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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알 Apr 27. 2020

누구 말이 맞을까?

전문가와 민주주의 

전문가의 의견은 진실에 가장 가까운 의견이라는 게 상식입니다. 공공선을 위한 정책 근간이 되는 ‘사실판단’을 제시하는 역할은 전문가와 지식인의 오랜 역할이었습니다. 오늘날 한 사안을 두고 의견이 충돌할 때 전문가가 그 해답을 알고 있는 것으로, ‘논쟁의 종결자’로 여겨지곤 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플라톤 대화록의 ‘프로타고라스’편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모든 그리스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아테네 사람들은 의회를 열고 있을 때 국가에서 토목이나 건축 사업을 해야 할 경우에 건축가들을 불러서 건물에 대하여 의논을 합니다. 그리고 배를 만들 경우에는 조선가를 부르기 마련입니다. 이 밖에도 배우고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경우에 그와 마찬가지로 전문가들을 부르게 마련입니다. 만일 전문가가 아닌 문외한이 의견을 제출한다면, 그 사람의 용모가 아무리 훌륭하고 재산이 많으며 문벌이 좋을지라도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범우사 판 최현 옮김, 40쪽)

정치는 공동체 의사를 정하는 과정입니다. 의사결정의 기준은 많은 경우 ‘더 큰 이익’으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대에서부터 전문가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더 큰 이익’으로의 지름길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즉 자신만의 영역에서 ‘현명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던 것이죠. 따라서 고대에서부터 지금까지 전문가는 정치와 떨어질 수가 없는 집단이었습니다.


현대로 오면서 ‘국민을 잘 살게 하는 방법’이 정치의 핵심이 됐습니다. 곧 경제, 보건, 의료, 복지, 행정 등이 정치의 핵심이 됐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인과는 다른 주제를 두고 논쟁합니다. 사람들은 덕이 무엇인지, 선이 무엇인지로 싸우지 않습니다. 우리는 경제 성장률을 두고 싸웁니다. 국가부채를 두고 싸우고, 최저임금과 탈원전을 두고 싸웁니다. 따라서 우리는 일상의 논쟁에서 전문가를 소환하게 됩니다. 누가 이랬다더라, 누구 말에 따르면 이렇다더라. 전문가에 의존해 내 말의 타당성을 높이려 합니다. 그래서 상대가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려 합니다.


그런데 이 전문가들의 의견이 엇갈린다면 누구를 믿어야 할까요? 코로나19 사태 초기 중국인 입국금지 정책을 두고 사회 전반에 엄청난 논쟁이 있었죠. 이재갑 한림대 교수는 중국인 전면 입국금지가 효력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의사협회는 전면 입국금지가 시급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끝내 입국금지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정부에 “전문가의 말을 듣지 않는 이념 정부”라는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이에 정부는 의협보다 더 전문가는 감염학회와 역학회, 예방의학회라며 더 수준 높은 전문성을 따랐을 뿐이라고 방어했습니다.


이를 두고 홍혜걸 의학전문기자가 재미있는 분석을 내놨습니다. 이 전문가 단체들이 무슨 주장을 할 지 미리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의협은 지도부가 보수색이, 예방의학회/역학회 지도부는 진보색이 강했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의협은 중국발 입국금지 찬성, 예방/역학회는 반대 입장에 섰습니다. 한편 대한감염학회는 정치색이 엷은데, 신기하게도 그 둘의 중간인 “중국 입국자 14일간 자가격리”라는 대안을 내놓았다고 합니다. ([홍혜걸 칼럼] "지금이라도 중국발 입국금지해야한다", 의학채널 비온뒤, 2020. 2. 11) 


시민들이 ‘현명한 자’로 믿고 의지하는 전문가들이 정말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걸까요? 최근 정치권과 언론을 보면 의심이 가는 사례가 주변에 많지만, 그 분들에 대한 평은 당장에는 조심스럽습니다. 제가 또 오버라도 하게 되면 괜히 그 분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게 되지 않겠습니까. 마침 최근에 읽었던 책에서 좋은 사례가 있어 그걸로 갈음해봅니다.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교수가 쓴 <우리 몸이 세계라면>에서 재미 있는 사례가 나옵니다.


한스 셀리에 교수는 ‘스트레스’ 개념의 창시자라고 합니다. 이 대가는 1969년 말보로를 파는 담배회사 필립 모리스에게 3년가 15만 달러를 받는 ‘특별 프로젝트’를 따냅니다. 그는 같은 해 법정에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수단으로서 담배가 가진 장점을 증언합니다. 1972년에 다시 필립 모리스로부터 같은 프로젝트를 수주받았고, 1976년 담배회사가 대중 배포용으로 만든 동영상에 등장해 담배회사를 옹호합니다. 심장병과 흡연이 관계가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다면, 이에 스트레스를 포함한 여러 요인이 있으니 이 같이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식으로 흡연을 변호한 것이죠. 셀리에 박사 사망 30년 후에야 이 같은 유착관계가 밝혀졌습니다. 이는 전문가가 경제적 이해관계를 따라 공적 임무를 외면한 대표적 사례입니다. 흡연을 옹호하고픈 사람들은 셀리에 박사의 논리가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흡연이 공중의 건강을 해친다’는 사실명제는 셀리에 박사의 개입으로 혼란에 빠졌습니다. 


너무 노골적인 사례라고요? 더 노골적인 사례도 있습니다. 역시 같은 책에 나옵니다. 일제침략기 해부학자 구보 다케시는 체질인류학을 들고 나왔습니다. 조선인들은 소화기와 치아 발달했지만 뇌가 작다고 분석했습니다. 또한 경성의전 외과 교수 기리하라는 혈액형을 이용한 생화학적 인종계수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A형 인자 가진 사람이 B형 인자 가진 사람보다 더 진화했다는 가정에서 일본에서 지리적으로 멀어질 수록 사람들이 진화가 덜 된 것이라고 결론내렸습니다. 쉽게 말해 일본 본토와 가까운 한반도 남쪽보다 한반도 북쪽 사람들이 더 야만적이라는 논리입니다. 이에 따르면 당연히 일본 본토 사람들은 한반도 사람들보다 진화적으로 우월한 셈입니다. 이 사례는 더 언급할 필요도 없습니다. 강제 지배라는 정치적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한 연구입니다. 


한편 이런 사례도 있습니다. 역시 같은 책에 나옵니다. 중세 의학은 로마 시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주치의였던 갈레노스의 저작에 절대적으로 의지했습니다. 갈레노스는 인체를 직접 해부하지 않고 동물 해부 자료를 바탕으로 인체를 유추했습니다. 그런데 과학혁명의 시기 베살리우스가 이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베살리우스는 직접 인체를 해부하며 ‘실증적 해부학’을 수립했던 것이죠. 베살리우스는 당대 최고의 해부학자 실비우스의 제자였는데, 실비우스는 제자의 의견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인체 해부결과 제자의 말이 옳다는 것이 입증됐음에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갈레노스가 틀린 게 아니라, 지난 1500년간 인간의 몸이 바뀌거나 퇴화한 것이다.’


오늘날까지 사용되는 이두근, 삼두근 등 해부용어를 정립한 대학자 실비우스가 ‘인간 몸 퇴화가설’로 옹호하려 했던 것은 갈레노스의 권위였습니다. 곧 지식의 헤게모니였습니다. 자신이 믿고 있는 지식이 거부당하는 게 싫었던 것이죠. 어떤 전문가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어떤 전문가는 인종적/정치적 이해관계를, 어떤 전문가는 지식적 이해관계를 위해 지성을 발휘했습니다. 이 같은 역사상 사례들이 말해주는 것은 결국 하나입니다. 객관적 사실의 전달자로서 전문가는 없습니다. 이들이 해당 분야에 정통한 사람들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윤리적 현자’가 아닙니다. 이들의 의견은 조작될 수도 왜곡될 수도 있고, 그 자체가 부족한 논리로 채워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들 역시 정치적, 경제적, 지식적, 젠더적, 계급적 이해관계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공적 임무를 배신하는 전문가들ㅁ도 있습니다. 그들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말입니다.


문제는 이 같은 ‘전문가의 배신’을 구별해내기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전문가들에게는 나름의 학자적 소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형성됐다고 하면, 각 분야에서 일생을 걸고 공부하는 학자들에 대한 모독일 겁니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는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요? 의사협회는 작년 7월부터 ‘원격 진료’ 도입을 두고 적극적인 반정부 태세에 돌입했습니다. 코로나 사태 초기 원격진료 도입 필요성이 제기됐을 때도 이를 극렬히 반대했습니다. 중국인 전면 입국금지라는 정책은 전문가로서 의협의 소명일까요, 아니면 이 같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조치일까요? 저는 그 분들의 진정성을 믿으려고 하는 쪽입니다만, 전후사정을 따져볼 때 정치적 이해관계의 영향이 조금은 있었던 게 아니냐는 비판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 같은 사실이 말해주는 것은, 시민의 입장에서 전문가의 소명과 이해관계에 따른 판단을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시민들은 전문가의 의견을 그냥 좇으면 안됩니다. 자기 신념과 맞는 전문가의 판단을 도그마로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그들 역시 틀릴 수 있고 정치, 경제적 이익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했기에 우리는 재미 있는 사태를 맞았습니다. 중국인 입국금지를 하자는 주장을 두고, 지지하는 쪽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상식 없는 사람들로 생각합니다. ‘방역의 기본은 봉쇄’라는 논리에서, 그걸 외면하고 친중정권을 어떻게든 옹호하려 애쓰는 딱한 자들’이 됩니다. 반대로 입국금지론자들을 두고, 방역은 결국 정치이며, 정책은 경제를 포함한 국가전반 사안을 고려해야 한다’는 논리에서 ‘입국금지에만 시야가 좁아진 앵무새들’이 됩니다. 자기가 좇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지 않는 사람들은 상식 없는 자들, 무식한 멍청이들이 되는 것입니다.


시민이 취사선택해 받아들여야 할 것은 입국금지가 ‘옳다’, ‘나쁘다’하는 결론이 아닙니다. 그 결론의 근거가 되는 ‘논리’와 ‘타당성’입니다. ‘방역의 기본은 봉쇄’, ‘정책은 정치, 경제를 포함한 국가전반 고려사안’이라는 이 두 논리 말입니다. 이 둘은 서로 간 누가 더 타당한지를 두고 열심히 싸워야 할 운명입니다. 우리는 전문가 의견의 타당성을 봐야 합니다. 의협 지도부가 말했기 때문에, 예방/의학회가 말했기 때문에 옳은 게 아닙니다. 다른 의견은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틀린 게 아닙니다. 그것이 틀렸음을 입증하려면 우선 그 의견의 근거가 되는 전문가의 논리에까지 깊게 들어가야 합니다. 그 타당성이 당신이 따르는 전문가의 근거보다 타당하지 못한 지점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런데 생계를 버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쏟는 시민들에게는 그와 같은 전문적 역량도, 여유도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곧 (명목 상이긴 하나)시민의 참여에 따른 정치이고, 시민들은 정책과 사회를 판단하고 이를 표현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시민들은 판단을 위해 전문가와 그 권위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전문가들이 갑자기 어느 당 비례대표로 가고, 어느 병원, 어느 회사 임원으로 가버립니다. 누가 ‘윤리적 전문가’인지 구별하기 힘든 현실입니다. 그들의 배경을 항상 의심해보고, 진술의 일관성을 파악해야 합니다. 정치, 경제 권력과 연관성을 찾아봐야 하나, 언제나 이런 일은 은밀히 진행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목소리 큰 전문가 말을 맹목적으로 좇는다면 정치적 양극화를 마주하게 될 겁니다. 


나와 다른 의견의 합리성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 배제의 정치가 조금씩 일상화되는 것을 느끼지 못하십니까? 우리는 조금 머리 아프더라도 더 공부하고 의심하고 받아들이는 습관을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전문성의 영역에서 일개 시민이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럼에도 그 고통스러운 공부의 경험이 우리의 역량을 길러줄 겁니다. 정치권, 자본, 특정 세력 등 우리를 이용하고 조종하려는 시도를 판별하고 분간할 힘을 말입니다. 돈 버는 게 힘들고 바쁘지만, 유튜브와 드라마 등 재미있는 게 너무 많지만, 우리는 어려운 자료를 찾아보고 외신을 해석하고 책을 읽는 데 시간을 써야 합니다. 우리의 시민된 의무를 다하고 시민된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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