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과생이 되면 거의 대부분이 시작하는 길
오늘 이야기는 대학교 후배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그에 대해 애정이 깊었다. 오늘 글을 작성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결국 초고를 버리기로 했다. 브런치에서 다른 사람의 글을 읽으면서 환기하는 마음을 가졌다. 커피를 타와서 먹어보기도 하고 스트레칭도 좀 하고 빨래도 개면서 할 말들을 생각했다. 내 생각이 정말 사람들이 읽고 싶은 글일까.
나는 그에게 맥주를 얻어먹곤 했다. 매번 같은 장소 같은 창가 자리에서 같은 맥주를 마셨다. 그는 그것을 안정감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다른 음식 다른 장소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좀이 쑤셨다. 그래서 넌지시 그에게 놀거리를 제안해 보았지만 여러 번 퇴짜를 맞았다. 언젠가 클라이밍을 해보자고 했을 때는 ‘그 운동이 나랑 맞는 운동인지 알아봐야하고..’ 하면서 거절했다. 그때 나는 실망감이 터져 나와 이렇게 문자를 보냈다.
‘그렇게 많은 것들을 함께 하자 해놓고 결국 한 것이 없네.’
차라리 그와 여행이라도 갔으면 좋았을 것이다. 유럽의 멋스러운 벤치에 앉아 하늘에 스며드는 노을을 보며 한국에서 했던 얘기를 또 하고 또 했다면 나아졌을 것이다. 여러모로 후회가 남은 이별이었다.
그를 왜 좋아하고 만났는가 하면 그가 소설에 긍정적인 흥미를 가진 유일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예술고등학교에서 만난 내 친구들은 대부분 일찍이 다른 길을 갔지만 그는 달랐다. 그는 일반고 출신이었다. 그는 글을 쓰면서 광명을 되찾았다고 했다. 그다지 존재감도 없는 학창 시절이었지만 그가 쓴 원고로 대학에 합격했을 때 학교에서는 “쟤가 누구였어?”하고 난리가 났다고 했다. 그는 스무 살부터 문예창작과 과외 입시 선생님이 되었다. 그렇게 월 오백만원을 벌었고, 대기업에 다니는 회사원만큼 벌었다. 그는 당차고 자신감 있어 보였다.
그가 레드오션인 과외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학생들의 멘탈케어를 잘 해주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걱정도 많고 고민도 많은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었다. 그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은 더 세심하게 가정사를 챙겨주는 것이었다. 보통 사연이 있는 학생들이 글을 쓰고 싶어 했다. 나도 과외를 받아 예술고등학교에 간 학생이라 그 마음을 잘 알았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뒤늦게 과외를 구해 수업을 받으면서 선생님에게 제일 많이 한 질문이 이거였다.
“쌤, 저 정말 재능이 있어요?”
그때 선생님은 내 글에 구성이 있다고 하면서 돌돌 말린 피자를 사줬다. 그게 어찌나 고맙던지. 고등학교 가산점이 있는 백일장 대회 전날에는 가 있을 곳이 없어서 선생님의 집에서 잠을 잤다. 선생님은 붕어빵을 좋아하는 어머니를 위해 아날로그 방식으로 펜에 붕어빵을 구웠다. 나는 그 붕어빵을 먹으면서 언제쯤이면 우리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런 경험을 하면서 나도 나중에 커서 선생님이 되어야지 하고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밤새 고민하다가 내린 결론으로 나는 되는 쪽 보다 안되는 쪽에 더 치우쳐서 생각했다. 우리 엄마를 떠올리며 한 생각이었다. 엄마는 학원 선생님이었다. 학원 선생님이라는 게 아이들의 사정에 따라 잘 될 때는 엄청난 호황기를 누리지만 잘 되지 않을 때는 입에 풀칠을 하기도 어려웠다. 계속 일을 해도 나아지지 않는 가계 상황에 불만을 가진 나는 어린 마음에 엄마를 부정하기 시작했다. 나는 엄마처럼도, 아빠처럼도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맥주를 마시며 대학교 후배에게 물었다.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니까 나쁜 점은 없어?”
“애들 소설 봐 준답시고 내 소설을 쓰지 않게 되는 단점이 있지.”
나는 그에게 말했다.
“나중에 작가로 당선하게 된다면 꼭 알려줘!”
지금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를 일이었다.