화 얘기는 맨날 나오지만 아이돌 문화는 날로 번창하고 있으니까요. 현실적 가능성의 문제입니다. 성적판타지가 태어나는 환경을 막을 수 없다면, 성적 판타지와 현실을 동치하려는 생각에 '필터'를 끼워넣는 게 현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래 걸리는 일이 될 겁니다. 당장의 화끈한 조치로 이를 막을 수 없다는 게 우리가 마주한 벽의 높이를 실감케 합니다. 이런 내용들이 교육에 담겨야겠죠. 


-성 산업이 만들어내는 ‘여성에 대한 판타지’와 있는 그대로의 여성과 전혀 다름을 인지시킬 것. -불법촬영물 소비가 n번방과 같은 피해자들을 양산하는 과정을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설명할 것. -가벼운 성적 유희로 여기는 불법촬영물 소비가 주변 여성의 존엄을 훼손하는 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실질적으로’ 알게 할 것. 


이상의 단기, 중기, 장기적 조치를 끈기 있게 시행해야만 n번방과 같은 인면수심한 인권유린을 막을 수 있을 겁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모든 조치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날카로운 조치를 해야 할 겁니다. 가해자를 특정하기도 뭐하다는 사실 자체를 곱씹어야 합니다. 극악한 이들과 우리 사회에 만연한 악이 연결돼 있다는 뜻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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