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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현 Aug 28. 2024

철학과랑 문예창작과는 뭐가 다를까

  학교 앞에는 떡볶이 집이 있었다. 소크라테스 떡볶이. 사장님은 철학과를 졸업했다고 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철학과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는 데에 있어서 그 이후의 삶은 무엇이 다를까. 언젠가 나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철학을 배우다 보면 그 끝은 인류멸망론으로 가잖아?

 세상은 정론대로 흘러가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까."

  

  나도 떡볶이 장사를 할 뻔했다. 다니던 영화관을 그만두고 나는 아예 지방으로 내려와 가족과 함께 살게 되었다. 평범한 사무직 자리를 얻은 나는 매달 월급 중에서 엄마와 동생에게 용돈을 주고 있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1학년인 나의 동생은 아직 고마움을 모르는지 얼마 전 이렇게 말했다.

  “좋은 대학을 나올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누나를 보니까.”

  흔히 듣는 말이었다. 나는 조용하고 묵묵하게 서류를 작업했고 어디 하나 튀는 점이 없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글쓰기가 아니라면 나만의 이야기를 할 일도 없었다. 이제 다음 스텝은 연애고 결혼인가.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어른이 되다니. 나 자신을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평범해지길 애써 바라고 있는 게 내 현실이었다. 나는 동생에게 말했다.

  “나 아직 안 끝났어. 내년에는 NCS를 칠 거야.”

  비록 계약직이지만, 내 인생에서 최고로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게 되었다. 이 직장을 얻기까지 수많은 면접을 보았고 탈락이 있었다. 나는 면접에서 내 신념과 내 가치관이 전부 무너져 내린 때가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우울증이 쌓이고 쌓여 관리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서울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나는 내가 방황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아니었다. 실패했다는 생각이었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직장은 계약직이었다.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재계약에 실패하고 말았다. 백수가 되는 것이 기회가 될지도 몰랐다. 지금 하고 있는 자격증 공부를 마무리하고 다른 지역의 좋은 회사에 다니면, 그리고 내가 삼 년 이상을 버티면, 동생한테 그런 소리는 안 듣겠지 싶었다.


  나는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 이학년 때 농사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식사를 하던 중에 뇌졸중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죽음이 매우 충격적이어서 그 후유증이 몇 년은 갔다.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 이렇게 말했다.

  ‘공부 너무 열심히 하지 마. 피지컬이 중요하니까 밥만 많이 먹어.’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고 밥도 안 먹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 공부가 재미있었고 적성에 맞았다. 내가 잘하는 것이 공부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있었다. 나는 내가 엄청 큰 사람이 될 줄 알았다. 그만큼 타인을 이해하는 폭이 넓었으니까. 흑과 백을 아우르는 사람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버지도 공부를 잘했다. 학교 동문 중에는 출세한 사람도 많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럴듯한 직업을 가지지 못하고 내내 실패하다가 죽기 한 두 해전 농사일을 시작했다. 옥수수 농사를 지었을 때 밭을 예쁘게 꾸며보겠다고 다 써서 하얗게 변한 연탄을 밭에 줄지어 놓았다. 그랬더니 땅이 황폐해져서 옥수수 키가 절반 밖에 되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마치 그때 심어둔 옥수수 같았다. 키도 자라지 않고 옥수수 열매도 많이 맺히지 못한 옥수수. 기억 속에 아버지는 그저 허, 허, 하고 웃을 뿐이었다.

  졸업을 하게 되면 뭘 하지. 그 고민은 대학에 다닐 때도 꾸준히 하던 질문이었다. 그리고 문득 학교에서 전교 삼등을 하던 아이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최근 엄마는 그 아이의 엄마와 밥을 먹었다고 했다. 그 아이의 엄마는 YWCA에서 오랫동안 근무하고 있었다. 전교 삼등을 하던 그 아이는 철학과에 갔다고 했다. 내가 되물었다.

  “걔가 왜 철학과를 가? 공부를 그렇게 잘했으면 의대나 갈 것이지.”

  “고집이 세잖아. 아무도 못 말렸대.”

  “그렇긴 해도, 취업이 안 되잖아.”

  “지금도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대.”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울리긴 한다만, 어른이 되고 보니 주변 사람들은 돈을 쫓아가던데 같이 떡볶이 장사나 제안해 볼까 하고 잠시 생각했다. 그러면 학교에서 전교 꼴찌를 하던 아이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옆 동네에서 치킨 집을 차려 잘 나가고 있었다. 하루 종일 숯불 앞에서 뜨겁게 일한다는 것이 흠이었지만 돈은 잘 벌고 있었다. 그 애가 부럽기도 했다. 별 볼일 없는 나는 또 워크넷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살면 살수록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흐릿했다. 이래도 되는 걸까. 그냥 가볍게 숨을 쉬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아직 많은 종류의 직업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업상담사 공부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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