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에리히 프롬

by 늉릇

지난달에 읽었던 <사랑의 기술>의 이전 이야기가 아닐까 싶은 내용이었다.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짚고, 그래서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사랑의 기술에서 풀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의 기술>을 읽기 전에 먼저 읽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작가는 현대의 인간은 경제적인 생산물을 만들어야만 의미를 갖는 존재로 전락하였고,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인간이 되어버렸다고 말한다. 무력감을 억압하려 하는 거짓 활동성, 즉 분주함을 내려놓고 고요를 즐길 수 있을 때, 즉 진정한 내면의 활동성을 회복할 수 있을 때에만 진정으로 자신을, 타인을, 그리고 삶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눈을 뜨면 카톡,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 가만히 앉아서 소비할 것이 천지인 요즘 세상에서 가만히 앉아서 고요를 즐긴다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어렵긴 하겠지만, 나의 수동성을 인정하고 고요함을 즐겨보려는 노력을 해볼 가치는 있을 것 같다. 나를, 타인을, 그리고 내 삶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되기 위해서.




1.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삶은 항상 과정이다. 변화와 발전의 과정이며, 기존 구조와 태어난 환경이 주고받는 끝없는 상호작용 과정이기도 하다. 사과나무는 절대 벚나무가 될 수 없지만, 사과나무나 벚나무는 타고난 체질과 환경 조건에 따라 멋진 나무가 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어떤 나무한테는 축복인 습기와 햇볕이 다른 나무를 죽일 수도 있다. 인간도 다르지 않다. (26쪽)


- 삶을 사랑하건, 다른 사람이나 동물, 꽃을 사랑하건 모든 종류의 사랑에 적용되는 기본 원칙이 있다. 내 사랑이 적절하고 상대의 욕망과 본성에 맞을 때만 나는 사랑할 수 있다. 적은 물을 필요로 하는 식물이라면 그 식물에 대한 사랑은 필요한 만큼만 물을 주는 것으로 표현된다. … 식물이, 동물이, 아이가, 남편이, 아내가 뭘 필요로 하는지 모르고 무엇이 상대에게 최선인지 정한 내 선입견과 상대를 통제하려는 욕망을 버릴 수 없다면 내 사랑은 파괴적이다. 내 사랑은 죽음의 키스인 것이다. (28쪽)


- 사랑은 항상 성장을 향한 적극적 관심을 담고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의 생명력을 향한 관심을 담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랑이란 되는 과정, 하나 되고 온전하게 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생명력 넘치는 모든 것을 향한 사랑은 이런 성장을 촉진하고픈 열정적 욕망으로 표현된다. (36쪽)


- 고요를 좋아하지 않으면 사랑은 없다. 사랑은 행동, 소유, 사용이 아니라 존재에 만족하는 능력이다. (41쪽)


-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이다. 고통은 인생의 최악이 아니다. 최악은 무관심이다. 고통스러울 때는 그 원인을 없애려 노력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 감정도 없을 때는 마비된다. 지금껏 인류 역사에서 고통은 변화의 산파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무관심이 운명을 바꾸는 인간의 능력을 짓밟아버릴 것인가?(45쪽)


2.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 오늘날에는 모두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모두가 자기 바깥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이용한다. 사물의 생산이라는 한 가지 전능한 목표만 존재할 뿐, 우리가 입으로만 신봉한다고 고백한 목표, 즉 완전한 인성 발달. 완전한 인간 탄생과 성장은 중요하지 않다. (55쪽)


- 평등의 개념은 계몽주의 철학에서 절대주의 국가에 저항하며 발전했고, 이마누엘 칸트의 말대로 모든 인간은 타인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서로 동등하다. 즉 모든 인간은 자기 목적이지 결코 수단이 아니며, 그 어떤 인간도 타인을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을 권리가 없다는 의미다. (58쪽)


- 현대의 윤리적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떠안아야 할 두 번째 과제는 창조적 인간이 되어 소비와 수용의 태도를 극복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창조적이란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짓고 작곡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태도, 하나의 성격, 인간과 세계를 대하는 하나의 자세로서 창조성이다. 가령 책을 한 권 읽는다고 치자. 그 책을 다 읽고 나면 나는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을 다 이해한다. 그게 전부다. 물론 내가 원한다면 그 책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순수하게 소비자의 자세다. 하지만 그 책이 좋은 책이라는 전제하에 작가가 말하는 것을 그저 받아들이는 수준에서 멈추지 않고 내 안에서 무언가 깨어나고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도록 책을 읽을 수도 있다. 그러면 나는 그 책을 실제로 읽는 것이고, 책을 읽고 난 나는 달라진 인간이다. 책을 읽고서도 내가 똑같은 사람이라면 그 책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거나 내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그 책을 그저 소비한 것이다. (65-66쪽)


- 현대의 다른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는 한 가지만 강조하고 싶다. 그 무엇보다 우리는 수단은 실제로도 수단으로, 목적은 실제로도 목적으로 놔두어야지 둘을 뒤죽박죽 섞지 말자고 결심해야 한다. 인간이 모든 것의 목적이라는 서구의 종교와 인문주의 전통에 진심을 다하자고 결심해야 한다. (70쪽)


3. 이기심과 자기애

- 니체 역시 사랑과 이타주의를 나약함과 자기부정으로 여긴다. 니체는 사랑의 욕망이란 갖고 싶은 것을 쟁취할 능력이 없어서 ‘사랑’으로 얻으려 하는 노예근성의 전형이라 본다. 그러기에 이타주의와 인간애는 퇴화 현상이다. (79쪽)


- 현대의 인간 유형은 두 가지 의미에서 이기적이었다. 남에게 관심이 적었고, 자기 이득을 채우려 안달복달했다. 하지만 이런 이기심의 주인공이 정말로 지성과 감성의 가능성을 모조리 갖춘 개체로서의 개인일까? 알고 보면 ‘그’는 그가 맡은 사회경제적 역할의 장식물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중요할 때도 있겠지만 결국 경제라는 기계를 움직이는 하나의 톱니바퀴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87쪽)


- 아주 일반적으로 볼 때 전제 조건은 다음과 같다. 타인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우리 감정과 태도의’ 대상’이다. 우리를 대하는 자세와 남을 대하는 자세는 결코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일치한다. 이것을 우리 질문에 적용해 보면 그 의미는 이렇다. 타인을 향한 사랑과 우리 자신을 향한 사랑은 타인을 향한 증오와 자신을 향한 증오와 마찬가지로 양자택일이 아니다. 정반대로, 자신을 사랑하는 자세는 조금이나마 타인을 사랑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다. 겉으로만 보면 정반대 같지만, 자신을 향한 증오 역시 타인을 향하나 증오와 떨어질 수 없다. 달리 말해 사랑도 증오도 마찬가지여서 자신에게 향하는 감정과 타인에게 향하는 감정은 원칙적으로 분리할 수 없다. (91-92쪽)


- 더 교묘한 형태의 자기 거부는 언제라도 자기 회의감에 빠질 수 있는 마음이다. 그런 사람은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잘못을 저지르는 순간 곧바로 그래서는 안 되는 이유를 자신에게서 발견한다. 그들의 자기비판은 잘못이나 부족함의 경중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자신이 세운 이상적 관념 탓에 그들은 완벽해야 한다. 주변의 박수와 애정을 받고 싶다면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할 만큼 틀림이 없어야 한다. 틀림없이 잘했거나 남들이 확실히 박수갈채를 보낼 것 같으면 기분이 좋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평소 잊고 있던 열등감에 압도당한다. 여기서도 자기애의 결핍이 이런 태도의 원인임을 드러난다. (103-104쪽)


- ‘마조히즘적 사랑’은 자신보다 강하다고 느낀 다른 사람과 온전히 하나가 되기 위해 자신의 자아, 자발성, 온전함을 포기한다. 깊은 불안이 혼자서는 설 수 없다는 기분을 불러오기에 자신의 자아를 버리고 타인의 일부가 되어 그에게서 안정감을 느끼고, 갈망하던 중심을 찾겠다는 욕망이 생겨난다. 이런 자아의 포기는 자주 ‘위대한 사랑’의 사례로 칭송받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상숭배의 한 형태이며 자아의 말살이기도 하다. 이렇듯 자아의 포기를 사랑이라 부르다 보니 마조히즘적 사랑의 매력과 위험성은 더 커졌다. (107쪽)


- 사랑의 조건은 혼자서도 제정신을 유지하며 외로움을 견딜 수 있는 자아의 강인함과 독립성, 온전함을 갖추는 것이다. 이 조건은 사랑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사랑받는 사람에게도 해당된다. 사랑은 자발적 행동으로, 여기서 자발성은 말 그대로 자신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을 말한다. 자아가 불안하고 나약하면 자기 안에 뿌리를 내릴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은 자기 ‘대상’의 열정적 긍정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격정’이 아니라 자기 ‘대상’의 행복과 발전, 자유를 위해 매진하는 능동적 노력이다. 자신의 자아가 불구가 되면 이런 열정적 긍정이 불가능하다. 진정한 긍정은 항상 강인함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자아가 손상되면 사랑은 양가적인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다시 말해 자아의 강한 부분으로는 상대를 사랑하지만 손상된 부분으로는 그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09쪽)


- 사랑은 성격으로 인한 증오와 마찬가지로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기본자세에 뿌리내린다. 사랑은 사랑하겠다는 꾸준한 마음가짐이다. 따라서 사랑을 ‘근본적 호감’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특정 대상은 사랑을 불러일으킬 수 있겠지만 사랑의 원인은 아니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사랑하겠다는 마음가짐은 미워하겠다는 마음가짐과 마찬가지로 성격이다. (112쪽)


4. 창의적인 삶

- 다른 사람을 창의적으로 본다는 것은 투영과 왜곡 없이 객관적으로 본다는 뜻이며, 이는 어쩔 수 없이 투영과 왜곡을 낳는 자기 내부의 신경증적 ‘악덕’을 극복한다는 의미다. 완전히 눈을 떠 내면과 바깥의 현실을 인지한다는 의미다. 그런 내면의 성숙에 이른 사람만이, 자신의 투영과 왜곡을 최소로 주일 수 있는 사람만이 창의적으로 살 것이다. (131쪽)


- 그리고 마침내 모든 안전을 버리고 단 하나만을 믿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사물을 진정으로 인식하고 그것에 응답하는 자신의 힘, 다시 말해 자신의 창의성만 믿을 수 있는 용기 말이다. 창의적이라는 것은 인생의 전 과정을 출생으로 보며 인생의 어떤 단계도 최종 단계로 보지 않는 것이다. (142쪽)


6. 무력감에 대하여

- 중요한 특징은 한 사람이 특정한 기능을 하지 못하며, 마땅히 할 수 있어야 하는 일을 할 수 없고, 이런 무능함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자신이 나약하고 무력하다는 깊은 확신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 나는 어떤 것에도 영향을 미칠 수 없고 어떤 일도 착수할 수 없으며 내 의지로는 외부 세계나 나 자신의 어떤 것도 변화시킬 수 없고, 아무도 나를 대우해주지 않으며 모두가 없는 사람을 취급한다. (157쪽)


- 무력감은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아니, 어쩌면 개인에게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무력감은 이것일지도 모른다. 그중 한 가지가 내면에서 일어나는 충동과 불안에 대처하지 못하는 무능력이다. 이런 사람에겐 충동과 불안을 통제하려는 노력이라도 해볼 수 있다는 믿음 자체가 아예 없다. 그의 모토는 이렇다. “난 원래 그래. 절대 바꿀 수 없어.” 자신을 바꾸는 것보다 더 불가능한 일은 없는 것 같다. 이런저런 성격 때문에 얼마나 괴로운지 한탄하고 푸념하는 것으로 인생을 다 보낼 수도 있다. 혹은 자신을 바꿀 각오가 되었다며 자랑을 늘어놓을 수도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히려 그 때문에 더 끈질기게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확신에 집착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어떻게 하면 자신을 바꿀 수 있을지 궁리해 매주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줄 애정 관계를 기대하지만, 이 모든 활동과 의도적 노력은 그저 깊디깊은 무력감을 가리는 우산에 불과하다. (162-163쪽)


- 위로하는 합리화의 세 번째 형태는 무력감의 억압이다. 이는 무력감을 희미하게 의식은 하지만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그 뾰족한 가시가 무뎌지는 경우에 나타난다. 이 경우 무력감은 과도한 보상 행동과 은폐 목적의 합리화로 대체된다. 과보상의 가장 흔한 사례가 분주함이다. 깊은 무력감을 억압한 사람은 남보다 더 활동적이고 분주하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그를 무기력한 인간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할 정도로 매우 활동적이고 분주하다. 그런 사람은 항상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 자기 지위가 위험하다고 느끼면 그들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그 무엇도 시도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문제를 자꾸 만들지도 않고, 기적이 일어나리라는 상상에 빠져 허우적거리지도 않는다. 그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이 일 저 일을 벌여 위험을 막기 위해 극도로 활동적이라는 인상을 일깨운다. (169-170쪽)


7. 기본 소득으로 자유를 얻으려면

- 인간은 ‘소비하는 인간’으로 변해버렸다. 인간은 만족을 모르고 수동적이며 날로 더해가는 끝없는 소비로 텅 빈 마음을 보상하려 한다. 과식, 구매, 음주가 우울증과 불안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는 메커니즘과 관련해서는 수많은 임상적 사례가 존재한다. (200쪽)


8. 소비하는 인간의 공허함

- 여기에 또 다른 것이 추가된다. 세상 안에 존재하며 세상에 자신을 내주고 삶의 행위에서 자신을 변화시키는 존재는 탐욕과 소유욕을 버릴 때만, 자신의 자아를 세상과 대립하는 고정불변의 고립된 에고로 생각하지 않을 때만 가능하다. 이러한 자아를 단념할 때만, 신비주의자의 언어로 표현해 완전히 자신을 텅 비울 때만 인간은 자신을 완전히 채울 수 있다. 세상에서 그에게로 다가오는 것으로 완전히 채워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기적인 자아를 비워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건, 자연이건, 생각이건 관계없다. 자신으로 꽉 찬 인간은 마음을 열고 자신을 내줄 자유가 없다. 다시 한번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면 부자는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많이 존재하는 사람이다. 20세기를 사는 우리는 한 가지를 더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이 소비하는 사람은 부자가 아니라고 말이다. (230쪽)


9. 활동적인 삶

- 실제 그의 분주함과 게으름은 같은 것이다. 즉 내면 활동성의 결핍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강박적으로 활동하고 강박적으로 활동적이지만 그러고 나면 활동적으로 행동한 만큼 게으르고 싶다는 갈망을 느낀다. 물론 활동하고 나서 운동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역시 다른 형태의 강박적 활동성일 때가 많다. 운이 좋아 아무것도 안 할 수 있고 최대한 게으름을 부릴 수 있는 사람도 아주 많다. 그것은 ‘휴식’이다ㅏ. 그러나 사실 그러한 휴식은 일과 마찬가지로 수동적이다. 수동적인 일과 수동적인 휴식, 이 둘은 딱 맞는 짝이다. 충분히 쉬고 나면 다시 문제가 고개를 내밀고, 아마도 고민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다. 그러고 나면 다시 고민을 잊기 위해서 일해야 한다. (248쪽)


- 목표는 무엇인가? 나는 수동성을 의식하고 이 수동성이 인간에게 고통을 준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작은 깨달음이다. 다음 걸음은 진정한 활동성의 연습이다. 아마도 그 시작은 한번 가만히 앉아 바라보려는, 들어보려는, 명상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이건 절대 쉬운 과제가 아니다. 말은 정말 쉬워 보인다. 가만히 좀 앉아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답할 것이다. “그게 뭐 특별하다고. 당장이라도 할 수 있어.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래?” 하지만 한번 해보면 당신이 얼마나 쉼 없는 행동의 강제와 분주함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2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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