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줄 아는 것과 잘하는 것의 차이
큐브에 대한 가장 부정적인 인식 중 하나가 바로 '공식만 외우면 다 된다.'이죠. 큐브를 무시하는 경우라면 손빠르기와 공식 암기력만으로 모든 게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이것 자체를 대단하게 여기는 경우도 있으나 이건 이것대로 문제인 게 너무 공식 의존성으로 큐브를 하다 보니 실제 본인의 문제점을 파악하지 못하고 공식만 주구장창 외워대서 외운 공식 수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데 솔빙의 효율성이 더 떨어지는 기이한 경우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 오해를 깨부수기 위해 이 글을 써 봅니다.
일단 공식의 정의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로 정의하느냐에 따라 대답이 미묘하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큐브는 공식만 외우면 다 되는 거 아니냐는 질문의 답은 무조건 NO였을 겁니다. 1단계부터가 본인의 사고력으로 해결하는 단계이니 본인 머리가 안 돌아가면 공식은 보지도 못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실제로 아직도 십자가 맞추는 게 어렵다면서 다른 해법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있고 아쉽지만 이런 분들한테 가르쳐줄 해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다릅니다. 그 십자가 맞추는 것조차도 최대한 단계를 쪼개고 쪼개서, 움직임 하나하나를 공식처럼 설명하는 경우가 늘었죠. 예전에는 '이 정도는 당연히 다 하겠지.' '말로 설명하는 게 더 어렵다.' 정도의 생각이 있었다면 지금은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설명하는 것이 좋은가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졌기 때문에 설명이 가능해진 겁니다. 제가 올려놓은 해법 자료도 그렇고 다른 영상들의 경우도 십자가 맞추는 과정을 하나하나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경우를 공식 암기로 본다면? 공식만 외우면 큐브를 맞출 수 있다는 말은 사실입니다.
이제 확장을 해 봅시다. 스피드솔빙을 한다면. 공식만 추가로 외우면 다 될까요? 물론 가능합니다. 회전수 자체가 확 줄어들 테니 기록이 좋아지는 건 당연하겠죠. 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효율성을 원한다면 공식 암기에만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초급에서 십자가로 시작하던 걸 중급 이상에서는 CROSS라는 개념으로 확장합니다. 단순히 한 면의 십자가만 맞추던 것에서 옆면의 센터와 색배치를 고려하기 시작하죠. 그리고 이것은 공식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공식으로 암기하기에는 경우의 수가 과도하게 많죠. 크로스의 색을 하나로 한정하면 1단계 경우의 수만 10만 가지 가까이가 됩니다. 물론 단순히 맞추는 것만 생각하면 경우의 수를 대폭 줄일 수 있겠으나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스피드솔빙이죠. 십자가만 맞추고 끝낼 게 아니라 다음 단계도 생각해야 하며 섞인 상태가 1회전만 차이 나더라도 더 효율적인 솔루션이 생겨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이 경우의 수를 모두 암기하지 못한다면 실제로 대회에서 공식적으로 주어지는 15초간의 미리 보기 동안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새로 만들어내야 하는 겁니다.
이는 F2L에서 극명하게 드러나죠. F2L을 아무 생각 없이 공식암기로 해결하려 한다면 외워야 할 공식이 너무 많아집니다. 더 효율적으로 다음 상황을 만드는 방법 등은 공식으로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큐브에서 나오는 웬만한 상황이 다 그렇듯 공식이 너무 많아집니다. 모든 건 인간이 큐브를 솔빙하는 도중에 생각해내야 하죠. 이때 무슨 생각은 하느냐가 솔빙의 효율성을 결정하는 겁니다.
물론 LL파트로 들어가면, 조금 무리해서 LS파트까지 본다면 공식 암기가 직접적으로 효율성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겁니다. 이미 많은 조각이 맞춰져 있어 회전에 제약이 많이 생기기 때문에 확실히 인간의 두뇌로 뭘 해보는 게 어렵기 때문이죠. 물론 상황을 판단하는 난이도가 너무 어렵거나 돌리는 게 너무 불편하다는 등의 이유로 모든 공식을 다 외우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최상급 랭커들은 단순 OLL, PLL만 외우는 게 아닌 그 이상을 바라봅니다.
이는 다른 큐브를 맞출 때나 블라인드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FMC는 이 분야의 끝판왕이고요. 예를 들어 44 큐브 또한 공식만 외우면 맞출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스피드솔빙으로 넘어가면 어떻게 센터를 맞추는 게 회전수가 적은 지, 어떻게 첫 3 크로스를 맞추는 게 빠른지,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한 가지 색의 센터, 하나의 엣지 정도를 맞추는 방법이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가이드라인처럼 공식화되어 있을 뿐 그 단계의 전체 과정에서 어떻게 해야 효율적인지는 가르쳐주지 않죠. 사람이 스스로 해야 하는 겁니다.
공식만 외우면 다 잘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건 이론적으로 가능한 모든 기보를 다 외우고 다니면 체스를 잘할 수 있다는 말과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을 겁니다. 물론 모든 기보를 다 외울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그랜드마스터까지 쉽게 올라가겠지만 인간의 능력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니까요. 큐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경우의 수를 다 외울 수 있다고만 하면 그 사람은 최소한 피지컬을 요하지 않는 FMC에서는 세계 최강이 되겠지만 인간은 그것을 할 수 없죠.
별 의미없는 논쟁일지도 모릅니다. 공식을 갖다줘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으니 공식을 외웠다는 것 자체만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큐브에서 머리가 더 잘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논쟁이 필요한 이유는 너무 큐브를 공식암기로만 해석하여 잘못된 인식을 가지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공식만 달달 외워서는 큐브를 잘 할 수 없습니다. 큐브를 잘 하려면 공식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죠. 단순히 할 줄 안다는 수준이라면 몇 개의 공식을 암기하는 것으로 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그 이상의 능력을 위해서는 단순 공식암기 이상의 두뇌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