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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고산병 스케치북 논란으로 보는 설레발의 의미

by 라이벌 큐버

5월 13일 두산 베어스와 한화 이글스의 경기. 한화는 12연승을 하며 단독 1위에 올라와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너무 즐거웠던 걸까요? 한화 유니폼을 입고 있는 한 관중은 아래와 같은 모습을 한 채 중계에 잡혔습니다.


이 장면은 많은 논란을 가져왔습니다. 한화 팬들에게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고산병이라는 단어 자체도 문제가 되었고 산소마스크까지 준비해 오는 정성스러운 모습은 오히려 중계에 잡히기 위한 어그로성 행동으로 받아들여지며 커뮤니티는 더욱더 불타올랐습니다. 신상이 털렸고 어마어마한 비난이 가해졌죠. 털린 게 본인 신상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저는 그 신상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요.

일각에서는 저게 경기력에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닌데 팬들이 화를 내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도 이야기합니다. 물론 현재 그 관중에게 가해지는 비난이나 신상털이는 도를 넘은 게 맞습니다. 그러나 화를 낼 이유는 충분합니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KBO에서 있었던 수많은 설레발과 그에 대한 팬들의 반응을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아의 타어강, 두산의 어우두, SK의 초상집, LG의 피우향, 삼성의 못참선(왕조선언, 왕조부활 등으로도 불림), 롯데의 기세, 한화의 고산병까지. 창단된 지 20년이 넘은 모든 구단이 하나씩 가지고 있는 각종 설레발 내지 자만심이 한가득인 단어들입니다.

위에서 나온 많은 드립의 공통점은 당연히 우승할 것처럼, 당연히 포스트시즌에 진출할 것처럼 설레발을 쳤지만 결국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순위가 떨어져 타 팬들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는 겁니다. 타어강, 초상집, 피우향, 왕조선언, 기세, 고산병. 모두 현재까지도 그 팀을 조롱하는 단어로 자리 잡았고 야구판 설레발을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죠. 어떻게 강팀이 되었냐던 2013년의 기아는 최종 8위, 어차피 우승은 두산이라더니 2018년 두산은 SK에 업셋 허용, 5승1패 해놓고 초상집 분위기라던 2019년의 SK는 정규리그 1위를 두산에게 빼앗기더니 키움에 업셋 허용, 우승의 향기가 피어오른다던 2020년의 LG는 최종 4위, 왕조를 선언했던 2020년의 삼성은 최종 8위, 기세 좋게 날아오를 것 같던 2023년의 롯데도 최종 7위, 너무 높이 올라와서 고산병에 걸릴 것 같던 2024년의 한화는 최종 8위였죠. 그렇게 자만해놓고 결과가 그만큼 안 나오니까 타팀 팬들의 조롱은 어찌보면 당연한 겁니다.

이 점을 이해한다면 한화 팬들이 고산병에 그렇게 열을 내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2024년 이후 고산병은 설레발의 상징이자 한화 이글스, 그리고 한화 팬들을 조롱하는 상징적인 단어가 되었습니다. 그런 단어를 한화 팬을 자처하는 이가 공개된 장소에서 대놓고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습니다. 경기를 이겼으면 몰라 그 경기를 졌고 다음 날 경기마저 패배하며 1위 자리마저 도로 LG에게 내주고 3연패를 했으니 대놓고 조롱을 해 달라고 무릎 꿇고 비는 것이나 다름이 없죠. 학창 시절에 듣기 싫었던 별명이 있다면 쉽게 이해하실 것 같네요. 듣기 싫었던 그 별명을 굳이 당사자가 보는 앞에서 말한다? 이건 학교폭력이죠. 당사자가 그 별명을 직접 언급할 일도 없을 거고요. 언급한다 해도 긍정적인 의미로 언급하지는 않겠죠.

산소마스크까지 챙겨 왔다는 것은 팬들의 화를 더욱 돋우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일반 가정집에 저런 걸 구비해두지는 않습니다. 그 말은 산소마스크를 일부러 준비했다는 말입니다. 야구장에 산소마스크를 가지고 가면 당연히 관심이 쏠릴 것이고 중계에 잡힐 가능성도 높아지겠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이 관중은 순수하게 응원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한화 팬들에게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고산병 피켓을 들고 산소마스크를 쓰는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거죠. 저 정도 정성이 있는 사람이 고산병이 한화에 가지는 의미를 몰랐을 것 같지도 않고요. 이 때문에 오히려 그 사람이 한화 팬이 아닐 거라 생각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중계에 곤룡포를 입고 스케치북에 '왕조 선언합니다.' 같은 문구를 써놓은 관중이 잡혔다고 생각해 보면 저라도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왕조니 선언이니 하는 말은 삼성의 대표적인 설레발이자 조롱의 대상이니까 이걸 의도적으로 곤룡포까지 입어가면서 야구장에서 보여준다는 건 어그로를 끌기 위함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 같아요. 팬들을 긁는 거죠.

물론 3연패의 이유가 저거 때문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선수가 못 해서 3연패 한 거라는 거 팬들도 모르는 거 아닙니다. 단순히 져서 화를 내는 게 아니에요. 의도적으로 팬들의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는 일부 관중의 행동 때문입니다. 끝까지 1위를 유지할 수 있으면 몰라 아직 시즌 초반이라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기억을 굳이 다시 불러오는 행동이 좋아보일리도 없고 만약 순위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그때보다 더 큰 조롱으로 돌아올 게 뻔하니까요.

팬들의 속을 긁으면서까지 중계에 잡히려고 노력하지 맙시다. 그 시간에 참신한 주접멘트 같은 거나 고민하세요. 제대로 만들어오면 중계에 잡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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