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연 의원의 예언, 절규
(이어서)
4. ‘자유우파’라는 게 뭘까?
자유우파라는 게 뭘까? 나는 국회 토론회를 다니면서 여러 관련된 구호들을 봤는데, 대개 이런 식이었다. ‘독재타도’, ‘반헌법적 세력 규탄’, ‘시장질서 수호’, ‘반공’. 다시 말해 자유우파의 정신은 경제, 안보, 정치의 영역에 한정돼 있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경제실패(경제)와 조국 논란(정치)은 자유한국당 입맛에 맞으며, 우리 사회 존재하는 3분의 1 고정 보수의 지지를 결집시킬 수 있는 최고의 카드였다. 코로나 초기 방역에 실패했으니 안보에서까지 완벽히 3박자가 맞아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왜 중도층은 이들에게 표를 주지 않았을까? 이 가치를 선명히 내걸었던, 이름 있는 강경파가 몰락하고, 중도우파 출신 유승민계는 선전했을까?
이번 보수의 실패는, 정치와 경제만으로 더 이상 우리 사회 주류를 차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한 탓이다. 이제 중도층은 북한, 경제이슈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코로나로 정치경제 이슈가 묻힌 상황에서 그 사실이 드러났다. 개인은 경제적, 사회적, 젠더적 기준에서 정치적 지향을 정한다. 그 세력을 지지하는 게 경제적으로 내게 이득이 되는가, 사회적 위계에서 나를 대변하는가, 젠더적으로 어떤 입장에 서게 하는가 등이 복합적으로 섞인다. 문재인 정권이 경제적으로 고전하고 조국 논란이 터지면서, 계급적 정체성에서 야당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됐다. 그러나 보수야당에게 사회적, 젠더적 영역이 안중에 있었나 되묻고 싶다. 그들은 지나간 사회적, 젠더적 헤게모니를 그대로 수호하는 데 그쳤던 것이다.
6년 전 전 국민이 세월호 참사의 충격을 공유했다. 이후 정치적 과정에 대한 왈가왈부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사건이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없었던 일처럼 여기는 순간, 당시 충격을 느꼈던 사람들에게 기이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당시에 충격과 슬픔에 빠졌던 사람들의 기억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가족에 대한 사회적 지원을 두고 이견이 있을 수 있다. 보수는 소수자우대정책에 이의를 제기해야 하는 집단이 맞으므로 옳은 역할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사태 자체를 부정하거나, 피해자를 매도하는 식으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차명진 후보자만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5.18을 비롯해 여러 성폭력 사건 전반까지, 야당은 사회/정치영역의 중요성을 고려치 않았다. 해당 사안들에 대해, 타 정당과 비슷한 논평을 내놓긴 했지만, 결국 핵심 인사들은 20대 국회 내내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음을 온몸으로 보여줬던 것이다. 그 꾸준하고 철저한 태도에 ‘굳이 왜 저렇게 목메냐’는 반응이 나오게 된다. 이 같은 태도들이 보면서 결국 유권자는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조국 이후 정권의 도덕성을 규탄해도, 이들은 사회, 경제적으로 오랫동안 헤게모니를 쥐어 온 세력이었다는 바로 그 사실.
집단적으로 등장한 사회적 감정은 비합리성을 머금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을 지적하고 시정하는 게 보수의 역할이나, 언제부터인지 주류보수정당은 이를 방기했다. 개혁입법의 부작용을 교정하려는 적절한 보수의 목소리, 즉 ‘대안의 목소리’는 사실 항상 존재했다. 다만, ‘자유 우파’를 뚫고 나오지 못했다. 공수처/선거법/검경개혁까지 패스트트랙 3법이 이슈가 20대 국회의 주요 이슈였다. 홍준표 당선자가 ‘이렇게 된 이상 협상에 들어가서 손볼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도, 자유우파세력은 일체 협상을 반대했다. 자유우파의 가치는 절대로 타협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나?
유권자들의 선택만을 기다렸던 일련의 강경 대응은 21대 총선으로 전부 실패했다. ‘옳은 것’의 범주를 ‘자유우파’적 가치로 한정했던 것은 분명히 패착이었다. 시장원리만 하더라도 그렇다. 21세기에 시장원리는 정부와 시장이 조화를 이루는 식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판은 ‘시장질서를 파괴한다’가 아니라 ‘그 조화를 파괴한다’는 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전자의 레토릭이 부정확하지만, 지지자들을 끌어모으기 좋다.
유튜브에는 그 이상의 자극적 썸네일을 붙여, 자기들만의 논리를 즐기고 이에 매몰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그들은 전부 좌우 스펙트럼에서 가장 끝에 붙어있는 3분의 1에 불과하다. 이제 그들에 대한 호소가 중도층에 기이하게 보이는 국면이 도래했다. 이 같은 방식을 고수한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보수는 점점 작아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옳은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실망하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더욱 음모론에 집착할 것이며 점차 냉소적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이다. 결국 무엇이 잘못됐는지 깨닫지 못한 채로 정치를 떠나게 될 것이다. 민주당의 오만이 다수세력으로서 정치적 오만이었다면, 자유한국당-통합당의 오만은 사상적, 담론적 오만이었다. 자기들의 가치가 옳고, 너네들은 왜 이걸 따라하지 않느냐는 그와 같은 오만. 그 밖에 열린 세상이 있음을 부정하는 닫힌 세계의 오만.
5. 김세연 의원의 예언적 절규
이 극단적 신념에의 호소는 민주당에도 똑같이 존재했다. 조국이 죄가 없다는 지지자들의 외침은 이들 역시 사회적, 젠더적으로 특정 계층의 헤게모니를 수호하기 위한 집단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중도층은 그래도 민주당이 통합당보다 ‘덜 비합리적’이기에 이들에게 표를 줬다. 보수가 ‘자유 우파’의 가치를 버리고 자유민주주의를 넓게 해석하기 시작하는 그 지점에 역전의 실마리가 있다. 민주당의 비합리성을 지적할 수 있을 만큼 합리적으로 정당을 개조해야 하는 것이다.
김세연 전 여의도연구원장이 “한국당은 좀비”라고 극렬히 비판하며 불출마를 선언한 게 벌써 6개월이 됐다. 그의 시각은 정확했다. 불출마 선언문에서 일부를 발췌했다.
“새누리당 말기, 어떤 상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비이성적인 상황들을 겪고 나서, 어떠한 변화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된 이후, 바른정당 창당에 나서서 제대로 된 보수정당을 건설하기 위하여 그야말로 전심전력, 총력을 다해 일했습니다. 하지만 바른정당은 실패했고, 지금은 통합된 바른미래당에서 그 흔적조차 거의 다 지워지고 있습니다. 지방선거를 앞두고는 오로지 지역의 동지들을 살려보고자 눈물을 머금고 복당을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살리고자 했던 동지들을 살리지도 못했습니다.
자유한국당은 이제 수명을 다했습니다. 이 당으로는 대선 승리는커녕, 총선 승리도 이뤄낼 수 없습니다. 무너지는 나라를 지켜낼 수 없습니다. 존재 자체가 역사의 민폐입니다. 생명력을 잃은 좀비같은 존재라고 손가락질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창조를 위해서는 먼저 파괴가 필요합니다. 깨끗하게 해체해야 합니다. 완전한 백지 상태에서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 계시는 분들 중에 인품에서나 실력에서나 존경스러운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나라를 위해서 공직에서 더 봉사하셔야 할 분들이 분명히 계십니다. 하지만, 대의를 위해서 우리 모두 물러나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버티고 있을 수록 이 나라는 더욱 위태롭게 됩니다.
광화문 광장에서 자유한국당이 주최하는 집회는 조직 총동원령을 내려도 5만명 남짓 참석하지만, 자유한국당이 아닌 시민단체에서 주최하는 집회에는 그 10배, 20배의 시민이 참여합니다. 민주당 정권이 아무리 폭주를 거듭해도 자유한국당은 정당 지지율에서 단 한번도 민주당을 넘어서 본 적이 없습니다. 조국 사태가 마무리된 이후에는 오히려 그 격차가 빠르게 더 벌어졌습니다. 엊그제는 정당지지율 격차가 다시 두 배로 벌어졌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한 마디로 버림받은 겁니다. 비호감 정도가 변함없이 역대급 1위입니다. 감수성이 없습니다. 공감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 소통능력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조롱하는 걸 모르거나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세상 바뀐 걸 모르고,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섭리입니다. 섭리를 거스르며 이대로 계속 버티면 종국에는 역사의 죄인이 될 것입니다. '물러나라, 물러나라' 서로 손가락질은 하는데 막상 그 손가락이 자기를 향하지는 않습니다. 발언하는 거의 모든 사람이 자기는 예외이고 남 보고만 용퇴하라, 험지에 나가라고 합니다. 국민들은 지금 우리가 어떻게 하는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계십니다. 모두 내 탓입니다. 책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함께 책임져야 합니다. 함께 물러나고, 당은 공식적으로 완전하게 해체합시다.
완전히 새로운 기반에서, 새로운 기풍으로, 새로운 정신으로, 새로운 열정으로, 새로운 사람들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경험 있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거나 새로운 사람은 경험이 모자라서 안 된다고 반론을 펴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경험이 약이 아니라 독이 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오만과 간섭은 금물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이전에 당에 몸담고 주요 역할을 한 그 어떤 사람도 앞으로 대한민국을 제대로 지키고 세워나갈 새로운 정당의 운영에 관여해서는 안 됩니다. 뜻밖의 진공상태를 본인의 탐욕으로 채우려는 자들의 자리는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든 반드시 응징해야 합니다.”
김 의원은 ‘감수성’의 문제라며 핵심을 지적했다. 세상 바뀐 걸 모르고 옛날 감수성을 밀고 간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닫혀 있는’ 자유우파 개념은 20대 총선 직후 폐기됐어야 했다. 자유한국당부터 그들이 서 있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젠더적 헤게모니를 인식했어야 했다. 각 영역에서 유권자들이 원하는 부분을 감지했어야 했다. 복합적 정체성의 영역에서 자신들이 허용할 수 있는 선을 확실히 하고 그 안에 유권자들을 포섭할 수 있는 방안을 고안했어야 했다.
보수당은 오히려 반공, 시장질서 수호, 친기업 등등 이 같은 레토릭을 주야장천 외쳤다. 토지공개념이 이슈가 되면, 그 안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과 없는 부분을 구분하고 그에 대해 논의하기 보다는 공산주의/사회주의 딱지를 붙이는 쪽을 선택했다. 국가부채 이야기가 나오면, ‘고령화 추세에 따른 장기적 부담이 우려된다’는 반박 논리보다도, ‘베네수엘라행 특급열차’라는 레토릭에 집중했다. 그와 같은 레토릭으로는 현재 우리 복지지출 수준이 낮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
결국 김 의원이 이야기하는 게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합리적 반박보다 매도에 집중해서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시대는 예전에 끝났다. 매도와 혐오에 기반한 이상, 보수 가치 핵심인 품격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게 당연하다. 품격은 존경에서 온다. 이제 우리 시민사회는 우리가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존경하지 않는다. 김 의원의 절규는 6개월 뒤를 정확히 예언했다. 그만큼 당시 상황에 대한 분석이 엄밀했다는 것이며, 실패가 예정돼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